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07)화 (207/385)
  • 207화. 첩여

    황제는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 속 노화(怒火)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내는군!’

    죄를 청하러 왔단 말을 할 땐 언제고, 금세 잘못을 지적하는 제 형님의 꼴을 보며 황제는 치미는 노화(怒火)를 내리눌렀다.

    황제가 느긋이 입을 뗐다.

    “형님 말씀이 옳네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일이 생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강왕세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강왕부의 내시가 황제를 정부(情夫)라고 부르며 황제에게 호통쳤다는 보고가 생각 난 까닭이었다.

    지금 황제는 건넛산 보고 꾸짖기도 아니고, 대놓고 자신을 탓하고 있지 않은가?!

    내심 차가운 미소를 지은 강왕세자는 가슴속에 은근히 피어오르는 분노를 갈무리했다.

    “모두 신의 잘못입니다.”

    이를 악문 강왕세자의 목소리가 짓씹듯 흘러나왔다.

    “짐이 신경 쓸 것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형님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형님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 강왕세자를 향한 황제의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짐이 출궁한 탓에 상주 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형님, 그럼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강왕세자는 얼굴을 비틀어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신,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려 문턱을 넘던 강왕세자의 시선이 문득 뒤로 향했다. 그러나 상주문을 읽는 황제는 이미 그에게서 관심을 끈 뒤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른 숨을 후욱 뱉어낸 강왕세자가 그대로 몸을 돌려 멀어졌다.

    * * *

    그날 밤, 강왕부.

    “세자,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형틀 위의 피륙으로 곤장이 떨어졌다. 무겁고 질척이는 곤장 소리 사이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얽히자 공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새장 속 작은 새와 여상히 장난을 치는 강왕세자의 얼굴에선 그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본 세자가 널 살려주지 않는 게 아니다. 폐하께서 직접 자신을 모멸한 천한 것들을 끌어내 곤장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내시의 애원이 들려왔다.

    “세자, 폐하께서 이미 마음이 앞서 과하셨다고 내리신 명을 철회하셨사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세자!”

    그러자 차갑고 비릿한 웃음이 강왕세자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가지고 놀던 작은 새를 한 손에 올려 쥔 강왕세자가 돌연 꾹 힘을 주었다. 막 살아 숨 쉬며 그에게 다정히 굴던 새는 그대로 목이 부러졌다. 새 부리 밖으로 핏물이 조르륵 흘렀다.

    “폐하의 명은 천자의 명인 것을, 내 어찌 함부로 철회할 수 있겠느냐? 천한 것! 네놈이 폐하의 명성을 더럽히려는구나!”

    내시가 크게 당황했다.

    “아닙니다, 세자! 소인은 절대…….”

    강왕세자는 내시에게 관심을 끊었다. 점점 작아지던 내시의 읍소는 끝내 멈추어 고요해졌다.

    “세자, 죽었습니다.”

    시위의 보고에 강왕세자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여유롭게 더러워진 손을 닦아냈다.

    사람 하나, 새 한 마리……. 목숨을 둘이나 앗았으나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엔 역시나 턱없이 부족했다.

    하필 그때 또 다른 불쾌한 소식이 그를 찾아왔다.

    “세자, 폐하께서 류 낭자를 첩여(婕妤)에 봉하셨습니다.”

    잠시 멈칫했던 강왕세자가 의자를 우당탕 강하게 발로 찼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첩여? 감히 첩여에 봉해! 궁에 이미 옥비가 있는데, 다른 이들이 비웃을 건 걱정도 안 된단 말이냐!”

    기녀 따위, 자신은 황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껍게 양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게 지위까지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류명주를 높은 자리에 앉히는 건, 내 체면을 제대로 구겠다는 얘기렷다!’

    “좋군! 아주 좋아!”

    강왕세자가 차갑게 말했다.

    “황위가 어디서 왔는지 잊으신 것 같은데, 본 세자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리겠습니다, 폐하!”

    * * *

    황제로부터 성지(聖旨)를 받고도 류명주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황제는 저를 황궁으로 데려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곧장 저를 비빈 자리에 앉혀 황궁에 있을 명분까지 만들어 준 것이다.

    첩여…….

    ‘이제 난 더 이상 장락지에서 웃음이나 노래 따위를 팔던 기녀가 아니야. 난 이제 황궁의 첩여마마야!’

    “첩여가 되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상궁, 향설이 앞장서서 무릎 꿇고 경하하자 류명주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요.”

    그리곤 향설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금과 은을 내리셨는데, 그것을 제가 사용할 수 있을까요?”

    향설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쓰셔도 되지요, 마마. 그리고 이제 아랫것들에게 말씀을 낮추셔야합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류명주가 따스한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그럼 자네는 백 냥을 가져가 모두와 나누도록 하게. 좋은 일이니 함께 즐거웠으면 해.”

    그 말에 궁녀들이 크게 기뻐하며 류명주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첩여마마!”

    성지를 전한 태감 역시 선물을 받고 희희낙락하여 은근슬쩍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오늘 밤 찾아오실 것입니다. 마마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시면 좋을 것입니다.”

    “알겠네.”

    태감의 말에 향설과 어린 궁녀들이 바빠졌다.

    * * *

    황제가 새로 첩여를 봉했다는 소식이 후궁 전체에 퍼져나갔다.

    황후는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고 사고가 정지된 듯 멍했다.

    “첩여라니, 어디서 온 여인이냐? 어찌 본궁은 전혀 들어본 일이 없어?”

    그녀 옆에 있던 유모가 대답했다.

    “그것이 실은…….”

    유모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황후의 미간이 잘게 구겨지자, 이야기를 전한 유모가 황후를 다독였다.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마마. 폐하께선 새로운 것에 잠시 눈을 돌리셨을 뿐…….”

    황후가 담담히 유모의 말을 잘랐다.

    “본궁이 노할 게 무언인가? 폐하께서 본궁을 업신여기시는 것도 아니시지 않아. 요즘은 본궁을 자주 찾으시어 함께해주시기까지 하니, 본궁은 더 바랄 게 없네.”

    유모가 웃었다.

    “그렇지요, 마마. 마마께선 황후이시옵니다. 다른 분과 경쟁할 이유가 없는 자리에 있으신 것이지요.”

    침묵하던 황후의 입이 열렸다.

    “처음 몇 년은 본궁도 참 분한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어. 당시만 해도 폐하께서 옥비만을 총애하시는 통에 폐하와 대화 한 번 길게 하는 것도 어찌나 힘이 들던지, 그것을 두고 본궁과 현비, 신비가 얼마나 부딪혔는지 몰라.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알겠더군. 우리가 악다구니를 쓰며 암투를 벌이는 동안 그분은 옥비를 대함에 변함이 없으셨단 것을 말이야. 악다구니를 쓰는 동안 우린 얻는 것 하나 없이 그저 잃고만 있었다는 것이네.”

    “그때는 마마께서도 연치가 어리지 않으셨사옵니까.”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지. 정말 어렸어. 그땐 너무 어려 참으로 생각이 짧았네. 그 일을 겪는 동안 현비는 제 스스로를 그리 불구덩이에 던져 태워버렸고, 본궁은 이제야 뭘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아마 신비도 나처럼 깨달은 바가 있는 것이겠지. 그러니 현비가 떠나고, 신비가 거하는 장복궁이 이리 조용한 것이겠지.”

    유모가 아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슬픔을 품지 마시옵소서. 현비께선 스스로 잘못된 길을 택하여 걸으셨사옵니다.”

    “그렇다면 본궁은…….”

    황후가 고개를 흔들었다.

    “첩여를 봉하지 않았다 한들, 폐하께선 옥비 곁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셨겠지. 누구를 봉하셨든, 그것이 내게 무슨 영향을 주겠는가? 다만 폐하께서 본궁을 찾아주셔야 할 때, 이곳 화춘궁으로 걸음을 해주시면 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마마.”

    유모가 맞장구를 쳤다.

    “마마께서 폐하의 심중에 그래도 중요한 위치에 계시단 의미가 아니겠사옵니까.”

    “허면 이제 마음 졸일 이는 옥비겠구먼?”

    조소하는 황후의 얼굴에서 은근히 옥비의 불행을 기뻐하는 기색이 읽혔다.

    “옥비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구먼!”

    * * *

    장복궁.

    소식을 접한 신비도 황후와 크게 다른 반응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 중에서 첩여를 들이셨단 말이야? 폐하 취향도 참…… 범상치 않으시구나.”

    “마마!”

    상궁이 황급히 그녀의 입방정을 막았다.

    “벽에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웃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신비가 구시렁거렸다.

    “내가 폐하께 무슨 불경스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뭔 말도 못해?”

    신비가 단술에 찹쌀 새알을 넣고 달게 끓여 낸 주양원자(酒釀圓子)를 받아들었다. 입을 다물고 오물오물 주양원자를 먹던 신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까 일편단심이던 폐하의 마음이 흔들렸단 말이지? 궁금하네, 진짜? 대체 류 첩여의 어떤 부분에 흔들리신 거지?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기에, 일편단심으로 바라보시던 옥비까지 팽개치셨을까?”

    슬쩍 경계하듯 밖을 곁눈질하던 상궁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비파 연주가 그리 대단하다 합니다.”

    “폐하께선 음악 감상하시는 거 안 좋아하시잖아?”

    신비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상궁이 말했다.

    “내일이면 자연스레 알게 되시겠지요? 첩여에 봉해졌으니, 감사 예를 올리러 화춘궁에 가실 게 아닙니까.”

    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우리 내일 문후는 일찍 여쭈러 가자. 이렇게 재미난 구경은 절대 놓쳐선 안 돼!”

    그러다 신비는 돌연 고민에 빠졌다.

    “흠, 내일 옥비가 병치레 핑계를 대면 어쩌지? 옥비가 안 오면 재미없는데.”

    상궁은 시큰둥했다.

    “그쪽은 상관 마시고, 저희는 저희나 잘 챙기면 됩니다, 마마.”

    “후궁 구석이 얼마나 심심한지 몰라서 그래? 이런 재밌는 소일거리라도 그냥 하도록 놔두면 좋잖아?”

    구시렁거리는 신비의 입속으로 달착지근한 주양원자의 마지막 새알이 쏙 들어갔다.

    * * *

    날이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찬바람을 맞은 그날 이후, 옥비는 몸이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며칠 문 밖 출입도 하지 않고 조심했지만,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갑갑함과 함께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음을 느꼈다.

    금벽이 태의를 부르려 했으나 옥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영수궁을 지켜보는 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지금 네가 가서 태의를 부르면 다들 내가 폐하를 모시려고 꾀를 쓴다고 여길 것이다.”

    기운 하나 없이, 침상에 누워있는 옥비를 보는 금벽의 애가 탔다.

    “몸이 이리 좋지 않으시면서 태의도 부르지 않으시고,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리 큰 병도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며칠 쉬면 괜찮을 것이다.”

    “마마…….”

    옥비가 의술에도 조예가 깊단 것을 알기에 금벽도 더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속상한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마마께선 정숙해도 너무 정숙하시다니까.’

    다른 궁에선 두통만 조금 있어도, 사지가 떨어지는 양 난리를 떨어 폐하를 모셔오라 재촉을 해댔다. 몸이 아프고 괴로워도 이렇게 참고만 있는 것은 자신이 모시는 미련한 마마뿐인 것이다.

    “언니, 어떡해?”

    추아가 작게 물었다.

    “생강탕을 끓여와.”

    “알겠어.”

    생강탕을 먹였지만 옥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애가 닳은 금벽이 영수궁 소속 태감을 찾아갔다.

    “마마의 병이 심하네. 아무래도 마마를 뵈러 와주시라, 폐하께 말씀을 전해 올려야 할 것 같네.”

    태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되겠는가? 마마께서 폐하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항상 말씀을 하시는데…….”

    “지금 마마 병이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나!”

    옥비의 병이 마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란 것을 금벽은 알고 있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마마께서 오래도록 앉아계셨던 그 밤, 그날이 지난 후로 폐하께선 더 이상 영수궁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긴 시간 마마를 모신 금벽이었지만, 그동안 폐하께서 이리 오랫동안 영수궁에 걸음하지 않았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싸우셨던 걸까? 아니, 그래도 이렇게 마마를 놔둘 순 없어!’

    금벽의 설득에 태감도 넘어가고 말았다.

    “그럼 우리가 승원궁에 다녀오겠네.”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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