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11)화 (211/385)
  • 211화. 루안의 어머니, 북양태비

    “곽 소저만 탓할 것도 아니옵니다.”

    매고고의 말이었다.

    “곽 소저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고 궁에서 자라지 않았사옵니까. 모든 이들에게 어여쁨을 받는 마마를 보며, 곽 소저는 홀로 기댈 곳 하나 없다 느꼈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곽 소저의 성정이 그리 강해 다행이었지요. 아니었으면 주변인의 괴롭힘에 잘 지내기나 하였겠사옵니까?”

    “본궁은 그 아이를 괴롭히지 않았어!”

    “네, 그러셨지요.”

    매고고가 대장공주의 말에 선선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마마께선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신 분이 아니시옵니까? 처음엔 곽 소저를 챙겨주기도 하셨는데, 곽 소저가 괘씸하게도 그 마음을 몰라 준 것이지요.”

    “옳다마다!”

    씩씩거리며 분을 내던 대장공주가 금방 회한의 한숨을 쉬었다.

    “아닐세, 아니야. 그 이와 난 동병상련인 게지. 어려선 그 아이도 나도 양친을 모두 잃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둘 다 짝을 잃었지. 인제 사돈까지 된다 생각하니…… 아이고, 새삼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구먼!”

    매고고가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마마, 마마께서 전대 북양왕께 접근하실까 봐 곽 소저가 얼마나 경계하고 막았사옵니까? 그런데 곽 소저가 그리 아끼던 아들이 결국 우리 아가씨께 넘어왔다고 생각해보시지요.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시옵니까, 전하?”

    그 말에 대장공주의 얼굴 위로 슬금슬금 미소가 어렸다. 대장공주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먼! 매, 자네 말이 아주 옳아!”

    대장공주가 히죽 웃더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연말이면 혼사를 논할 수 있을 테니 내가 평왕숙(平王叔)을 찾아뵙고 말을 해두면 되겠구먼. 일은 미리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겠나? 내년에 있을 길일로 골라잡으면 되겠지. 매, 본궁이 길일을 잡아야겠으니, 가서 역서(*曆書: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를 가져오게.”

    대장공주를 보던 매고고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흠천감(*欽天監: 중국 명나라, 청나라 때에 천문, 역수, 점후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에 맡겨 알아보지 않으시고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매고고는 대장공주의 손에 역서를 찾아 들려주었다.

    매고고는 새삼 진지하게 역서를 보는 대장공주를 바라보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 * *

    제 저택으로 돌아온 루안은 집안이 너무 조용하단 것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온갖 기합소리를 내며 훈련을 하고 있을 시위들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후원으로 향한 그는, 들어서자마자 와락 인상을 구겼다.

    “어디서 온 꽃이냐? 누가 가져다 놓으라 했지?”

    깔끔하던 후원이 온통 꽃밭이었다.

    가을 국화에 연꽃, 거기다 군자란까지……. 온갖 화초들이 후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본 한등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야우 형님, 대체 집안 단속을 어떻게 하고 있던 겁니까! 공자께서 꽃을 싫어하시는 걸 몰라서 지금 이 꼴을 해놓으신 겁니까? 당장, 이리 나와 죄를 빌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야우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사공자님, 이것들은 제가 옮긴 것이 아니…! 아니, 제가 옮긴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의 뜻은 아니옵고…….”

    “그럼 누구 뜻입니까? 예? 누구 뜻이냐고요!”

    기고만장한 한등이 펄펄 소리쳤다.

    “감히 공자의 뜻을 어기다니, 죽고 싶은 겁니까?”

    ‘공자님, 화나셨죠? 빨리 야우를 내쫓아버립시다!’

    한등이 속셈을 가지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돌연 위엄 넘치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죽고 싶다 했느냐?”

    자리한 이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 곳에 기마복을 입은 여인이 성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한, 적잖이 나이든 여인이었다.

    그러나 서슬이 퍼런 눈빛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런 위엄과 풍겨오는 당당한 기세는, 그녀가 평범한 중년 부인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등이 말을 잊고 입만 쩍 벌린 사이, 놀란 루안이 비명처럼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루안의 목소리에 여인의 얼굴 위로 봄날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풍기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저 따사로움뿐이었다.

    “안아, 날이 다 저물도록 어찌 이리 늦게 다니는 것이냐? 혼자 도성에서 지내느라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지? 집안은 어찌 사람 온기 하나 없이 해놓고 있었던 게야? 응? 그래서 어미가 화초들을 가져다 놓으라 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모두 향이 강하지 않으니, 네 그 예민한 코도 괴롭지 않을 것이야…….”

    전대 북양왕 루연의 부인이자, 루안의 어머니인 북양태비(北襄太妃)가 루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등을 향했을 땐, 조금 전 차갑던 기세가 다시 돌아왔다.

    “공자님을 잘 챙기라 명했더니, 이게 잘하고 있는 것이야? 감히 주인 앞에서 목소리 높일 줄도 알고, 네 간이 참으로 비대해졌구나!”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 한 번에 한등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왕비…….”

    북양태비가 손을 저었다.

    “지금 왕비는 내가 아니다.”

    마른 얼굴을 쓸어낸 한등이 호칭부터 바로잡곤 눈물로 호소했다.

    “태비마마,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입을 가벼이 놀렸사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오니…….”

    “그럼 죽어야지!”

    북양태비는 한등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대로 한등의 뺨을 철썩, 갈긴 그녀가 소리쳤다.

    “길 막지 말고,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거라!”

    주룩주룩 눈물을 쏟으며 한등이 불쌍한 얼굴로 루안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공자님! 소인이 공자님을 위해 소처럼 일한 걸 생각해서라도, 저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한등의 기대는 깨지고 말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보던 루안이 무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못 들었느냐? 어머니께서 길 막지 말고 한쪽으로 가있으라지 않으시냐?”

    한등의 방성대곡이 이어졌다.

    “공자님!”

    엉엉 통곡하는 한등을 야우가 옆으로 끌어냈다. 몇 달간 한등에게 치여 기가 눌렸던 야우의 기세가 반대로 등등해졌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 내가 도와줘?”

    ‘감히 날 내쫓으려 해? 떠나는 건 네 놈이다!’

    * * *

    루안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북양태비는 루안의 얼굴을 붙들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자세히도 살펴댔다. 그리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피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키가 더 큰 것 같구나. 그런데 왜 이리 마른 것이야? 볼에 어찌 이리 살이 하나 없어? 식사는 잘 챙기는 것이냐?”

    제 어미가 원하는 만큼 보고 또 보게 놔둔 루안이 대답했다.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얼굴에 살이 붙을 정도로 먹으면, 제가 검을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루안이 본론을 꺼내듯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어머니, 도성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혼자 오셨습니까? 형님은요? 다른 이들은 모르는 것입니까?”

    “어휴! 녀석아 잔소리 좀 그만하거라!”

    북양태비가 루안의 말을 끊었다.

    “넌 내 아들이지, 아비가 아니지 않으냐? 그 무슨 말투야!”

    그러나 루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 돌리지 마시고, 어떻게 오신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십시오. 형님께서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으윽…….”

    루안은 어찌된 상황인지 금방 깨달았다.

    “몰래 오셨군요.”

    “몰래 오다니, 무슨 말을 그리 하느냐?”

    북양태비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죄 지은 죄인도 아니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갈 수도 있는 것이지.”

    “하하.”

    루안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금방 기가 죽은 북양태비의 목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은 것은 어찌해! 벌써 3년이나 지나지 않았느냐. 네가 떠나고 얼굴 한 번을 못 봤는데, 도성은 또 얼마나 위험한지……. 네가 살이 올랐는지, 빠졌는지도 모르겠고, 다치지는 않았는지, 어려운 일은 없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그녀는 어쩐지 속이 상했다. 속이 상하니 제 감정에 취하게 된 북양태비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섞였다.

    “너희 형제 두 녀석들은 이 어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일단 벌이고보는 게지. 열 몇 살에 공부한다고 집을 떠난 너는 그렇지 않아도 어미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 또 네 걱정으로 밤잠을 설쳐야 하니, 흑흑흑…….”

    아무리 찔러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차갑다는 루안이라지만, 어미의 이런 모습 앞에선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루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저희가 어머니를 생각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편이 저희를 그리 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저나 형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떠나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둘 중 하나는 죽었겠지요. 어머니께서 저나 형님의 목숨 중 누구 하나라도 포기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누구도 죽지 않으려면 떠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야 무슨 일이든 전부 이유가 있겠지. 그러니 난 남편을 잃고, 또 다시 아들마저 잃은 걸 테고, 흑흑흑…….”

    북양태비는 그저 제 얼굴을 감싸 쥘 뿐이었다.

    “어머니!”

    “상관하지 말거라!”

    북양태비가 휙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제 아들을 말로도 이기지도 못하는 어미가 울지도 못하느냐?”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럼 우십시오!”

    그리고는 서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마치 읽기라도 할 듯 서책을 집어 들었다.

    “울음이 그치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그 후에 다시 못 다한 이야기를 하시지요. 마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

    북양태비가 얼굴을 가린 소매를 거칠게 내리며 노호성을 질렀다.

    “이 못된 것! 양심 없는 것! 이 먼 길을 달려 어미가 보러왔는데, 제 할 말만 중한 것 좀 보거라! 그래, 몰래 나왔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사사로이 도성에 왔느니라! 그래서 어쩔 것이냐고! 어미가 되어 제 아들 좀 보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이냐? 그리고 네 녀석도 부인을 맞겠다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내가 와볼 수도 없단 말이야!?”

    어느새 루안의 앞까지 다가온 북양태비가 그의 손에 있던 서책을 채가며 고함을 이어갔다.

    “서책은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서책이 뭐가 그리 좋다고! 어미를 몇 년이나 못 봤는데 보고 싶단 말 한마디 안 하는 걸 보니, 부인을 얻는다고 벌써 이 어미는 까맣게 잊은 게 틀림없는 게지!”

    “어머니!”

    “부르지 마시지요, 이 어미는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

    잔뜩 화가 난 북양태비가 씩씩거리며 당장이라도 떠날 듯 말했다.

    “네가 내쫓지 않아도 내 발로 떠날 것이야! 이 어미가 너희들의 대사(大事)에 지장을 주면 어쩌려고!”

    북양태비가 화를 내니 도저히 그녀의 화를 달랠 방법이 없었던 루안이 그녀를 도로 붙들어 앉히며 말했다.

    “연기 그만하세요. 제가 아무 말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

    북양태비가 히죽 웃었다.

    “약속하는 것이냐?”

    루안이 도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말은 해주셔야겠습니다. 아니면 저도 모르는 새에 성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북양태비가 몰래 도성에 왔다는 것이 황궁에 알려지면 큰일이 날 게 아닌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북양태비가 자리에 앉았다.

    “차 한 잔 다오.”

    “한등!”

    죽은 사람처럼 있던 한등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등은 몹시도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어머니께 차를 올려라.”

    한등의 태도가 더욱 공손해졌다.

    “태비마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인이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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