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평화로운 날
추아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조용히 금벽을 말렸다.
“언니, 그만 울어. 그렇지 않아도 마마께서 많이 슬프실 텐데…….”
추아의 말에 불현듯 깨달은 금벽이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렇지, 맞아. 내가 바보다, 내가 멍청했어.”
황급히 일어난 그녀가 내시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 말하곤 다시 추아에게 물었다.
“태의가 주고 간 약방이 있지? 그걸로 일단 탕약을 끓여서 준비해놔. 목욕이 끝나시면 마마께서 다시 한번 드셔야해.”
추아가 얼른 대답했다.
“탕약은 내가 직접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언니! 지금 바로 갈게!”
고개를 끄덕인 금벽은 옥비를 모시고 욕실로 들어갔다.
탕약을 한 그릇 복용하고 뜨거운 기운까지 쐬고 나자 혼미하던 옥비의 머릿속도 점점 맑아졌다.
“거울은?”
궁인이 곧 거울을 대령했다.
옥비는 멍하니 거울 속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인이었다. 버들잎 같은 눈썹도 그러했다. 거울 속 여인은 아름다운 여인이 구름처럼 많다는 후궁에서도, 비록 절색(絶色)이라 손에 꼽힐 만큼은 아니어도 그 중, 수려(秀麗)하단 소리는 충분히 들을 만큼은 아름다웠다.
옥비는 조심스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도 거의 잊을 뻔했다. 이 얼굴로 살았던 그녀에게도 누군가는 마음을 담은 시를 적어 보냈고, 만나고 싶은 마음에 초대장을 건넸다는 것을.
‘아가씨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던 사람은 아니었잖아. 안 그래?’
마주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짓자 수려한 얼굴 위로 금방 생기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나는 왜 내 얼굴로 나타나면 안 되는 거지?’
옥비는 문득 엉엉 큰 소리로 울고 싶어졌다.
‘아, 폐하, 폐하! 모두 당신 때문이었어요! 당신께서 그 모습이 좋다하시어 저는 그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단 말입니다! 왜 싫어지셨나요?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신 것입니까!’
“마마, 마마…… 울지 마십시오!”
금벽이 옥비의 눈물을 닦았으나 그녀의 눈물은 더욱 세차게 흘렀다.
버려진 아이처럼, 그녀는 그렇게 울었다.
* * *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난 신비는, 머리 손질에 여념이 없는 궁녀를 계속 채근하며 재촉했다.
“빨리! 빨리해! 늦으면 안 된다고!”
그녀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시는 상궁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마마,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어, 그래?”
물시계에 슬쩍 눈을 돌렸던 신비가 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
신비 머리에 꽂을 장신구들을 고르며 상궁이 말했다.
“간밤 영수궁에 화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비의 눈썹이 들썩였다.
“설마 어디를 태워먹은 건 아니라지?”
“바닥 양탄자만 타고 말았다 합니다.”
쯧쯧, 신비가 혀를 찼다.
“겨우 하루밖에 안됐는데 그걸 못 참은 거야?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 우리들이 겪은 만큼 고생하려면 말이야.”
상궁이 웃으며 말했다.
“실수로 그랬을 수도 있지요. 밤엔 소식을 알리지도 않아, 아침 나절에야 사람을 통해 소식이 퍼졌습니다.”
신비는 아쉬운 얼굴이었다.
“아니, 왜 폐하는 안 불렀대?”
“안 모시기는요. 병이 났다고 와주십사 말씀을 올렸는데 폐하께서 태의만 보내어 진맥만 받게 했다 합니다.”
“뭐?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유모는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신비의 말에 상궁은 기가 찬 표정이었다.
“침수를 드시고도 계속 재미난 구경 생각뿐이셨습니까?”
그 말에 신비가 민망한 듯이 깔깔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지, 그럼 안 되는데! 이러면 오늘 아프다고 안 오는 거 아니야?”
* * *
신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옥비가 화춘궁에 문안을 오지 않은 것이다.
문후를 올 수 없단 옥비의 전언을 받은 황후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병이 났나? 그럼 몸조리 잘 하고 푹 쉬라 전하게.”
오늘 문후의 목적이 ‘강 건너 옥비 구경’이었던 신비는 그만 모든 흥미를 다 잃고 기운마저 빠지고 말았다.
옥비도 없이, 자신이 예서 보고 싶은 게 뭐가 있겠는가?
류 첩여가 어찌 생겼는지는, 어차피 황제의 총애를 두고 경쟁할 생각도 없는지라 관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황후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감사 예를 위해 찾아온 류명주에게 그동안의 전례에 따라 선물과 훈화 몇 마디만을 전하고 금방 다른 비빈들과 함께 돌려보냈다.
* * *
화춘궁에서 멀어지는 비빈들 하나하나가 옥같이 말갛게 빛났다. 흐드러진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후의 눈이 옥비가 있을, 영수궁이 자리한 곳을 향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마마, 어찌 마음이 안 좋아 보이시옵니다.”
유모의 말에 황후가 상념에서 깨어나듯 입을 열었다.
“옥비가 정녕 이렇게 뒷방으로 밀려나는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도 이건…… 너무 가볍지 않은가…….”
지난 3년간, 옥비는 저가 무슨 수를 써도 무너지지 않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녀를 무너뜨리려 현비가 그리 독한 흉계까지 썼지만, 결국 그 흉계조차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 후로 자신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랬던 마음이 난데없이 하룻밤 사이에 식어? 저와 신비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탓이었을까,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모가 대답했다.
“전례가 없던 일도 아니옵지요. 류 첩여가 들어오지 않았사옵니까.”
황후는 류 첩여의 외양을 떠올렸다. 미인이었으나 손에 꼽을 만큼은 또 아니었다.
‘폐하께선 참으로…… 평범한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황제가 처음 마음을 주었던 옥비가 얼마나 큰 명성을 가진 여인이었던가. 그러나 실제론 명성일 뿐이었고 이번에 새로 온 류 첩여도 그저 평범해 보였다.
‘이런 것을 보고 군주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 한 것인지 모르겠군.’
황후는 피식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신비와 저가 폐하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두 사람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 *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지온은, 그 후로 약속을 지켜 정말 조방궁 밖을 나서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9월을 보내고 돌아보니, 눈 깜짝하는 사이 벌써 10월이었다.
대장공주는 웬일이냐며 입을 열었다.
“요즘은 별일 없는 것이 조용하구나!”
매고고가 경서를 정리하며 미소를 지었다.
“별일 없는 것도 싫으십니까?”
무탈하여 평화로운 날들은 당연히 좋았다. 다만 그 날들이 어쩐지 현실 같지 않았다. 대장공주가 말했다.
“본궁의 착각인지 모르겠네만, 온이가 온 후로 밥 먹듯 일이 터졌던 것 같아 하는 말이네.”
“…….”
지온이 대장공주를 흘긋거리곤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사고를 치고 다닌단 말씀이십니까?”
“그게 가장 이상하단 게다. 그 사고들을 네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게!”
대장공주는 정말 억울하고 답답하단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지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기다고?”
대장공주가 짐짓 엄한 체하며 말했다.
“본궁은 진지하다!”
“전하, 그냥 제가 사고치고 다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때 한쪽에 있던 매고고가 다른 일을 물어왔다.
“마마, 만수절(萬壽節)이 곧 입니다. 저희는 전처럼 준비하면 되겠지요?”
만수절은 황제의 생일이 아닌가?
‘아, 곧 그의 생일이었구나!’
지온의 머릿속에 옛날 기억 몇 토막이 떠올랐다.
나이가 같았던 태자와 의안왕은 태어난 달마저 동일했다.
태자의 생일은 당연하게도 매년 융숭한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의안왕의 생일은, 그에 비하면 기억하는 이도 적어 태자의 생일에 얹혀가기 일쑤였다.
지온은 늘 선물을 두 개를 준비했고, 선물은 언제나 똑같은 물건이었다.
태자는 매번 그녀에게, 선물 한 번을 달리하지 않는다며 영악하다 했다. 그러나 의안왕은 조용히 그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오직 너만이 차별하지 않는구나.”
당시 소년이었던 그가 한 말이었다.
지온은 그때 의안왕의 마음속에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어둠이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저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난 탓이리라 생각하며 도리어 그를 안타까워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 태자를 질투했다. 다만 그땐 감히 그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을 뿐…….
대장공주의 목소리가 그녀를 기억 속에서 불러들였다.
“올해는 연회가 열릴지 모르겠구나. 본궁은 가고 싶지 않다.”
“그럼 안 가시면 되지요.”
매고고가 대답했다.
“어차피 폐하께서도 공주마마께 뭐라 하지 못하십니다.”
그 말에 대장공주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렇지.”
대장공주가 권력을 탐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아무리 위세를 부리고 무도한 짓을 벌여도 황제는 참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요즘 황제는 무엇보다 강왕세자를 경계하고 있지 않던가? 그 와중에 그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 턱이 있겠는가?
* * *
난택산방을 나선 지온은 여유롭게 사방전으로 향했다.
막 사방전 앞에 도착하여 들어가려는 그때, 어디선가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이거 아니라고! 방금은 내가 잘못 놓은 거니까 다시 놓는다!”
곧이어 웃음기 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씨 가문의 대공자는 한 번 놓은 돌은 물릴 수 없단 법을 모르나보지? 군자답지 못하군.”
“돌이라니? 우리한테 돌이 어디 있는데?”
“흐음……. 그건 또 그렇군.”
“그렇지? 내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기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지온이 소리를 따라 사방전 건물 옆으로 돌아 들어가자, 건물 옆 계단 층계참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향을 태우고 남은 재로 바둑판을 그려, 붉은 꽃잎과 초록색 이파리를 바둑돌 삼아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지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두 분 나리들께서는 참으로 세월 좋으십니다!”
동시에 고개를 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온을 본 유신지가 신나게 그녀를 부르며 손짓했다.
“어서 와 날 좀 도와주세요, 지온 소저! 이제 어디에 둬야겠습니까?”
루안은 기가 막혔다.
그가 저를 도발하는 유신지의 눈빛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해 속상한 심정을 부러 제게 풀려는 게 분명했다.
‘받아주지.’
승자로서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온 지온은 유신지 옆에 있는 꽃잎을 주워들었다. 그리곤 바둑판을 살피다 한 곳에 톡 내려놓았다.
“오! 그곳에 놨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참, 저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유신지가 손뼉까지 치며 하는 소리에 지온이 마주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과거를 치르지 않다보니 이런 잡학들은 제가 공자보다 좀 더 정통하지요.”
맞은편에 앉은 루안의 초록색 이파리가 다시 바둑판 한 곳에 놓였다.
“엑…….”
꽃잎을 든 유신지의 손이 또다시 갈 곳을 모르고 헤매자 지온이 그대로 이어받아 두기 시작했다.
“나는 이리로 갈까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래요?”
그러자 루안이 금방 방향을 바꾸며 대답했다.
“괜찮소. 당신이 원한다면 소유하면 그뿐. 허나 이곳은 내 소유가 되겠군.”
지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성동격서(聲東擊西)? 그럼…… 난 다른 길을 찾아야겠군요.”
“아니, 저기…….”
유신지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보려 입을 열려는 찰나, 지온을 향한 루안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곳에 잘 쉬고 있던 내 초록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쉽게 됐소. 이런 것을 두고 이일대로(*以逸待勞: 편히 쉬며 전력을 비축한 채 지친 적을 기다리다)라 하던가?”
슬슬 화가 난 지온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곤 다시 바둑판에 꽃잎을 두며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여기서도 당신을 못 꺾을까!”
“저기…….”
여전히 대화에 끼어보려 애쓰는 유신지의 음성 위에 루안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얹혔다.
“내가 무서워해야 하오?”
말 한마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유신지는, 할 수만 있다면 지온을 불러들인 조금 전 제 자신의 뺨을 때려주고 싶었다.
굳이 지온 소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던가? 일부러 그녀와 친밀한 모습을 보여 루안의 질투를 살 요량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도리어 두 사람만 신나게 바둑을 두고 자신은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