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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08)화 (208/385)
  • 208화. 병이 난 옥비

    승원궁으로 향했던 태감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금방 돌아온 태감을 보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던 금벽이 그의 뒤가 텅 빈 것을 발견하곤 다급히 물었다.

    “아니, 폐하께서는 어찌……?”

    태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채 공공,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입을 다물고 있는 겐가!”

    그제야 깊은 한숨과 함께 태감, 채 공공의 입이 열렸다.

    “승원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폐하께서 타신 어가를 만났네.”

    금벽이 멈칫했다.

    어가를 만났다니? 그 말은 폐하께서 후궁으로 납셨다는 말이 아닌가!

    ‘영수궁에선 폐하를 뵙지 못했으니……. 폐하께서 어디로 납셨다는 말이야?’

    “화춘궁으로 가셨나?”

    채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장복궁?”

    채 공공의 고개가 연신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다른 여인을 찾으셨단 말인가? 그럼 그냥 모셨어도 됐잖은가!”

    황후나 신비를 찾아 간 것이었다면 눈치를 봐야 했겠지만, 지위를 가지지 못한 다른 이를 찾아간 것이라면 그대로 모셔왔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채 공공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런 여인이 아니었네.”

    “아니라니, 그게 지금…….”

    금벽이 묻기 전에 채 공공이 먼저 대답했다.

    “새로 첩여에 봉해진 분이셨단 말이네.”

    순간 정적이 찾아왔으나 곧 금벽이 깨뜨렸다.

    “첩여라니? 새로 책봉된 분이 있단 말인가!”

    채 공공이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궁 밖에서 들어오신 분이 곧바로 첩여에 봉해지셨다고 하네. 듣자 하니…….”

    채 공공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금벽에게 번개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궁 밖에서 온 여인, 노래하던 기녀였다는 풍문…….

    폐하께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궁을 나가셨고, 황궁의 법도마저 어겨가며 그녀를 궁 안으로 들이셨다고 한다.

    그리고 궁에 든 그날, 그녀는 첩여에 봉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금벽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과거였다면, 폐하께서 누구를 좋아하고, 총애하시던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다른 이의 곁에 계시더라도 결국 다시 마마님 곁으로 돌아오실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직감이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런 방법으로 궁에 들인 여인이라면, 그동안의 여인들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모셔왔어야 할 게 아닌가!”

    금벽의 속이 타들어갔다.

    “마마께서 저리 되셨는데, 폐하께선 어찌 다른…….”

    “쉿!”

    다행히 채 공공이 제때 그녀의 입을 막았다.

    “금벽 궁녀, 해선 안 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금방 입을 다문 금벽의 마음은 더욱 서글퍼졌다.

    ‘변했어. 진짜 변하신거야.’

    폐하께서 마마께 그리 잘해주실 땐 마마께서 하시는 톡 쏘는 말 몇 마디가 무에 문제였겠는가? 도리어 들으시며 즐거워하시던 폐하가 아니셨던가.

    그러나 이젠 뒤에서조차 말 한마디 쉽게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관계에 위, 아래를 따지고 존귀와 비천의 구분을 두는 순간, 아무리 깊은 감정이라도 서서히 얕아져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침전에서 옥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몇 시나 되었느냐?”

    “마마, 술시(*戌時: 오후 7시-9시)가 다 지났습니다.”

    “음…….”

    그녀의 목소리에 금벽의 마음이 찌르르 아파왔다.

    마마께선 시간을 물으며 여전히 폐하께서 와주시길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닌가!

    ‘내가 가만있을 게 아니라, 한 번 더 청을 넣어보는 거야!’

    “채 공공, 한 번 더 찾아가 봐주실 수 있겠나?”

    금벽이 애원했다.

    “마마께서 병이 나신 것을 모르실 수도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 소식을 들으시면 바로 와주실지도 모르네!”

    옥비를 향한 황제의 총애가 어떠했었는지 떠올린 채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사이가 틀어진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평범한 다툼을 하신 것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지난 3년간 폐하와 마마께선 영수궁에서 부부처럼 지내셨다. 그리 깊던 마음이 겨우 며칠 만에 사라졌다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채 공공 자신조차 믿지 못할 말이라 치부할 터였다.

    * * *

    채 공공이 벽옥헌에 도착했을 때 도로롱, 흥겨운 비파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중간 중간 울리는 웃음과 대화 소리가 벽옥헌 밖까지 선명하게 울렸다.

    밖에서 채 공공이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곧 호은이 나왔다.

    “호 공공을 뵙습니다.”

    채 공공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옥비마마께서 병이 심하시어 폐하께 말씀을 올리고자 소인이 찾아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는지, 호은이 놀라 물었다.

    “마마께서 아프신 겐가? 지금 어떤 상태신가? 태의가 진맥은 보았나?”

    “마마께서 태의를 부르지 말라하시어…….”

    자신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채 공공의 얼굴이 곤혹스러웠다.

    “폐가 될 거라며 부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병이 나셨는데 어찌 태의를 부르지 않았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과 불만이 불거져 호은이 지청구를 했다.

    “마마께선 워낙 살뜰하신 분이시라 그리 하셨다지만, 자네들은 마마를 모시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어찌 그리 사안의 경중을 몰라! 어서 가서 태의부터 부르시게! 그러다 큰 병이라도 되면 폐하껜 뭐라 말씀을 드리려고!”

    “그것이…….”

    호은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제 수하의 어린 내시를 불러 태의에게 보냈다.

    망설이던 채 공공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정신을 심히 차리지 못하시는데, 호 공공, 혹 폐하께 말씀을 전해주시면…….”

    슬쩍 창가로 눈을 돌렸던 호은이 대답했다.

    “폐하께선 음악을 듣고 계시네!”

    그 말에 채 공공의 애도 타기 시작했다.

    “하오나, 호 공공…….”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컸던 것인지, 안에서 황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은, 무슨 일이냐?”

    황급히 안으로 든 호은이 대답했다.

    “영수궁에서 찾아왔사온데, 그것이…… 옥비마마께오서 병이 나셨다 하옵니다.”

    기대에 찬 채 공공의 눈이 창에 꽂혔다.

    그러나 들려 온 것은 생각지 못한 황제의 질문이었다.

    “태의는 보았다더냐?”

    “소인이 조금 전에 태의를 보내라 명을 내렸사옵니다.”

    호은이 재빨리 대답했다.

    “태의에게 최선을 다해 치료하라 전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황제에게서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밖으로 나와 채 공공을 바라보는 호은의 눈에서 무력감이 느껴졌다.

    “자네도 다 들었을 테니 그만 돌아가 옥비마마를 모시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호 공공.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채 공공은 낙담하여 고개를 숙인 채로 기운 없이 인사했다.

    * * *

    영수궁 앞에선 금벽이 잔뜩 기대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홀로 돌아오는 채 공공을 본 그녀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어떻게 폐하께서 이럴 수가 있…….”

    그러나 채 공공의 몇 마디에 금벽은 또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가 지날 쯤에야 탕약을 복용한 옥비는 정신을 차렸다.

    등을 밝혔으나 여전히 어두운 방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침상 앞엔 금벽이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황제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젠 정녕 나를 찾아주지 않으시려는 거겠지?’

    옥비가 휘청대며 몸을 일으켰지만, 누구 하나 깨닫는 이가 없었다.

    속에 입는 중의(中衣)만 걸친 채 일어난 그녀의 풀어진 머리가 흐트러졌다. 아롱아롱 흔들리는 촛불을 떠받친 촛대를 든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 곳은 거울 앞이었다.

    허리만치 오는 커다란 거울은 앞에 선 이를 세세히도 비췄다.

    거울에 비친 여인의 허리가 버들가지마냥 가늘어 하늘거렸다. 시선을 올리자 허리 위로 앙상한 어깨와, 말라 빼족해진 긴 목이 보였다.

    옥비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간 시선에 거울 속 여인의 얼굴이 들어왔을 때, 웃음은 허망하게도 사라졌다.

    옥비의 손이 저도 모르게 거울로 향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거울 속 이 여인은 누구야? 어쩜 이리 낯선 이가 있어.’

    거울 속 그녀는 당연히 ‘옥비’, 저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 * *

    손에 든 향유연고로 남은 분장을 지우던 지온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 요즘 출타가 너무 잦으세요. 대장공주께서 물어보실 정도라고요!”

    손수건을 짜며 서아가 입을 열었다. 지온이 머리를 풀며 대답했다.

    “알겠어. 일도 대충 끝났으니 이제 안 나갈게.”

    그새 다가온 서아가 지온의 머리 푸는 것을 거들었다. 거울로 보니 서아는 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무슨 표정이야. 그냥 말해.”

    그럼에도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하던 서아가 입을 뗐다.

    “저는 그냥 아가씨가 아주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고, 성공해내시잖아요.”

    “그렇게 대단한가? 그냥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한 것뿐이거든.”

    황제의 빈번한 출궁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이라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서아가 말했다.

    “류 낭자가 입궁을 했으니 황궁도 이제 조용하진 않겠네요.”

    그럴 거란 지온의 대답에 조용히 머리를 빗겨주던 서아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는 아주 걱정스러워요.”

    “음? 네가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아가씨가 아무래도 아주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지온이 의아한 듯 서아를 바라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저 류 낭자에게 진 빚을 갚은 것뿐이야. 궁에 들어갔으니 이제부턴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 나도 더 할 생각 없었어.”

    지온이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며 웃었다.

    궁으로 선물을 보냈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더 할 필요가 없었다.

    ‘금벽아, 내가 보낸 선물은 만족스러웠니?’

    * * *

    콰당, 촛대가 쓰러졌다. 초를 태우던 불은 금방 양탄자가 깔린 궁실(宮室) 바닥에 옮겨 붙었다.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깬 금벽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마마!”

    재빨리 옥비부터 제 몸 뒤로 당겨온 그녀가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렀다.

    “불이야! 불이야! 여봐라! 불이야!”

    비명 소리를 듣고 깬 침전 밖 내시와 궁녀들이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다.

    다행히 불은 금방 잡혔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금벽은 옥비를 붙들고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옥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목이 말라 물을 한 잔 마시려 한 것인데, 내가 촛대를 제대로 들질 못했어.”

    그런 옥비의 모습에 화가 나고, 안타까웠던 금벽의 입에서 애가 타는 듯한 속상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목이 마르셨으면 노비를 깨우셨어야지요! 이러다 잘못됐으면 큰일 나실 뻔하셨습니다!”

    대답 없이 채 공공을 향해 시선을 돌린 옥비가 조용히 말했다.

    “밤이 깊었네. 자네들도 정리만 끝내고 돌아가 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다른 곳까지 놀라게 할 것 없네.”

    “예.”

    채 공공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어린 내시들을 데리고 들어와 까맣게 탄 양탄자를 정리해 들고 나가게 했다. 그리곤 다시 궁녀들을 불러 바닥 청소까지 마저 시켰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동안, 금벽은 옥비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마, 마마!”

    옥비가 작은 미소를 얼굴에 드리웠다.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야. 가서 뜨거운 물이나 받아 오거라, 목욕을 하고 싶구나.”

    금벽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상황에도 폐하께서 놀라실 것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옥비는 금벽이 제 소매를 붙들고 우는 것을 아무 말없이 그저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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