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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16)화 (216/385)
  • 216화. 해명할 필요 없다

    배웅하러 갔던 지온이 다시 난택산방으로 돌아왔을 때, 대장공주는 머리를 풀어 내린 채 생각에 잠겨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대장공주가 돌아온 지온을 보고 물었다.

    “그 늙은이는 간 것이냐?”

    지온은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머리가 아프세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좀 피곤한 것뿐이야.”

    성주탕(醒酒湯)을 가지고 들어온 매고고가 말했다.

    “그만 일어나세요. 지금 주무시면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우선 성주탕부터 드시지요. 산책 다녀오신 후에 진지를 잡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때 다시 주무시지요.”

    그러마, 대답한 대장공주가 고분고분 성주탕을 받아 마시자 매고고가 지온에게 말했다.

    “아가씨, 공주마마와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럴게요.”

    대장공주를 부축해서 함께 일어난 지온은 시비를 불러 대장공주의 머리를 다듬게 했다. 그런 후 그녀는 대장공주와 화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술이 깨며 정신을 차린 대장공주가 산책 중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본궁이 곽여단에게 당한 것 같지 않으냐? 어쩌다 고것과 함께 복수를 맹세했을꼬?”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북양태비께서도 어머니께 당하신 것이지요. 어머니께선 조방궁을 지키고 계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앞으로 해야 할 일 대부분은 그쪽에서 다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복수는 똑같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가만히 생각하던 대장공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구먼.”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대장공주가 다시 지온에게 말했다.

    “너 이 녀석, 지금 저쪽 편을 드는 것이냐? 아직 시집을 간 것도 아닌데 벌써 그쪽을 편드는 게야?”

    그러자 지온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왜 그쪽 편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저쪽에서 저를 돕는 것이지요. 어차피 저도 복수를 하려 했으니까요.”

    “…….”

    대장공주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수다를 떨며 산책을 즐기는 두 사람을 향해 매고고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가?”

    대장공주의 물음에 매고고가 초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주마마, 태비마마께서 조방궁에서 떠나시다 신분이 노출되셨습니다.”

    * * *

    난택산방을 떠날 때 북양태비는 여전히 조금 취한 상태였다.

    때마침 향을 올린 후 돌아가려던 귀부인 하나가 어찌 된 일인지 북양태비와 부딪히고 말았다.

    본래 사소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든 부인 하나가 북양태비를 알아보는 바람에 그녀의 신분이 들통나고 말았다.

    상황이 좋지 않자 루안이 빠르게 북양태비를 데리고 돌아갔지만 일은 이미 일파만파 퍼진 뒤였다.

    * * *

    유신지가 대리시에 도착했을 때 대리시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들은 한 곳에 모여 호박씨며 콩, 밤 등 온갖 견과류 볶은 것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무조건 당하겄제?”

    “폐하께서 또 싸고도실지, 고것은 모르는 것이여.”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큰일을 폐하께서 그러실 수 있겠어? 재상들께서 그리하실 리가 없잖여?”

    “하기는 그도 그렇지…….”

    그들에게 다가간 유신지가 땅콩 하나를 주워들며 말했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인가?”

    “유 추승을 뵙습니다요.”

    모여 있던 이들 중 평사(評事) 몇이 그에게 손을 모아 공수하며 말했다.

    “북양태비가 도성에 들어온 이야기 중이었습죠.”

    “북양태비가 도성에 들었단 말인가?”

    유신지가 놀라서 묻자, 평사(評事)가 더 놀라 되물었다.

    “유 추승께선 모르셨습니까?”

    땅콩 몇 톨을 털어 넣고 씹던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북양에서 사자가 온 것이 이 일 때문이었나보군?’

    평소 신분으로 유세를 부리지 않던 유신지였던지라 평사(評事)들이 얼른 달라붙어 입을 털어댔다.

    “루 대인도 이번엔 피할 수 없으시겠죠? 유 추승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자네들이 말하는 루 대인은, 루안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죠!”

    가만히 생각하던 유신지가 대답했다.

    “알 수 없네.”

    평사(評事)들은 실망했다.

    “유 추승께서도 모르신다니요. 저희를 놀리시는 겁니까?”

    “내가 자네들을 왜 놀리겠나?”

    유신지가 손을 내저었다.

    “정말 알 수 없으니 알 수 없다 한 것이지. 생각해보세, 자네들은 북양태비가 왜 도성에 온 것 같은가?”

    평사들은 저희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걸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자 유신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뭘 모른 척하고 그러시나? 다들 북양에서 작위를 두고 또 무슨 농간이라도 부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지 않나!”

    평사 몇 명이 허허, 마른 웃음을 흘리자 유신지가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만약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자네들과 똑같이 생각한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지겠지.”

    평사 하나가 물었다.

    “그럼 간단한 이유도 있단 것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나?”

    유신지가 대답했다.

    “북양태비도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어머니인데, 그녀가 도성에 들어온 것이 무슨 큰일인가? 생각해보게, 자네들 집안 노모가 갑자기 도성에 올라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평사들의 시선이 어지럽게 오갔다. 그중 하나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뭔 일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들자식, 손주나 보러 오신 것뿐인데요. 자식들은 잘 지내는지, 손주 녀석들은 얼마나 컸는지, 가족들 안부를 확인하러 오신 것일 뿐입죠.”

    “그래, 그런 것이지.”

    유신지가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자네들 집안 노모만 그런 마음이 들고, 북양태비는 그런 마음이 없을 것 같은가?”

    평사들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리자 그것이 불만스러웠는지, 유신지가 불퉁하게 말했다.

    “그 표정, 무슨 뜻인가? 내 말이 틀렸나?”

    그러자 평사 중 하나가 말했다.

    “유 추승 말씀대로면 북양태비가 그저 아들을 보러 왔을 거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유신지가 말했다.

    “루안 나이가 나보다 좀 더 많네. 어머니께서 지난 몇 년간 혼사 문제로 날 얼마나 들들 볶았는지 아는가? 그 녀석 어머니라고 급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아니라면 거짓말일 것이네!”

    ‘그건 확실히 그렇지….’

    사정을 알고 난 평사들은 타오르던 흥미가 급격히 식었다.

    남의 집 불구경을 기대하고 신나게 달려왔더니, 노모의 눈물겨운 혼사 재촉 신파극이 펼쳐진 꼴이었다.

    ‘거, 기운이 쭉 빠지는구먼!’

    “가세, 가세! 일이나 하러 가세!”

    자리를 털고 가는 이들의 맨 마지막에서 유신지는 무표정하게 땅콩을 씹었다.

    일은 간단할 수도, 당연히 복잡하게 풀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렸다.

    ‘문제는 조정 대신들이 간단한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지.’

    * * *

    유신지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 시각 조정에선 이미 누군가 발고를 하고 있었다.

    “……조령(*詔令: 천자의 명령)도 없이 사사로이 도성에 들었다는 것이 첫 번째 죄이옵고, 도성에 든 후, 이를 은폐하여 보고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라 할 것이옵니다.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이니, 그 마음에 다른 속셈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루 대인,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소식이었지만 황제는 그동안 루안을 생각해 모른 척해주었다. 그러나 조정 신료 전부가 있는 자리에서 모두 드러난 지금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어쩔 수 없이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어사(御史)의 우호적이지 않은 눈빛을 받으며 루안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언급된 일이 있었사옵니다.”

    “풍 어사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 자네는 뭐라 해명하겠나?”

    잠시 말을 멈추었던 루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은 무어라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를 발고한 어사가 화살을 맞은 듯이 튀어나와 루안을 압박했다.

    “해명할 수 없다니…… 루 통정, 죄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오?”

    흘깃, 풍 어사에게 시선을 보내는 루안의 얼굴이 덤덤했다.

    “풍 어사, 생각이 넘치셨습니다. 저는 그저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루안의 어조와 대답은, 이 일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라는 듯 평이해 풍 어사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풍 어사가 화를 내며 질책했다.

    “루 통정, 폐하 앞에서 어찌 그리 오만방자할 수 있단 말이오! 이토록 커다란 일을 두고 감히 해명할 필요가 없다니, 자네, 폐하와 이 조정의 법도를 안중에 두긴 하는 것이오? 아니면 자네들, 정말 북양을 치외법권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치외법권 지역이라니!

    그 말은 북양은 황권(皇權)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며 루안을 질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루씨 가문 전체의 목이 떨어질 수도 있을 말이었다.

    그러나 루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하기만 했다.

    “평범한 한 마디였는데 하관조차 알지 못했던 의미까지 풀어내시는 것을 보니, 풍 어사께서는 역시 어사가 맞는가 봅니다.”

    루안이 덤덤할수록 풍 어사는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뭐야, 난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것이냐? 내가 하는 탄핵 정도는 우습다 이것이야?!’

    “자네…….”

    분노로 풍 어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가자, 상황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상(首相), 상용(常庸)이 나섰다.

    “루 통정, 해명하고 싶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은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작은 일이 아니네. 북양태비께선 자네의 친어머니가 아닌가? 아들 된 자로 어미가 영어(*囹圄: 죄수를 가두는 곳, 감옥)에 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수상인 상용의 체면은 차려줘야 했기에 루안은 그를 향해 미약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입을 열었다.

    “상 수상, 하관이 해명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정말 해명할 도리가 없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쭙고 싶습니다. 집안의 노모께서 먼 길을 달려 가족을 보러 오신 것에 대해 어떤 해명이 필요한 것입니까? 차라리 이곳에 계신 대신들께서 하관에게 알려주시지요. 이런 상황을 만나면 뭐라 해명해야 한단 말입니까?”

    루안의 말을 들은 신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물들었다.

    상황이야 다들 겪어본 적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북양태비가 어디 평범한 노모라야 말이지.’

    미간을 좁힌 상용이 물었다.

    “자네 말은 북양태비께서 도성에 오신 것이 친지를 보기 위해서란 말인가?”

    루안이 반문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단 말입니까?”

    풍 어사가 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루 통정, 교활하게 말 돌리지 마시게. 북양태비의 신분이 어디 평범한 신분이시던가? 친지를 방문하는 것이 목적일지라도 우선 그 사실을 보고했어야 했네. 더구나 자네와 북양왕인 자네의 형님이 서로 반목한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루 통정, 자네 이름이 루씨 가문 족보에서 이미 삭제되지 않았나! 이런 상황에 북양태비가 자네를 보기 위해 도성에 왔다? 자네는 다른 이들이 다들 머저리인 줄 아는가! 그리 몰래, 귀신처럼 도성에 숨어들다니, 본관이 의심하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자네들 무슨 흑심을 품은 것이야!”

    대놓고 의심하고 나선 풍 어사를 향해 루안은 화는커녕 도리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루안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풍 어사, 말씀 잘하셨습니다. 이미 하관이 제 가문에서 내쳐진 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여쭙지요. 북양태비께서 저를 보기 위해 도성에 드셨을 때, 상주문을 북양태비께서 어떻게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풍 어사가 멈칫했다.

    “이미 족보에는 제 이름이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북양태비께도 저라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런 북양태비께서 상주는 어떻게 올리며, 폐하께 어찌 허가를 받는단 말입니까?”

    “그것이…….”

    “풍 어사께서 문제를 지적하셨으나, 이는 풍 어사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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