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13)화 (213/385)
  • 213화. 예비 며느리를 보러 간 북양태비

    강왕세자가 말을 이었다.

    “두 형제는 북왕양 작위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결국 장자가 작위를 차지했지. 그리고 장자는 루안을 집안에서 쫓아냈어. 그 과정에서 북양태비는 당연히 장자의 편이었을 것이야.”

    소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북양태비가 아직 북양왕비였던 시절이었다.

    전대 북양왕 루연이 사망하면서 그와 함께 군을 통솔했던 북양왕비가 북양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때문에 애초에 북양왕비의 허락 없이는 세자가 작위를 잇는다는 상주문 자체를 도성으로 보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3년 전엔 장자의 편에 섰던 북양왕비가 북양태비가 된 지금에서야 갑자기 다른 아들을 찾아 도성에 든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소달도 뭔가 가닥이 잡힐 것 같았다.

    “세자께선 북양에 뭔가 변고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왕이 급하게 도성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루안이 저보다 먼저 폐하께 고할까 봐 그랬겠지. 그렇다면 설마…….”

    소달은 점점 흥분했다.

    그는 사실 북양태비가 몰래 입성한 것을 빌미로 루안과 북양이 여전히 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몰고 가려했다. 그렇게 몰고 가, 루안이 검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꾸며 발고하려 했던 것이다.

    거기에 강왕세자의 예측대로라면 일을 더욱 키울 수 있단 말이 아닌가!

    ‘북양왕의 작위 계승을 두고 다시 한번 풍파가 불어 닥치면, 루씨 집안의 장자와 루안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게 될 게야……’

    “세자, 기회가 아닙니까!”

    소달이 목소리를 죽였다.

    “어쩌면 이대로 저놈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소릴! 본 세자가 그것을 모를 것 같으냐?”

    강왕세자가 소달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번엔 절대 지난번 같은 실수가 있어선 안 돼.”

    수치스런 기억이 떠오른 소달의 안면 근육이 파들거렸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분을 참으며 소달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 방을 몇 바퀴나 돌며 배회하던 강왕세자가 문득 물었다.

    “그럼 지금 북양태비는 루안의 집에 있는 것인가?”

    “열에 아홉은 그럴 것입니다. 수하를 시켜 곧 알아보겠습니다만, 아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음.”

    침묵하던 강왕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일이 있은 후에 내, 오래 고심하는 사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지.”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소달이 물었다.

    “폐하께서 명분을 쥐고 계신 이상, 공개적으로 붙으면 우린 당연히 질 수밖에 없단 것이야. 자네가 벌을 받았던 마구 경기와 장락지 사건 모두 생각해보게. 언제 도리(道理)에서 밀리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달이 씩씩거렸다.

    “놈들은 정말 간사합니다!”

    강왕세자가 덤덤히 말했다.

    “그러니 우리도 그 도리(道理)라는 것을 움켜쥐어야 한단 말이네. 어차피 폐하께서 보호하실 거, 루안을 발고하지 말게. 모자(母子)가 서로 얼굴 좀 보겠다는 게 뭐가 문제가 되겠나?”

    “허면 저희는…….”

    “우린 도리어 그를 도와야지.”

    새를 손에 움켜쥔 강왕세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높게 받들어 띄워줄 것이네. 모든 것을 그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 것이야. 그래야 아무런 경계 없이 저 죽을 때를 맞이하지 않겠나?”

    강왕세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새의 목이 또다시 우두둑 부러졌다.

    * * *

    다음 날.

    평범한 중년 부인의 복장을 한 북양태비는 야우를 데리고 몰래 조방궁으로 향했다.

    “이곳이 맞느냐? 그 지온 소저가 있다는 곳이?”

    “그분이 조방궁에 살고 계신 분이긴 하온데…….”

    잠시 머뭇거리던 야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태비마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북양태비가 야우를 흘긋 쳐다보았다.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해서는 안 될 말 같구나.”

    야우는 순간 사레가 들 뻔했다.

    북양에서 떠나 산지 반년 만에, 벌써 북양태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었단 말인가!

    태비 앞에서 간보는 소리를 하다니, 돌로 제 입을 막아 달라 간청한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 아니옵니다.”

    결국 얼굴에 철면피를 깐 야우가 입을 열었다.

    “실은 사공자께선 소인 앞에서 지온 소저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유씨 가문의 유 대공자와 가문을 알지 못하는 서생 한 분과 더 가깝게 지내셨지요. 제가 서로 껴안고 계신 것도 보았단 말입니다!”

    “허허, 그게 나였어도 너한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야.”

    “아니, 어째서입니까?”

    “그 연유를 물을 낯짝이 네게 있느냐?”

    북양태비가 놀랍다는 듯 야우를 향해 눈을 들었다.

    “네가 무슨 소릴 끼적여 보냈는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윽…….”

    “유씨 가문의 대공자와 우의를 넘어선 관계인 듯 보인다질 않나, 또 무슨 서생과는 서로 껴안고 있었다질 않나! 대체 그것들을 증명할 수 있긴 한 것이냐? 그 서생이란 사람은 대체 누구인 게야?”

    “으윽…….”

    북양태비가 야우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겼다.

    “그러니까 네놈이 혼인도 못하고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야!”

    “태비마마!”

    야우가 심장에 칼이라도 꽂힌 듯 울상을 지었다.

    그때, 마침 지온이 서아와 함께 사방전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양태비가 황급히 야우를 기둥 뒤로 잡아끌며 몸을 숨겼다.

    “저 아이냐?”

    슬쩍 고개를 빼 살핀 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태비가 한껏 자상한 표정으로 찬찬히 지온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 생긴 것이 아주 곱구나. 몸도 좋아. 우리 넷째가 보는 눈이 있을 줄, 내 진작 알아봤다. 자태며, 행동거지도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구먼! 역시 재상 집안 핏줄이야.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어도 다른 평범한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야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대부분 며느리를 보는 시어머니들은 뭐 하나 못 잡아먹어서 난리 아닌가? 태비께선 어째 뭐든 다 좋다고 하시지?’

    몰래 훔쳐보길 마친 북양태비가 말했다.

    “가서 대화를 좀 해봐야겠다.”

    곧이어 그녀는 제 옷에 걸려 넘어지는 척, 서아와 지온을 향해 덮치듯 넘어졌다.

    “어머나!”

    서아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지온은 금방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북양태비의 눈은 빨랐고 손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녀는 피하는 지온과 교묘히 부딪쳐 지온을 걸고 넘어졌다.

    “아가씨!”

    서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지온이 북양태비를 향해 물었다.

    “어르신, 괜찮으신지요?”

    북양태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제 얼굴을 감싸 쥐더니 갑자기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파 죽겠네! 다리가 접질린 것 같소!”

    그러자 지온이 다가와 몸을 수그려 앉으며 말했다.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순간 흠칫 놀란 북양태비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들자 지온이 입을 열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놓으시어요, 어르신. 조악하게나마 의술을 배워 금방 접질린 발목을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의술을 배우셨소?”

    “조악합니다.”

    “…….”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것인가? 이 어린 여아가 의술을 어찌 배웠을꼬?’

    순간 북양태비의 눈알이 또르르 돌아가는 듯하더니, 북양태비가 돌연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이고, 영감! 어찌 그리 비명에 가셨소!”

    북양태비가 훌쩍였다.

    “불쌍한 영감, 그리 비명에 가다니! 어찌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것이오…….”

    “어르신? 어르신!”

    서아가 그녀를 불렀지만 북양태비는 모른 척 무시했다. 난감한 얼굴로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이 부인이 상심이 너무 크신 모양인데 어쩌죠?”

    그 말에 지온이 지나가던 어린 선고를 손짓하여 불렀다.

    “가서 청옥을 데려오거라.”

    “네.”

    그리곤 다른 지시를 함께 내렸다.

    “청옥이 오거든 너희는 여기 계신 어르신을 부축해 사방전으로 모시도록 해. 어르신이 사방전에서 쉴 수 있게 해드리고, 쉬고 난 후에도 계속 상태가 좋지 않으시거든 의원을 부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지온은 곧 발걸음을 돌렸다.

    지온이 떠나려하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진 북양태비가 지온을 두 팔로 붙들고 늘어졌다.

    “어르신!”

    당황한 서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저희와 부딪치셨으니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르신 곁에 있겠습니다, 그럼 괜찮으시겠지요?”

    북양태비는 내심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너더러 있어 달랬느냐? 난 저 아이여야 한단 말이다! 저 아이는 왜 내 계획대로 움직이질 않는 게야? 하!’

    “그럴 수 없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북양태비는 억지를 부리기로 했다.

    “난 저 낭자여야 해!”

    “어르신…….”

    “나와 부딪힌 낭자라야 한단 말이야!”

    서아는 속이 탔다.

    “어르신, 왜 억지를 피우고 이러십니까? 어르신이 아가씨께 넘어져 부딪치신 것입니다. 그래도 저흰 어르신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르신이 저희에게 이러시면 어쩌자는 것인지요?”

    그러자 북양태비가 말했다.

    “부딪친 일과 이 일은 다른 일이지! 낭자는 어떻게 혼자 내빼려고 하시는 게요?”

    “아니…….”

    지온이 손을 들어 서아를 막았다.

    “어르신께선 어느 가문에서 오셨습니까?”

    지온의 한 마디에 북양태비의 마음에 불뚝한 경계심이 솟았다.

    ‘언제 걸린 것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연기를 이리 잘했는데!’

    그러나 지온의 음성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평범한 부인 손아귀에 굳은살 박일 일이 있겠는지요? 그 굳은살은 창을 잡으셔서 생기셨습니까? 아니면 검을 수련하다 생기신 것인지요?”

    그 말에 대경실색한 서아가 황급히 지온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그러나 지온은 그저 웃으며 서아를 다독였다.

    “달리 악의를 가지신 것은 아니니 괜찮아.”

    “…….”

    북양태비는 할 말이 없었다.

    “다른 마음을 품으셨다면 이런 식으로 넘어지듯 달려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 가슴을 활짝 여는 자세는, 무예를 익힌 분들이 방어하기 까다로워하는 자세가 아닙니까.”

    “…….”

    북양태비는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예리하기가 바늘 끝 같은 처자가 아닌가? 이제 뭐라 둘러대야 한단 말인가?

    북양태비가 억지웃음과 함께 지온을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았다.

    “지온 소저께서는 무척 총명하신 분이시군요. 저는 루씨 가문 사람입니다. 실례하였습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서아가 물었다.

    “루 대인 말씀이신가요?”

    북양태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빨리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요! 루 대인께서 보내신 분이셨던 거예요?”

    그렇다 대답한 북양태비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조금 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서아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깜짝 놀랐다고요……. 그런데 루 대인께서 무슨 일로 보내신 건가요?”

    북양태비가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일이 바쁘시어 부러 제게 지온 소저께서 잘 계신지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지온과 서아가 계속 캐물을 것을 우려하여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저는 어디에 가시는 길입니까? 소인이 짐을 들겠습니다.”

    북양태비가 서아가 들고 있던 함을 제가 들려는 듯 가져오려 하자 지온이 얼른 거절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북양태비는 지온의 대답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벌써 서아의 짐을 들어버렸다.

    당황한 서아가 지온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지온이 살랑살랑 손을 저었다.

    “됐어, 그만 가자.”

    다행히 어떻게든 넘어갔단 생각에 북양태비는 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기둥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보던 야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뭔 상황이냐? 태비께선 따라가셔서 어쩌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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