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12)화 (212/385)
  • 212화. 그놈의 다리를 부셔버리겠습니다!

    찻잎을 준비하고 다구(茶具)를 씻어내는 한등의 익숙한 모습에 북양태비가, 쯧쯧 혀를 찼다.

    “아직도 옆에 한등 하나밖에 없는 것이냐?”

    “그리고 야우가 있습니다.”

    루안의 대답에 북양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내 살펴보니 저택에 바느질, 주방일과 허드렛일을 봐주는 어멈들 외에 여인이라곤 시녀 하나 없더구나. 넌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이러니 네 형이 너더러 정상이 아니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정상이 아니라니요?”

    “네가 나이를 꽤나 먹었는데도…….”

    북양태비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아니다. 네 형이 헛소리를 했느니라. 네가 부인을 얻는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정상이 아닐 리가 없지, 아니 그러냐?”

    그리고는 무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듯, 그녀가 물었다.

    “그래, 네 미래의 부인이 될 그 아이는 당연히…… 여아(女兒)일 테지?”

    루안의 시선이 휙 돌아가 그녀에게 꽂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북양태비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여아(女兒)면 되었다. 여아(女兒)면 되었어.”

    ‘야우, 네놈은 나중에 보자꾸나. 감히 내 아들이 사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서신을 보내와? 네놈은 내 손에 뒤졌느니라.’

    도성에서 북양까지 오고가는 정보망을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런데 그걸 이런 얼토당토않은 정보를 보내는 데 사용하다니!

    * * *

    한 달을 요양한 소달은 절룩거리긴 했지만 드디어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군.”

    “장군.”

    무관들의 인사에 엄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인 소달이 황궁 성곽에 올라 순시(巡視)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향하건 그의 뒤통수로 별스런 시선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시선을 느낀 소달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떠올리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여강! 루안!’

    저 두 놈 때문에 제 체면이 모두 시궁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지난번 일을 겪으며 너무 무모하게 일을 벌여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문관 놈들은 권모술수를 밥 먹듯 행하는 것들이라, 반드시 확실한 약점을 잡은 후에 움직여야만 했다.

    그때 들려온 다급한 말발굽 소리에 소달이 고개를 들었다.

    ‘급보라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의 시야에 자줏빛의 거대한 말을 탄 기사가 날듯이 달려오는 것이 들어왔다. 말 위에 걸린 깃발 문양을 본 소달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북양군!’

    궁문 앞에 다다른 기사가 구르듯 말에서 내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북양왕 휘하, 교위! 봉명(奉命)하여 폐하께 알현을 청하옵니다!”

    담당 장성(將星)이 곧장 사자(使者)로 온 기사의 몸을 수색했다.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자마자 소달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소달이 제 앞에 놓인 일거리 문서를 여상히 펼치며 사자에게 물었다.

    “각 지역 군사정보에 관해서는 저마다 그에 맞는 보고 체계가 있다. 병부나 통정사, 혹은 정사당을 찾아가도 됐을 터. 폐하께서 뵙고 싶다고 함부로 뵐 수 있는 분인 줄 아는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기사가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입을 열었다.

    “소 장군, 이번에 소관이 보고하고자 하는 것은 군사정보가 아닙니다.”

    소달이 고개를 들었다.

    “군사정보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군사정보도 아니면서 감히 급보를 썼단 말인가!”

    소달이 차가운 얼굴로 펼쳤던 문서를 던지듯이 덮더니 외쳤다.

    “북양에선 일처리를 이렇게 본데없이 하는가보군!”

    “소 장군!”

    다급해진 기사는 이마에 또 다시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은 군사정보보다 더욱 급한 일입니다. 북양왕께서 제게 반드시 폐하께 직접 말씀을 올리라 명하셨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장군!”

    “허면 무슨 일인지 먼저 내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너를 이대로 들여보낸다면, 그것 역시 본 장군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기사가 소달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자 소달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기사에게로 향했다.

    기사가 애타는 얼굴로 말했다.

    “왕께서도 어쩔 수 없어 이리하신 것이니 넘어가 주십시오, 장군.”

    잠시 침묵하던 소달이 입을 열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감사합니다, 장군.”

    궁 안으로 들어간 소달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흥분이 차올랐다.

    ‘하늘이 돕는구나!’

    루안, 그놈을 상대할 약점을 찾은 것인 지도 몰랐다.

    * * *

    소달의 보고에 황제가 놀라 되물었다.

    “북양태비가 실종이라고?”

    “그렇사옵니다.”

    소달이 대답했다.

    “북양에서 온 사자가 그리 말했사옵니다. 허나, 신의 생각으론 실종이 아니오라 아마도 스스로 봉지를 떠나신 것 같사옵니다.”

    “음?”

    황제가 물었다.

    “말해보게.”

    소달은 이미 할 말을 준비해둔 터였다.

    “북양태비께선 후원에서 지내는 평범한 부인이 아니시옵니다. 곽씨 집안의 후인이신 태비께선 일가 전체가 전쟁 중 전사하여 영종황제(英宗皇帝)께서 궁으로 데려와 키우신 분이셨습니다. 먼 북양으로 시집을 가신 후엔 그곳에서 사내처럼 갑옷을 입고 전투에 출전하여 널리 위명을 떨치신 분입니다. 그리 대단한 분께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사라지셨을 리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태비가 부군과 함께 전장에 올라 적을 죽였다는 이야긴 짐도 들은 일이 있지.”

    황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데 말도 없이 봉지를 벗어나다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지?”

    소달이 빙긋 웃었다.

    “그것까지는, 신도 모르겠사옵니다.”

    황제는 침묵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겠지.’

    북양태비가 어디로 갔을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그녀의 부모와, 부모의 형제자매는 모두 사망했다. 애초에 돌아갈 친정이 없는 그녀가 북양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마음에 담을 만한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겠는가?

    “짐이 알았으니, 사자(使者)는 적절한 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황제의 말에 소달이 실망을 감추고 대답했다.

    황제는 북양에서 온 사자를 불러 구체적인 내용을 묻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황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루안을 더 신임하고 있는 듯했다.

    * * *

    소달이 다시 궁문으로 돌아와, 북양에서 온 사자에게 황제의 말을 전하자 기사는 애가 타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끝이옵니까?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진 않으셨습니까?”

    소달은 어이가 없었다.

    “폐하께서 얼마나 바쁜 분이신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있을 것 같나? 자네는 가서 도착했다는 보고나 하게. 아니면 자네까지 보고 없이 도성에 입성한 것이 될 테니까!”

    “소 장군…….”

    짜증이 난 소달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폐하께 반기라도 들 셈인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말에 기사는 마지못해 손을 모아 인사했다.

    “명을 따릅니다.”

    * * *

    날이 저물고 있었다.

    루안은 등 아래 앉아 북양태비가 직접 제 침상에 이부자리를 펴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시녀 하나 없이 나오셨습니까, 어머니.”

    북양태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데려와 뭐하겠느냐? 사람이 늘면 괜히 있는 곳만 들키지.”

    “그럼 북양에서 도성까지 이리 혼자 오신 것입니까?”

    “그래.”

    북양태비가 루안을 향해 자랑하듯 말했다.

    “이리 먼 거리를 길도 잃지 않고 찾아오다니, 어미가 대단하지 않으냐!”

    “허허.”

    루안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네, 참 대단도 하십니다.’

    안서(安西)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이백의 친위대를 이끌고 천이 넘는 적국의 왕자를 추살(追殺)했을 때에도 그녀가 이렇게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양심 없는 것아. 떠난 지가 그리 오래되도록 서신 한 통을 안 보내?”

    북양태비의 원망이 이어졌지만 루안은 태연스레 대답했다.

    “매달 소식을 전했으니 제가 무탈한 것은 어머니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셨겠지요. 따로 서신까지 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북양태비가 벌컥 화를 냈다.

    “그게 같으냐? 그건 공적인 게 아니냐!”

    그러다 차게 웃음을 짓는 그녀였다.

    “그런데 부인을 맞고 싶으니 바로 서신이 날아오더구나.”

    루안은 골치가 아파왔다.

    “그 일은 반드시 서신을 보내라,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네 녀석이 언제 그렇게 말을 잘 들었더냐? 그것만 봐도 네 녀석이 이 어미 생각일랑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게야!”

    루안은 도무지 답이 없다 생각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그제야 만족스레 웃음을 지은 북양태비가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처음부터 이리 나왔으면 좀 좋으냐?”

    이부자리 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앉은 북양태비가 물었다.

    “그래, 혼인하고 싶은 아이는 어느 집안 아이인 것이냐? 내가 아는 집이 아니냐?”

    “평범한 관료 집안의 여식입니다.”

    루안이 얼버무렸다.

    “집안은 좀 평범해도 인품만 좋으면 된다. 참, 그 아이 아비는 뭐하는 이냐? 혹시라도 우리 일을 어그러뜨리지는 않겠지?”

    “아닐 것입니다. 부친께선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집안에 숙부 두 분만 계십니다. 숙부 두 분도 칠품과 팔품의 작은 관직에 계신데, 다들 상관없는 관아에서 일하고 계시고요.”

    “음.”

    북양태비가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도성을 오래 떠나있었더니 아는 이들이 없긴 하구먼. 그래, 그 아이 가문이 어디냐? 어미가 여기저기 알아봐주마.”

    “알아보실 필요 없습니다.”

    루안이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제가 다 알아봤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북양태비가 아연한 얼굴로 루안을 쳐다보았다.

    “너는 사내가 아니냐? 네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루안은 좋은 말로 설득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선 지금 몰래 입성한 상태가 아닙니까?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 신분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

    “조용히 몰래몰래 알아보면 되는 것이지, 이 어미를 천치로 아는 것이야?”

    대꾸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하던 루안이 말했다.

    “어머니가 걱정되어 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

    북양태비가 제 손을 허리로 가져가더니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녀가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아직 밑 트인 개구멍바지를 입고 있을 때, 어미는 안서를 휩쓸고 있었다. 잔소리 말고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

    그때 문득 북양태비의 마음 속에 의심이 돋아났다.

    “계속 말을 못하는 걸 보니,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면 야우가 보낸 소식이 사실인 것이야? 이게 전부 어미를 안심시키려는 수작이고, 애초에 그런 여아는 없는 것이 아니냐?”

    “야우, 그놈이 무슨 소릴 한 것입니까? 놈의 다리를 부숴버리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루안의 머리통이 먼저 부서질 판이었다. 북양태비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말하지 않으면 네 녀석의 다리부터 부숴주마!”

    * * *

    그날 밤, 소달은 강왕부로 향했다.

    “자네 말은 북양태비가 몰래 도성에 들어왔단 말인가?”

    다시 새로 들인 새와 놀아주던 강왕세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

    소달의 보고가 이어졌다.

    “이미 북양왕이 이 일로 도성에 사자를 보내 알려온 사실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사자를 알현하진 않으셨습니다.”

    손을 닦은 강왕세자가 찻잔을 들었다.

    “당연히 겨우 그 정도 일로 폐하께서 보실 리가 없지.”

    의아한 얼굴로 소달이 물었다.

    “하오나 북양태비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여자가 도성으로 숨어들었는데, 폐하께선 의심이 들지도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다른 변경 지역에 주둔하는 이의 가솔이 이리 몰래 도성으로 숨어들었다면 벌써 의심을 사고도 남지 않았겠는가?

    “의심할 게 뭐가 있나?”

    강왕세자가 말했다.

    “아무리 평범한 여인과 다르다 해도, 가족일 뿐이야. 도성에서 제 아들을 보는 것 말고 달리 할 게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아무 보고도 없이 도성에 들어온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강왕세자는 그게 뭐가 그리 큰일이냐는 듯 여상했다.

    “루안, 그 녀석은 폐하의 심복이다. 심복의 그 정도 사소한 일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주시겠지.”

    그러던 그가 말하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그래, 그것을 북양왕도 알고 있었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왜 이리 급하게 사자까지 보냈단 말인가?”

    강왕세자의 혼잣말에 소달이 다소 멍하니 대답했다.

    “두 형제가 서로 반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북양태비가 루안을 찾으러 간 것이 북양왕 입장에선 싫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강왕세자가 짝 하고 손뼉을 치더니 눈을 번득였다.

    “그래, 그것이다. 그거야!”

    “예, 예?”

    소달은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그것이고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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