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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06)화 (206/385)
  • 206화. 가장 존귀한 곳

    제법 시간이 흘러 류명주의 방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옆방이 조용해지자 한등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공자님, 떠났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지 멍한 표정을 하는 지온을 본 그가 찻잔을 채워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괜찮소?”

    “괜찮아요.”

    그녀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옷장 안이 좀 답답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한 것보다 효과가 더 좋은데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본래 계획은 황제에게 강왕부 사람이 류명주를 데려가려는 것을 보여주고 황제로 하여금 류명주를 입궁시킬 마음을 먹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무슨 자극을 받은 것인지 류명주를 바로 그 자리에서 궁으로 데려가 버린 게 아닌가!

    황제의 행동은 강왕세자의 뺨을 쳐올린 것과 다름없었으니, 강왕세자는 맞은 따귀가 황당하면서도 아플 터였다.

    ‘강왕세자도 성격이 대단한 사람이니, 앞으로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기겠어.’

    “입궁을 못 하는 게 아쉽네요.”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지온의 목소리에, 루안이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어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생기든, 내 곧장 당신에게 알려줄 테니.”

    * * *

    강왕세자에게도 금방 소식이 들어갔다.

    흠칫한 그가 다시 물었다.

    “뭐라?”

    내시는 다시 한번 제 말을 반복했다.

    “폐하, 폐하께서 류 낭자와 입궁하셨습니다.”

    들은 말을 거듭 떠올리고 나서야 강왕세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불신 어린 표정의 강왕세자가 물었다.

    “폐하라니? 지금 류명주가 폐하의 눈에 들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강왕세자가 시종에게 소리쳤다.

    “폐하께서 출궁했는데 왜 난 아무 소식도 받지 못한 것이냐! 어떻게 된 게야!”

    시종이 대답했다.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세자. 소 장군께서 병석에 있으시다 보니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왕세자가 쿵,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런……!”

    욕을 쏟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진짜 욕을 할 수는 없었다.

    류명주를 잃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얼굴 반반한 여인이 그 여자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류명주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황제가 사람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제 따귀를 올려붙인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 아닌가!

    다시 생각하니 알 것도 같았다.

    화가 난 황제는 지금 부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시기가 교묘하게 맞아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기녀를 들이려던 것은 갑작스레 동한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류명주를 데려가려던 그 순간에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강왕세자의 입이 열렸다.

    “마차를 준비해라, 입궁해야겠다.”

    지금은 아직 황제와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었으니, 우선은 황제에게 사정을 말해두는 것이 좋을 터였다.

    강왕세자의 명에 잠시 고민하던 시종이 물었다.

    “세자, 폐하께서 지금은 화가 많이 나셨을 테니, 차라리 시간이 조금 지나 찾아뵙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강왕세자는 확고했다.

    “우선 가보고 생각하지.”

    * * *

    마차 안.

    류명주는 여전히 황공했다.

    “폐하, 이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설령 이제 기적(妓籍)에 제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천첩의 신분으로 어찌 입궁을 할 수 있겠는지요.”

    심장이 떨어지도록 경악할 일이 아닌가!

    황제가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호은이 네 새로운 신분을 준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짐은 널 당당하게 궁으로 들일 것이다.”

    “하오나 다른 이들의 눈은 어찌하시려는지요? 천첩을 이리 데리고 입궁을 하시오면…….”

    “알면 저들이 또 어쩌겠느냐?”

    황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들이 신경이나 쓸 것 같더냐?”

    류명주가 멈칫했다.

    “쓰지 않겠사옵니까?”

    당연히 상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는 3년 전을 떠올렸다.

    저가 ‘옥종화’를 입궁시키겠다고 고집 피웠을 때, 형님이 제게 뭐라 하였더라? 그래, 형님은 이리 말했었다.

    “그래 봐야 노리개가 같은 이가 아닙니까. 원하시면 곁에 두시지요. 하오나 다음엔 대사(大事)를 망칠 수 있으니 이리하시면 아니 되실 것입니다.”

    그들의 눈엔 그저 큰일만 보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를 잘 다독이기만 한다면, 여인 하나 들이는 것이 무엇이 대수일까?

    조정대신들 역시 신경을 쓰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궁(後宮)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한 서열과 질서가 아니던가. 자신은 황후를 태만히 대하지 않고, 비빈을 홀로 외롭게 두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이 누구를 총애하든 누가 신경을 쓰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데리고 들어온 사람은 형님의 눈에 든 여자였으니, 혹 태도가 달라질지도 모르겠군. 지난번처럼 신경 쓰지 않을까? 아니면 제 체면을 깎았냐고 따지러 오려나?’

    황제는 강왕세자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여 몸이 다 달았다.

    황제의 다독거림을 받으며 류명주는 안정을 찾았다.

    감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류명주가 황제를 바라보며 유순히 말했다.

    “천첩, 폐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미소를 지은 황제의 가슴으로 유별스런 만족감이 차올랐다.

    “앞으로는 너는 천첩이 아닌, 신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류명주가 곧장 제 말을 고쳤다.

    “신첩, 그리하겠습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궁문 앞에 도착했다.

    마차를 향해 시위대장이 다가왔다.

    황제가 다른 이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법에 어긋났다. 그러나 그는 황제였고, 그 법 역시 황제가 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류명주는 벽옥헌(碧玉軒)을 받았다.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사용되는 벽옥헌은 건물도 크지 않고 다른 곳에 비해 화려하지도 않았으나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있었으니, 바로 황제가 머무는 승원궁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었다.

    호은은 벽옥헌을 나오며 상념에 빠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직 옥비만을 총애하던 황제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류명주란 여인에게 이렇듯 마음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제왕의 사랑은 길게 가지 않는구나.’

    * * *

    “소인이 류 낭자를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류명주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노소를 불문한 궁녀들이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가장 앞에 선 궁녀가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호 공공께서 저희에게 류 낭자를 모시라 명하셨으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류명주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소세할 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굴을 씻고 싶습니다.”

    조금 전까지 계속 울었던지라 화장이 전부 지워져 있었다.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탁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상궁이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류명주는 상궁이 어린 궁녀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자리를 떠난 궁녀들은 곧 바쁘게 일을 시작했다.

    궁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류명주가 천천히 탁상으로 향했다. 귀해 보이던 탁상은, 이제 보니 더없이 화려한 화장대였다.

    슬금슬금, 그녀의 손가락이 화장대를 쓸었다.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게 들어간 조각무늬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곳이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곳이었구나.’

    화장대 거울 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여인의 눈물은 이미 말끔히 말라붙었고, 그토록 흔들리던 신색도 견고해져 더는 요동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 속에 보이는 것은 오직…… 경탄과 기쁨뿐.

    류명주의 머릿속에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 * *

    “낭자는 첩이 되는 것에 거부감이 있으신가요?”

    차를 마시며 묻는 지온의 질문에 류명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미 기녀의 몸으로 살아온 명주입니다. 속신을 한다 하여도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지요. 기적(妓籍)을 지우고 혼인을 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나, 저희 같은 여인을 누가 정실부인으로 맞겠습니까? 대부분은 첩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지온이 끄덕였다.

    “첩으로 남은 생을 의탁해야 한다면, 당연히 좋은 사람을 찾아야겠네요.”

    “그렇습니다.”

    류명주가 조용히 읊조렸다.

    “명주가 강왕세자에게 몸을 의탁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의 성정이 오만하고 횡포하기 때문이고, 둘은…… 명주가 그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요 공자는요?”

    갑작스레 들어온 질문에 류명주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지온 소저께서 그것을 어찌…….”

    지온이 덤덤히 미소를 지었다.

    “절계루가 그리 은밀한 곳도 아닌걸요. 낭자가 매일 어떤 이를 만나는지 아는 사람은 많아요.”

    ‘아, 그렇지.’

    너무 놀라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절계루의 주인장은 그녀의 사람이 아니던가. 요 공자가 오는 것을 알았을 테니, 그녀가 그것을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온 소저는 요 공자를 아시는지요?”

    지온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입궁해서 증언을 했었는데, 왜 모르세요?”

    류명주가 흠칫 놀랐다.

    입궁하여 증언을 한 것과 요 공자의 신분을 아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잠깐만… 요씨 성에, 내시를 데리고 다니고 목소리가 귀에 익은 사람이라면…….’

    류명주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그분이……?”

    “맞아요, 그분이에요.”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다탁을 붙들어 의지한 류명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평소와 다름없이 천천히 차를 마시던 지온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류 낭자는 요 공자를 어찌 생각하세요?”

    널뛰는 마음을 어렵게 다잡은 류명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 공자께선 성정이 부드럽고 자비로우시지요. 명주가 그분을 거절했을 때도 화내지 않으셨어요.”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강왕세자보다 더 낫다는 말이시죠?”

    류명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피한 듯 말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그리 밝으신데 부끄러울 것이 뭔가요.”

    지온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류 낭자께서 마음이 있으시니,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어요.”

    * * *

    어제 일에서 깨어난 류명주는 여전히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드러난 기쁨을 적당한 불안으로 지워냈다.

    ‘지온 소저가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어.’

    그녀가 알려준 대로 했을 뿐이었는데, 황제가 그녀를 데리고 곧장 입궁을 했다.

    아무나 함부로 대하는 기녀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황제의 빈비(嬪妃)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성정이 포악한 강왕세자에 비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정을 가진 요 공자가 두말할 것도 없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 사이, 뜨거운 소셋물이 들어왔다. 상궁이 수건을 적셔 그녀에게 공손히 건넸다.

    “소인이 소세 시중을 들겠습니다.”

    류명주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 * *

    황제가 막 환복을 했을 때 내시가 보고를 올렸다.

    “강왕세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제는 그가 빨리도 찾아왔다 생각했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들라하라.”

    안으로 들어온 강왕세자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미소를 지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이 막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형님께서 이리 찾아오셨습니다.”

    강왕세자는 황제의 기색을 살폈다. 황제에게서 분노가 읽히지 않자 강왕세자의 가슴이 도리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에 날 그리 곤란한 처지에 빠뜨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다니……. 제법 표정관리를 할 수 있게 됐단 말이지!’

    속으론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언정, 그의 입은 착실하게 다른 말을 했다.

    “신, 죄를 청하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황제는 담담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여인이 아닙니까? 형제끼리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마음이 상하면 도리어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웃음거리가 될 줄 알면서 중간에 가로챌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강왕세자는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신이 수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벌어진 일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나 폐하. 복장까지 바꾸시고 그리 잠행을 하시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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