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10)화 (210/385)
  • 210화. 양고기 탕

    할 일 없이 멍하게 앉아 빈둥거리던 유씨 가문의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곧 점심시간이로군. 내가 심기집에 양고기 탕을 주문해놓겠네. 두 사람, 바둑 다 두면 오게. 잊지 말고, 찾아오게!”

    “음…….”

    하는 둥 마는 둥하긴 했지만 루안이 대답했다. 그리고 지온은 눈까지 마주치며 감사를 전했다.

    “대공자께서 사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유신지가 입을 삐죽였다.

    “잊지나 말고 오시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신지는 연신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다.

    유신지의 시종인 부주가 의아해 물었다.

    “공자님, 주문이라면 제가 가서 해두면 되는데 왜 공자님이 직접 간다고 하셨어요?”

    유신지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네 눈엔 그게 안 보이더냐? 공자인 내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어봐야, 눈치 없는 날파리 신세지.”

    부주는 제 주인이 불쌍했다.

    “좋게 생각하세요, 공자님. 세상에는 훌륭한 낭군들이 많습니다…….”

    “뭐?”

    부주가 얼른 말을 바꿨다.

    “소인이 잘못 말했네요, 훌륭한 낭자들이죠…….”

    한편, 유신지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지온이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 소씨 가문도 그렇고, 강왕부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건가요?”

    “소달은 깨달은바가 있을 테니 아마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그리고 강왕부는…….”

    잠시 말을 멈추었던 루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겠지.”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작게 속삭였다.

    “요즘 궁은 어떤가요?”

    고개를 들어 지온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지온의 손이 들어왔다.

    꽃잎을 쥔 그녀의 손끝이, 선연한 붉은 꽃 위에서 유난히 창백했다.

    다른 생각에 빠진 채 루안이 입을 열었다.

    “류 첩여가 크게 총애를 받고 있소. 이번 한 달, 폐하께서는 황후와 신비께 가는 날을 제외하고 전부 벽옥헌에 머무셨소.”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계속 바둑을 두자 루안의 시선도 자연스레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바둑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루안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겼다.

    “옥비가 진정 총애를 잃은 것 같소?”

    “확실하지 않아요.”

    지온의 대답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그는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것에 불과해요.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해 도망치기로 한 거예요. 그러니 옥비도, 자신도 마주할 수 없는 걸 테고요.”

    “그럼…….”

    “옥비가 완전히 바보가 된 게 아니라면……. 어떡하면 그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을지 알 거예요.”

    잠시 미간을 좁혔던 지온의 입이 닫혔다가 열렸다.

    “사실, 원래 금벽이는 그리 바보 같은 아이가 아니었어요. 아마 옥비라는 껍데기에 눌려 본래 모습마저 잊고 있었겠죠. 만약 금벽이가 제 원래 모습을 기억해내는 그 날이 오면…… 진짜 재미있는 구경은 그때 할 수 있을 거예요.”

    옥종화가 되고 싶었으나, 그녀는 옥종화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면 옥비는 옥종화다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제 부족한 자질만 더 느끼게 되었을 테니, 결국 손발은 더욱 어지러이 꼬여만 갔겠지.

    ‘그렇게 본래보다 못한 더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고 말았을 거야…….’

    루안을 바라보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지온은, 루안의 비밀스런 욕망을 눈치챘다. 지온이 빙긋 웃으며 먼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비림(碑林) 구경 갈까요?”

    “좋소.”

    그녀의 손을 고쳐 잡으며 루안이 만족스레 대답했다.

    “내 술과 먹을 것들을 챙겨 왔소. 비림(碑林)의 훌륭한 글과 함께 즐기면 되겠군.”

    * * *

    반 시진 후.

    양고기 탕 앞에는 유신지가 홀로 외로이 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온다던 이들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분에 찬 그의 손에 젓가락이 우두둑 부서졌다.

    “루안, 이놈을 내가 믿는 게 아니었는데!”

    유신지는 눈물을 닦아가며 양고기 탕을 먹고 있었다.

    양고기 탕은 심기집이 도성 제일이었다.

    고기는 신선했고, 비린내도 나지 않아 맛이 좋았다. 칼칼한 맛은 중독성마저 느낄 정도였다.

    “공자님, 너무 슬퍼마세요.”

    식초 접시를 내려놓으며 부주가 위로하자 유신지가 홱 고개를 돌려 부주를 노려보더니 꿱 소리를 질렀다.

    “본 공자가 슬프긴, 왜 슬퍼하느냐! 매워서 그런 것이다, 매워서!”

    부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공자님! 멋대로 지껄인 요놈의 주둥이는 맞아도 쌉니다!”

    부주가 제 입을 찰싹 때렸다.

    ‘왜 공자님 상처를 헤집어, 헤집길!’

    유신지가 다시 부지런히 양고기를 입으로 꾸역꾸역 넣었다.

    ‘이렇게 맛있는 탕은 뱃가죽이 터지도록 먹어야 제맛이지!’

    시월의 어느 날, 비 오듯이 땀을 쏟으며 배 터지게 포식한 유신지는 꺼억, 마지막 트림을 끝으로 야무지게 제대로 식사를 끝냈다.

    완벽한 식사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이 먹을 것을 혼자 다 먹었으니 배가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점주에게 소화에 좋은 차 한 그릇을 받아 온 부주가 천천히 마시라며 유신지에게 건넸다.

    소화를 시키느라 한참이 지난 후에야 편안해진 유신지는 그제야 계산을 마치고 터덜터덜, 심기집을 나섰다.

    부주가 물었다.

    “공자님, 마차를 대령할까요?”

    유신지가 손을 내저었다.

    “걷자.”

    부주는 군소리 없이 제 주인의 뒤를 따랐다.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을 하던 유신지의 눈에, 수반(手盤)에 꽂아 팔고 있는 수선화가 눈에 띄었다.

    유신지가 꽃 파는 이를 찾아가 물었다.

    “수선화는 춘절 때나 되어야 피는 꽃이 아닌가? 이제 겨울 초입에 들었는데, 어떻게 수선화가 피었는가?”

    화농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의 집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키운 것입니다요. 그래서 꽃이 일찍 핍지요.”

    “오, 그런가.”

    유신지의 차림새가 훌륭한 것을 눈여겨본 화농이 입을 열었다.

    “수선화 수반 하나 들여가시지요? 공무보시는 서탁에 두기에 수선화만한 것이 없습지요. 글 쓰시고, 난 치실 때 한 번씩 보시면, 눈도 마음도 즐거우실 것입니다요.”

    대답 없는 유신지에게 화농이 말을 이었다.

    “여길 보시지요, 공자님. 물 위에도 꽃이 피었고, 수면 위에도 꽃이 피지 않았습니까? 수면에 꽃이 비쳐 두 배는 더 아름답습니다요!”

    가만히 수선화를 보던 유신지가 물에 비친 제 얼굴을 슬쩍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부주, 계산하거라.”

    화농의 입이 쭉 찢어졌다.

    “예이! 챙겨 가십시오, 공자님!”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수선화 수반이 쑥하고 제 품에 들어오자 유신지의 한숨이 더욱 무겁게 내려왔다.

    그는 자신이 수선화처럼 느껴졌다.

    이토록 아름답게 피었으나, 오직 저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수선화는 홀로 고결해 고독한 만족감만을 느끼게하지 않던가.

    고독한 수선화를 품에 안은 외로운 유신지가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빠른 말발굽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려왔다.

    “비켜라! 비켜!”

    “조심하세요, 공자님!”

    드리워진 깊은 고독감에 미처 마차를 피하지 못한 유신지를 부주가 소리를 지르며 밀쳤다.

    촤악!

    부주와 유신지가 바닥에 넘어지고야 말았다. 그 바람에 유신지의 품에 있던 수반이 쏟아지며 유신지의 몸을 쫄딱 적셨다.

    그새 일어난 부주가 황급히 유신지를 부축해 일으키며 연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공자님. 제가 너무 힘이 과해서, 죄송합니다, 공자님!”

    대번에 얼굴색이 변한 유신지가 벌컥 화를 냈다.

    “죽고 싶은 건가!”

    부주가 깜짝 놀랐다.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너에게 말하는 게 아니다!”

    역정 가득한 얼굴로 부주를 밀어낸 유신지의 시선이 조금 전 말을 타고 지나간 이가 향한 길을 따라갔다.

    “저곳은…….”

    * * *

    기사(騎士) 하나가 궁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간의 고생을 여실히 드러내듯 기사의 갑의는 흙먼지가 가득 끼어있었다.

    기사의 고함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북양왕 휘하, 교위! 봉명(奉命)하여 폐하께 알현을 청하옵니다!”

    * * *

    북양에서 사람이 왔단 소식이 조방궁에도 전해졌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양왕은 격식을 차리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지. 폐하의 생신인데 그가 선물을 보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겠나?”

    “그렇지요.”

    약차를 끓이려 올려 둔 화로에 매고고가 차분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각 지역 번왕(藩王)과 황족들이 도성으로 선물을 보내오고 있지 않사옵니까. 서영왕부에서 보낸 사람은 며칠 전에 이미 도착했습니다.”

    나라를 세운 후 봉했던 다른 성씨의 왕들 3명 중, 지금까지 남은 왕은 이제 북양왕과 서영왕 둘이었다.

    두 왕은 모두 시류를 볼 줄 알았다.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생신 선물을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전한단 말이야?”

    대장공주가 말했다.

    “선물은 아직 오는 중이고, 전언부터 올린 것이라 하옵니다.”

    절레절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흔든 대장공주가 따뜻하게 데워진 방석 위에 올라앉았다.

    “아니야, 그래도 이상해. 뭔가 다른 사정이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구먼.”

    매고고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지온 소저에게 말씀을 드려볼까요?”

    답답한 듯 잠시 고민하던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우선 기다려보지. 어쩌면 그 아이가 우리보다 더 소식이 빠를 수도 있겠어.”

    그러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다 놔두고 왜 하필 루안, 그 녀석을 마음에 담아서는.”

    매고고가 웃음을 지었다.

    “루 대인께서도 젊은 인재가 아니십니까. 손에 꼽히는 걸출한 분이시지요.”

    대장공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됐네! 걸출한 젊은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 유씨 가문의 유 대부인도 혼인 의사를 물어봤음이야! 고 녀석은 그냥 잘생긴 얼굴이 좋은 게야!”

    매고고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잘생긴 외모도 장점이지요. 공주마마께서도 하마터면 그 때문에 전대 북양왕 전하와 잘될 뻔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바로 그 모친에, 그 여식인 것입니다, 공주마마.”

    “…….”

    대장공주가 매고고를 향해 눈을 홉떴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일을 가지고 본궁 흉을 보는 게야?”

    매고고가 웃으며 부치던 부채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일어나 끓인 약차를 따랐다.

    “그 오래된 일을 기억하는 것도 이젠 소인뿐일 것입니다. 마마, 약차부터 드시지요.”

    매고고가 후후 불어 식힌 약차를 대장공주에게 건네자, 몇 모금을 넘긴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의 가벼운 방정이었을 뿐이야. 본궁은 그때 루연에게 크게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네. 곽여단(霍如丹)이 본궁 앞에서 어찌나 제 자랑을 해대던지, 고것의 속을 뒤집어 보겠다고 홧김에 그랬던 게 아닌가.”

    매고고가 작게 웃었다.

    “곽 소저와 공주마마, 두 분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으셨지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셨는데 서로 어찌 그리 싫어하셨던지…….”

    “누가 아니라던가? 다들 본궁을 귀하게 못 모셔 안달이었는데, 그 아이만 본궁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달려들지 않았는가!”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화가 나는지, 마시려던 약차도 잊고 대장공주가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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