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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17)화 (217/385)
  • 217화. 머저리인 게야?

    잠시 멈칫했던 풍 어사가 노성을 토했다.

    “루 통정, 지금 자네들은 죄가 없고 본관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인가?”

    “제가 어찌 감히…….”

    루안이 몸을 돌려 황제를 향했다.

    “폐하, 풍 어사가 올린 상주문의 내용은 사실이 맞사옵니다. 하오나, 폐하. 북양태비께서는 제 자식의 안부를 살피고자 금기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도성에 들어오셨습니다. 북양태비께서 보이시는 넘치는 모정에, 신이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사옵니까? 도성에 들어오신 것을 알면서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은 죄…… 신, 이 자리에서 인정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저와 북양태비께서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풍 어사의 주장을, 신은 조금도 인정할 수 없사옵니다.”

    다른 마음 따위가 아닌, 그저 사사로운 모정일 뿐.

    루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말에는 얼굴조차 볼 수 없는 모자지간의 서글픔이 배어있어서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효는 천하를 다스리는 기본 도리라 했다.

    루안이 제 어미를 위해 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나오자 다른 이들이 그를 추궁하는 일도 자연히 어려워지고 말았다.

    어미가 찾아온 것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은 사소한 죄 따위, 벌해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풍 어사가 겨우 저런 작은 일을 추궁하기 위해 상주문을 올렸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루안의 이 한 수로 풍 어사는 이미 승기를 잃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다른 신하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경(卿), 자네도 루안을 발고하려는가?”

    여 경이라 불린 여(余) 대인(大人)이 부정했다.

    “발고까진 아니옵고, 다만 루 통정의 말이 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달라서 나섰사옵니다.”

    “오호?”

    그러자 여 대인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루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루 통정, 북양태비께서 사사로이 도성에 들어온 이유가 그저 루 통정을 보기 위함이라 하였소?”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여 대인의 말이 이어졌다.

    “며칠 전, 병부(兵部)에 도착 보고를 한 북양의 사자(使者)는 그리 말하지 않던데 말이오.”

    루안이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았지만, 여 대인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자가 뭐라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루 통정?”

    루안은 덤덤했다.

    “분명 좋은 소린 아니었겠지요.”

    “루 통정도 사정을 뻔히 아는 것 같소!”

    여 대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낭랑하게 올라갔다.

    “사자는, 작금의 북양왕이 왕작을 이어받은 후로, 루 통정이 마음에 원한을 품어 왕부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온갖 말을 흘리고 그들을 꾄다고 했소! 그 바람에 북양태비께서 북양왕을 크게 오해하여 이리 언질 하나 없이 영지를 떠난 것이라 하였소!”

    여 대인의 말에 다시 기가 산 풍 어사가 입을 열었다.

    “루 통정, 증거가 이리 확실한데도 계속 궤변을 늘어놓을 텐가?”

    그러나 루안은 웃음을 지었다.

    “하관, 두 분 대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풍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괜한 무게 잡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시게! 어전(御前)에서 대질(對質)하고 있는데 누가 자네 입을 막기라도 했는가?”

    루안이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여 대인께서 말씀하시길, 북양에서 온 사자가 하관이 북양왕부에 남은 이들에게 온갖 말을 흘려 그들을 현혹한다고 고했다고 하셨는데, 그럼 여쭙겠습니다. 하관이 무슨 말을 흘렸고, 누구를 꾀었습니까?”

    풍 어사의 시선이 절로 여 대인을 향했다. 그러나 여 대인이 미처 목소리를 내기 전에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저와 북양의 연원(淵源)은 이곳에 계신 신료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관은 북양왕부에서 십여 년을 지낸 사람입니다. 하관이 왕부에 아는 이들이 있는 것이 특별한 일입니까?”

    당연히 아니다.

    북양왕부의 넷째 공자로서 살아온 그였으니 당연히 심복도 있었을 것이다.

    “저는 이미 예전에 북양왕과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러니 제가 북양태비와 연락하며 무슨 말을 하건, 북양왕께선 전부 이를 태비를 현혹하려는 말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자리에 있는 신료 가운데 집안 형제와 불화가 있는 이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나 역시 집안 어르신 앞에서 입만 벙긋해도, 형제란 것들이 내가 어르신을 속이려 든다 생각하니 말이야.’

    루안은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하여 여 대인의, 제가 온갖 말로 사람들을 꾀었다는 말씀은 아무래도 증거가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루안의 말에 여 대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화를 억누르지 못한 풍 어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지금 루 통정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단 거요?!”

    그 말에 루안이 변함없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풍 대인, 지금 할 말이 없다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

    저를 시장바닥의 막돼먹은 잡부 취급하는 루안의 말에 크게 분노한 풍 어사가 고함을 쳤다.

    “헛소리하지 마시게!”

    그리고 그는 곧장 황제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폐하, 미력한 신이 루안이 저지른 다섯 가지 큰 죄를 찾았사옵니다! 첫째는 제 형님에 대한 불의(不義)이옵니다. 장자(長子)로 태어난 북양왕은 어려서 이미 세자로 세워진 분이시옵니다. 그 때문에 작위를 계승할 계승자로 어떠한 이견도 없었으나, 동생으로 태어났음에도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이 왕작을 빼앗아 계승하려 한 루안으로 인해 형제가 서로 반목하게 되었으니, 이는 제 사리사욕을 위해 의(義)를 버린 것이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둘째로는 부모에게 불효하였사옵니다. 그해 그는 선대 북양왕의 시신이 미처 식기도 전, 그 영전(靈前)에서 제 형님에게 선전포고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을 떠난 부친의 명예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하물며 이제 남아계신 북양태비마저 충동질하였사옵니다. 이 때문에 과부가 된 그의 모친은 천릿길을 달려와 많은 이들로부터 의심을 사게 되었사옵니다.”

    숨을 고르던 풍 어사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셋째로는 군왕에게 불경하였사옵니다. 그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폐하께서는 그가 입신(立身)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셨사옵니다. 하오나 그는 황은에 보답할 생각은커녕, 도리어 이와 같은 의심스러운 사건을 벌였으니, 이는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넷째로는 재물을 탐하여 뇌물을 수수하였사옵니다. 루안이 형부의 낭중으로 재임하던 때, 사건이 그의 손을 거칠 때마다 반드시 재물을 거두어 남겼습니다! 그에 피해를 본 피해자만도 부지기수(不知其數)이옵니다.

    다섯째로는 이간질이옵니다. 폐하의 신뢰를 등에 업은 루안은 여러 차례 시비(是非)를 제대로 가리지 않고 거스르며 폐하와 어진 신하의 사이를 훼방하여 멀어지게 하였사옵니다.”

    다섯 가지 대죄를 길게 읊은 풍 어사가 황제를 향해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큰 죄를 엄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제대로 조사할 수 있도록 명을 내려주옵소서, 폐하!”

    풍 어사가 죄에 대해 하나씩 읊을 때마다 이를 듣던 신료들의 얼굴이 굳으며 경악으로 물들었다.

    루안이 도성에 든 후 탄핵 요청을 받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래도 그의 관운(官運)은 변함없이 형통하여 탄탄대로였던 것이다.

    ‘오늘도 다른 때처럼 시늉이나 하려는 줄 알았더니, 다섯 가지 대죄를 들고 나왔구먼. 그렇다면 이번엔 진짜 해보겠다는 것인가?’

    원 재상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리한 신료 중 몇을 살핀 그가 수상인 상용까지 살피고는 생각에 잠겼다.

    ‘풍 어사 배후가 누구려나? 북양왕?’

    짜증이 솟은 황제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루안, 할 말이 있느냐?”

    루안이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기력 넘치는 여인의 음성이 카랑카랑 울렸다.

    “폐하! 북양태비 곽여단, 알현을 청하옵니다!”

    * * *

    조금 전.

    전 밖을 지키고 선 소달은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귀에 담으며 내심 냉소를 삼키고 있었다.

    ‘겨우 그딴 일들을 가지고 난리들이라니. 놈이 거슬리는 인간들이 본인들뿐인 줄 아나?’

    역시 강왕세자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다.

    굳이 급히 손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저리 다른 놈들이 앞서 나서서 화살 받이가 되어준다는데. 차라리 기운을 아껴 날을 벼르고 있는 게 나았다.

    ‘그러다 약점을 잡으면 일격필살로 보내버리는 게야!’

    “비켜라! 겨우 너희들 따위가 감히 내 앞을 막아서겠다는 것이냐?”

    그때,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리자 고개를 돌린 소달은 깜짝 놀랐다.

    ‘누가 저 여자를 궁 안으로 들인 게야!?’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북양태비가 이미 성큼, 그의 앞까지 다가온 까닭이었다.

    소달 앞에선 그녀는 대단한 기세를 보이며 그에게 턱짓했다.

    “내 폐하를 뵐 것이니, 가서 보고를 올려라!”

    소달이 금군통령의 자리에 앉은 후로 그에게 이토록 거만하게 호통을 쳤던 이가 있었던가?

    ‘북양태비…… 품계가 아무리 높아도 병권(兵權)을 손에 쥔 중신(重臣)을 이리 대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포권한 소달이 입을 열었다.

    “태비마마, 지금 안에선 조의(*朝儀: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알현하는 의식)가 진행 중입니다. 폐하를 알현하시려거든, 잠시 물러나 기다려주십시오.”

    북양태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금군부통령 소달이로구나? 본 태비에게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머저리인 게야?”

    소달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북양태비와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던 소달이 북양태비의 행동에 바로 적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면전에 쌍욕? 이게 무슨 뜻이지?’

    북양태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의가 끝나면 내가 폐하를 뵙고 자시고 할 게 있겠느냐? 보고를 올리지 않을 작정이면, 한쪽으로 꺼져있거라!”

    어깨로 소달을 밀치며 나아간 북양태비는 전(殿) 앞으로 달려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북양태비, 곽여단, 알현을 청하옵니다!”

    * * *

    전(殿)에 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 황제가 입을 열었다.

    “들라.”

    윤허가 떨어지자 시위하듯 소달을 향해 눈을 부라린 북양태비가 당당히 고개를 들고 전(殿)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신부(*臣婦: 혼인한 여인이 신하로서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가 폐하를 뵙사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몸을 낮춰 예를 올리는 북양태비를 향한 황제의 표정이 온화했다.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에게 알현의 예를 마치자마자 북양태비는 본인에게 씌워진 죄에 대해 반론부터 제기했다.

    “폐하, 신부(臣婦)가 다른 마음을 품고 사사로이 도성에 들었다는 말이 돈다 들었사옵니다. 신부는 그러한 죄명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직접 해명하기 위해 알현을 청하였사오니, 폐하,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절로 눈이 가늘어진 원 재상이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조의(朝儀)가 열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북양태비가 벌써 그 소릴 들었단 말인가? 궁문에서 이곳까지 오는 시간만 해도 적잖게 걸리지 않던가?

    ‘보아하니 오늘 이리 발고할 것을 예상했군.’

    한편, 황제는 북양태비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크게 벌이거나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풍 어사가 굳이 붙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북양태비가 나서면 저희끼리 치고받다 알아서 결론을 낼 터였다.

    ‘더할 나위 없이 잘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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