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미리 알았으면
난택산방에 도착한 지온 일행을 본 궁인이 뽀르르 나왔다.
“아가씨 오셨사옵니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님께선 뭘 하고 계시지?”
“마마께선 조과(*早課: 불교과 도교에서 아침에 경전을 읽거나 기도로 올리는 예배)를 올리고 계십니다. 아가씨께선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지온이 물었다.
“어머니께서 요즘 침수는 잘 드시는 것이냐? 또 꿈을 꾸지는 않으시고?”
“요즘은 그런대로 괜찮으십니다.”
지온과 궁인의 대화를 듣던 북양태비는 뭔가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지온 소저에게 양어머니가 있단 말이야? 그런데 저 시비로 보이는 여자는 어찌 마마라 부르는 것이냐?’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지온과 다른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도 따라가려던 그때, 쭈뼛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북양태비는 훌쩍 몸을 뒤로 물려 저를 잡기 위해 뻗어오는 손 한 쌍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 뒤엔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내 둘이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 외모는 그보다 더 평범했으나, 무공만큼은 약하지 않은 사내들이었다.
‘황궁의 암중호위들이야!’
북양태비는 내심 경악했다. 도대체 황궁의 이들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때, 그녀의 귀로 궁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 저분은 실력이 뛰어난 사람인 듯하군요. 출신이 어떻게 되는지요?”
지온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돌연 대장공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대단한 분이셔서 어디 출신인지 밝혔다가는 너희의 심장이 전부 떨어질지도 모르겠구나. 안 그러냐, 북양태비?”
들고 있던 함으로 저를 붙잡고 있던 암중호위를 거칠게 밀친 북양태비가 휙, 몸을 돌렸다.
“여양?!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대장공주가 차게 웃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이냐? 나보다는 네가 북양에 있어야 하는 게 맞겠지! 곽여단, 여전히 천방지축이로구나. 말도 없이 도성에 들다니, 무슨 꿍꿍이인 게야?”
“흥! 아들 보러 왔다, 왜! 네가 무슨 상관이냐? 발고하고 싶으면 하거라! 아하, 내 깜빡했구나! 이제 넌 공주부(公主府)도 없는 몸이셨지, 참?”
북양태비는 그제야 떠올랐다.
‘대장공주가 조방궁에 산다 했었지!’
그렇다면 조금 전 지온 소저가 말한 어머니는 대장공주일 터였다.
‘잠깐…… 뭬야?! 그럼 저 아이가 여양의 양녀란 말이야?!’
북양태비의 머릿속에 폭죽이 화려하게 터졌다.
그 말은 지금 저와 여양, 저것이 사돈이 된다는 게 아닌가!
‘내 이 자식을, 그냥! 골라도 하필이면 여양, 저것의 수양딸을 고를 게 뭐냔 말이야! 어쩐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하려 하더니만!’
“난 공주부(公主府)가 있든 없든 그대로 공주지. 그런데 넌? 사람들이 알면 북양태비는 계속할 수 있겠느냐?”
“호호호, 누가 아쉬워한다더냐?”
북양태비가 대장공주에게 눈을 홉떴다.
“그러니까 어서 가서 발고하라니까? 이래놓고 발고 안 하면 너야말로 멍멍이 새끼다!”
대장공주가 쯧쯧 혀를 찼다.
“멍멍이 새끼라니, 저속하긴…… 됐다! 아직도 네가 일곱 살 애인 줄 아는 것이냐? 아들을 보러 왔다더니, 여긴 왜 온 것이냐? 옷차림은 또 이게 뭐고?”
대장공주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깨달았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오호라, 이제 보니 우리 온이를 보러 왔구먼?”
“…….”
웃음으로 가늘어진 대장공주의 시선이 지온을 향했다.
“온아, 내가 일찍이 루씨 녀석이 별로라고 하였지? 이것 좀 보거라, 녀석이 집안에서 교육을 어찌 받았겠느냐? 당당한 북양의 태비란 사람이 너를 몰래 관찰하겠다고 이런 몰골을 하고 찾아오다니, 대체 이 무슨 꼴이냐?”
대장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온이 네가 마음에 안 들고 눈에 안 차 그러나 본데, 그럼 혼인을 안 하면 되는 게지! 우리가 아쉬울 것이 뭐가 있느냐?”
“…….”
지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온 역시 평범한 부인은 아닐 것이라 예상했었다. 북양태비가 루안이 저를 보냈다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증명할 만한 증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와 암행호위에게 잡으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북양태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루안이 제 집안에 관한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다 보니, 그녀도 루안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북양태비는 대장공주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네 수양딸인 줄 미리 알았다면, 나도…….”
말을 반쯤 하다말고 입을 꾹 다문 북양태비는 가만히 제 아들의 지랄 맞은 성격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좋아하던 소저 하나 없던 아이였다. 혹시라도 이번 혼사를 망쳤다, 앞으로 혼인을 안 하겠다 하면 큰일이 아닌가?
북양태비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대장공주는 내심 계산이 섰는지, 빙긋 웃음을 지었다.
“나도? 뭐 어쩌겠단 것이냐? 거절할 테면 하거라! 이리 주저하는 건 북양태비답지 않은 게지!”
이를 바득 갈긴 했지만, 북양태비는 참기로 했다.
‘아들의 혼사를 위해 머리 한번 숙이자!’
굽힐 땐 또 굽힐 줄도 아는 사람이, 곽여단, 저가 아니던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입에서 살갑기 그지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을 그리하는 것이냐? 여양,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우리가 오랫동안 떨어져있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런 사돈의 연으로 묶이게 되다니, 연도 이리 깊은 연이 없는 듯싶다! 네 딸인 줄 미리 알았으면, 나도 더 빨리 도성에 연락해서 당당하게 들었을 거란 말이지!”
“…….”
이번에는 대장공주의 입이 꾹 닫혔다.
성질을 돋우려 긁어댄 것인데 화를 내지 않다니?
‘곽여단, 약을 잘못 먹은 게야?’
* * *
면회실.
매고고가 공손히 차를 올렸다.
“태비마마, 드시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북양태비가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자네가 최고일세, 매. 지금까지 내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구먼.”
매고고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적 기억이 가장 오래가지 않습니까. 태비마마의 작은 것 하나까지 소인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감명을 받은 북양태비가 대장공주에게 말했다.
“거지발싸개 같은 너한테 우리 매처럼 좋은 시녀가 가다니, 대체 무슨 복인지 정말 모르겠다!”
대장공주가 황당한 듯 입을 열었다.
“태비라는 것이 입만 열면 거지발싸개라느니, 멍멍이 새끼라느니……. 그게 무슨 꼴이야?”
“너는 그런 소리 안 하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북양태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흥, 못된 속어를 썼다가 태자비…… 아, 태후께 한 달 내내 경서를 베껴 쓰는 벌을 받은 게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것이냐?”
대장공주 역시 콧방귀를 뀔 뿐, 북양태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차를 나누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어쩌려고 이리 도성에 들어온 게야? 어사(御史)들이 탄핵하겠다고 알현이라도 청하면 어쩌려고?”
북양태비는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청하고 싶으면 청하라지. 누가 보면 그놈들을 무서워하는 줄 알겠구먼.”
대장공주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애들처럼 유치한 소릴 하고 있구나. 나도 떠밀리다시피 예까지 와서 선고가 됐다. 그런데 네가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물며 넌 자식이 둘이나 되지 않아!”
그 말에 북양태비가 갑갑한 듯이 말했다.
“토끼 새끼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난 정말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제 찻잔을 내려놓은 대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 토끼 새끼 얼굴 보겠다고 천릿길을 마다않고 여기까지 달려왔느냐?”
대장공주의 말에 북양태비는 한층 더 갑갑해진 듯했다.
“혼인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내 눈으로 안 보면 안심이 안 될 것 같은걸 낸들 어쩌겠나?”
“자식을 가진 게 죄인 게지, 어쩌겠느냐.”
웬일로 북양태비를 위로하는 것 같던 대장공주가 역시나 다시 그녀를 긁었다.
“너희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줄은 내 이미 옛날에 알았다. 네 아들 둘, 처음부터 싸우지도 않았겠지. 아니 그러냐?”
“쉿!”
북양태비가 주변을 살피더니 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내 아이들을 건드려서 잘못되면, 내 너를 죽여 버릴 테다!”
대장공주는 그런 북양태비가 하찮다는 듯 여상히 입을 열었다.
“너처럼 도움 안 되는 어미라니……. 그 아이들을 잘못되게 만드는 게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탄핵 상소 받고 찾아오지나 말거라.”
“탄핵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게지,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북양태비가 느긋하게 찻잔을 들자 대장공주가 가만히 눈가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일부러 이런 것이야? 왜 이러느냐? 무슨 목적인 게야?”
북양태비의 어깨가 한껏 위로 솟았다. 아주 득의가 양양했다.
“맞춰보렴!”
“내가 진정 못 맞출 것 같으냐?”
화르르, 가슴에 불이 난 듯 화가 난 대장공주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온아!”
얌전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차를 끓이던 지온이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예를 올린 지온의 입이 달싹 열렸다.
“폐하께선 현재 루 대인을 무척이나 중히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루 대인을 도와 북양태비마마를 숨기려 하실 테지요. 그러나 만약 누군가 태비마마께서 도성에 오신 것을 발고한다면 이 일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태비마마께선 정정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실 수 있게 되시겠지요.”
지온을 바라보는 북양태비의 얼굴에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녀가 지온에게 시선을 둔 채 대장공주를 향해 말했다.
“이리 영특하고 착한 딸은 어디서 얻은 게야?”
대장공주가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맞는지 아닌지부터 말해 보거라.”
북양태비가 실실 웃었다.
“내 아들이 혼인하는데 내 저들 머리맡에 앉아 절 한 번 받지 못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대장공주는 전혀 재미없다는 듯이 말했다.
“겨우 그딴 것 때문에 이리 했단 말이냐? 다른 일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이야? 아무리 폐하께서 사정을 봐주신다 해도 규율이란 게 있는 이상, 분명 네 큰아들은 질책을 면치 못할 것이야.”
“그것도 상관없어.”
북양태비는 여전한 얼굴이었다.
“난 일이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란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온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미간을 좁혔다.
“태비마마, 혹 북양에 변고를 만드실 생각이신지요?”
북양태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엇을 알아낸 것이냐?”
지온이 대답했다.
“상세한 것까지는 소녀도 알지 못하오나, 태비께서 이리 움직이신다면 북양왕께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시겠지요. 3년 전, 루 대인께선 홀로 모든 악명을 뒤집어쓰셨습니다. 혹 태비마마께선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시어, 두 형제에게 돌아가며 짐을 지게 하시려는 계획이신지요?”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북양태비가 대장공주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어쩜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좋으냐? 이 아이는 나도 수양딸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그러자 대장공주가 꽥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네 밑으로 들어가 네 딸이 되면, 네 아들 장가가는 것도 끝이다!”
“아!”
루안을 떠올린 북양태비가 얼른 제가 뱉은 말을 물렸다.
“실수다, 실수야! 내 입이 방정인 게야! 고부 관계면 더 좋지! 좋고말고!”
혼인해서 가문으로 데려가면 제 집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여양, 지금 아무리 콧대를 세워봐야 넌 결국 네 딸을 남의 집안에 내놓을 수밖에 없지 않으냐?’
내심 승리의 한 수를 두었다는 생각에 북양태비의 어깨가 스리슬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