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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15)화 (215/385)
  • 215화. 취중진담

    북양태비의 계획을 가만히 생각하던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북양왕이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았으니 소소한 중상모략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야. 그러나 그 기회를 노려 죽자고 달려드는 놈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달려들라고 해! 병(兵)이 공격하면 장수(將帥)로 막고, 물이 쏟아지면 흙을 몰아 둑을 만들어 막는다 했다! 무슨 수라도 쓰겠다는 소리야. 3년 전, 적국(敵國) 간자의 암살로 내 부군이 세상을 떠났지만, 뒤에서 손을 쓴 자가 누군지 우리가 진정 모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게야? 3년을 참았으면, 나도 참을 만큼 참은 게야! 더는 나도 못 참아!”

    말을 마친 북양태비가 대장공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네 부군도 다를 바가 없지 않으냐? 여양, 난 너도 복수하고 싶을 거라 생각한다.”

    침묵하던 대장공주가 이윽고 덤덤하게 입을 뗐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을 뿐인 게야.”

    그 말에 북양태비의 얼굴 위로 비웃음이 선연하게 비쳤다.

    “여양아, 여양아. 날 믿지 못하는 게냐, 아니면 네, 그 가상하던 용기마저 저들에게 모조리 먹혀버린 것이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옛날의 기세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이야! 그래. 넌 예서 자라처럼 목을 말고 참아가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난 못한다! 못 참아!”

    북양태비의 분노에 찬 음성이 이어졌다.

    “내 친정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 피까지 쏟아부어 모든 충정을 다했다. 나와 혼인한 남편의 집안은, 이 나라 북방을 수호하기 위해 문지기로 눌러앉은 가문이다. 북방의 문지기 가문에선 여인으로 태어나도 말에 올라 창을 휘둘러 적을 죽여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악의에 찬 계략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는 죽음이란 이별을 맞아야 하는 것이냐? 우린 이 나라, 대순 앞에 떳떳해! 요씨 황족들 앞에 떳떳하단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딴 대접은 받지 않을 것이야!”

    북양태비가 찻잔을 쾅 내려놓자, 찻잔에 쩍 금이 갔다.

    형형하게 빛나는 북양태비의 눈빛을 마주한 대장공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요씨 가문이 자네에게 잘못했네.”

    그 말을 들은 북양태비의 입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

    “그딴 소리 집어치워라. ‘잘못한 우리 요씨’가 누군지 나도 대충 알고 있다.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왜 네가 사과하고 그러느냐?”

    대장공주는 할 말이 없어 입이 틀어 막혔다.

    “이 원한이 정녕 나 혼자만의 것이냐? 네 부마의 원한, 네 오라버니의 원한, 네 조카의 원한! 그들의 원한도 갚지 않을 셈이냐? 여양아 말해 보거라.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진짜 복수 따윈 모두 잊은 것이냐? 딱 한 마디, 모두 잊었다고, 네가 복수 따윈 모두 잊었다고 내게 말한다면, 나 곽여단은 이대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다시는 네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마!”

    “넌 정말…….”

    북양태비의 강요 아닌 강요에 대장공주는 왈칵 짜증이 솟았다.

    “정말 성격도 더럽구나! 수십 년을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내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뭐? 복수가 뭐 어쩌고 어째?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말 한마디에 어디 천하가 뒤집히기라도 하는 것이야! 복수가 어디 말이나 쉽지, 네가 도성에 사람 한 명, 말 한 필 데려오는 걸 못 봤다. 네 아들 녀석도 인질처럼 잡혀있는데, 복수를 어느 세월에 하겠다는 것이야?”

    “그래서 내가 찾아오지 않았느냐!”

    북양태비가 냉큼 대답했다.

    “두 녀석이 워낙 동작이 굼뜨니 내가 직접 도와줄 생각이다!”

    그 말에 화가 치솟은 대장공주가 북양태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진짜 목적이었구나, 여우 같은 것! 아들을 보러 오긴, 저 새빨간 거짓말쟁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이 사고를 치러 왔어!”

    북양태비가 히히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들 얼굴 보는 거랑 일 좀 치는 거랑 같이 못 할 일도 아니지 않으냐? 아니 그러냐? 여양, 네가 요즘 도성에서 힘든 상황인 걸 안다. 그래서 그 성격도 죽이고 살고 있지 않으냐? 하지만 언제까지 그리 죽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으냐? 강왕부의 버러지 같은 것들이 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유유자적하게 노니는데 그걸 어찌 참고 살려고? 아무튼, 나는 못 참으니, 할지 말지 딱 결정해서 말해 보아라, 여양!”

    * * *

    루안이 당도했을 때 대장공주와 북양태비는 이미 술에 취해있었다.

    루안은 이에 황당해했다.

    “이게 어인 일인지…….”

    루안을 바라보는 지온의 미소가 무기력했다.

    “보이는 그대로죠. 과음이요.”

    그리고는 궁인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녀가 조용히 명령했다.

    “해주탕을 내오게. 바깥사람들은 몰라야 할 것이네.”

    수행한답시고 조방궁에 왔는데 숨어서 술을 마시다니. 이 일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 되겠는가?

    루안이 골치가 아픈 듯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시는 줄 알았더니…….”

    “원수도 원수 나름이니까요. 두 분은 누가 봐도 말로만 밉다, 밉다 하시는 거예요.”

    지온이 한숨을 푹 쉬었다.

    평소 그렇게 진중할 수 없던 대장공주가 북양태비를 만나자 전혀 다른 사람인 듯 행동하질 않던가!

    매고고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태비께선 어려서부터 공주마마와 함께 궁에서 자라셨습니다. 두 분은 서로 말로는 죽일 듯 밉다고 하시지만, 실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계시지요. 어려서 맺은 우정은 평생 간다지 않습니까?”

    루안과 지온에게도 그 의미가 남다른 말이었다.

    두 사람도 따지고 보면 어렸을 때 우정을 맺은 사이가 아니던가?

    ‘태자께서 아직 살아 계셨다면 역시 같은 마음이셨겠지?’

    한편, 북양태비는 대장공주를 손가락질하며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까 선고 차림을 한 널 보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지 뭐냐? 그 옛날 여양공주가 얼마나 건방을 떨며 지냈더냐? 보이는 사람마다 그렇게 때리고 다닌 것을 내 다 기억하는데, 그런 네가 수련을 한답시고 도관에 앉아있는 꼴이라니! 하이고, 웃다가 배가 다 찢어질 일이다! 영종 폐하도 그렇고, 선제께서도 네, 그 성질머릴 어쩌질 못하셨는데, 애송이 하나가 널 아주 제대로 굴리는구나.”

    커다란 탁자에 제 몸을 의지한 대장공주의 눈이 가물거렸다.

    “네가 뭘 알아? 아바마마와 오라버니께서 날 그리 아끼셨던 건, 두 분께서 나를 마음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애송이가 두려워 이런 수치를 당하는 것 같으냐? 아니다. 날 그리 사랑해주던 이들이 더는 없기 때문인 게야…….”

    대장공주의 대답에 북양태비가 짓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힘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슬픔이었다.

    대장공주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날 사랑했던 그분들이 받아 주었으니, 내가 건방도 떨 수 있었던 게다. 두 분이 저 하늘을 내어주셨기에, 내가 두려울 것 없는 공주로 살 수 있었단 말이다. 너는 정녕 내가 저 어린 것이 두려워 예서 옹송그린다 생각하느냐? 나는 슬픈 것이야! 나를 사랑해주던 모든 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슬픈 것이란 말이야…….”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지 술잔을 집어 든 대장공주가 한 잔을 거의 비워냈다.

    대장공주의 눈물은 마중물처럼 북양태비의 슬픔도 길어 올렸다.

    “나를 사랑하던 분…….”

    북양태비의 눈에서도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늘 나더러 성격이 괴팍하다고 했지? 나도 똑같았다! 곽씨 가문이 전장에서 전멸하고 난 홀로 세상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때 난 홀로 버려진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북양으로 시집을 가고 드디어 내게도 가족이 생겼는데 결국 그마저도…….”

    대장공주가 그녀를 위로했다.

    “넌 남편 하나만 보내지 않았느냐? 나는 남편뿐만 아니라 오라버니에 조카까지 단번에 보냈다. 생각해봐, 일 대 삼이니 너보다 내가 비참하지 않으냐?”

    북양태비가 멍하니 대답했다.

    “……어, 그러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지온과 루안, 매고고는 웃지도 못하고 두 사람과 함께 슬픔을 느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루안이 북양태비와 대장공주를 향해 다가갔다.

    “어머니,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자 북양태비가 루안을 밀치며 소리쳤다.

    “누구요? 저리 가시오!”

    “…….”

    지온이 루안을 말리고 나섰다.

    “어머니와 태비마마께서 오랜만에 만나셨으니 원하시는 대로 편히 있게 해드려요. 취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에요.”

    “그리하시지요.”

    매고고 역시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신지 이미 한참 되셨지요. 하오나 마마께선 사실 많이 슬퍼하고 계십니다.”

    매고고의 말은 루안도 함께 슬프게 만들었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제 어미에게 제대로 울 수 있는 시간조차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북양의 미래와 두 형제를 위해 어미는 그 비통한 슬픔에서 저 자신을 꺼내야 했을 터였다.

    “여긴 제가 있을 테니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지요. 두 분은 제가 잘 모시고 있겠습니다.”

    애간장이 녹도록 서로에게 제 슬픔을 고백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온이 매고고의 말에 루안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우리가 여기 있어 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할 것 같으니, 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루안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회랑에 선 두 사람은 이미 세월에 낡아가는 난택산방을 눈에 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선 서로 많이 사랑하셨소. 그런 두 분을 보고 자란 나와 형님은 어려서부터 두 분이 가장 좋은 부부라 생각했었지.”

    루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린 두 분에게 이별이 그리 빨리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백발이 성성하도록 함께 할 줄 알았다.

    대대손손, 집안 가득한 후손들과 함께 살아갈 줄 알았는데…….

    두 분이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기도 전. 이제 막 손주를 안아 들었을 때 두 분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져 영영 이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온 역시 큰 슬픔을 느꼈다. 저가 존재하지 않았던 3년의 세월을 떠올린 지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요?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땠을 것 같아요?”

    루안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르겠소.”

    그의 대답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자신이 없는 미래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지온이 가만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루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 손을 붙든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고쳐 잡았다.

    * * *

    해가 질 무렵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난 북양태비는 술 깨는 성주탕(醒酒湯)을 한 사발 더 마시고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곧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 되자 더 지체할 수 없었던 루안이 북양태비를 모셔가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북양태비는 난택산방을 떠나면서도 연신 불만을 늘어놓았다.

    “뭐가 이리 급하다고 이러는 것이냐! 좀 더 있어도 되는 게지! 밥 한 끼 못했단 말이다!”

    루안은 난처해하며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앞으로 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다음에는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북양태비는 그제야 마음을 돌려 난택산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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