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05)화 (205/385)
  • 205화. 정부(情夫)

    황제는 화가 났지만 그런 류명주를 보니 마음이 아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 것이냐? 전해온 말은 또 무엇이고? 혹시 어려움이라도 당한 것이냐?”

    류명주의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자 방울진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말이 애처롭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공자님, 아무 말씀 마시고 명주에게 조금만 시간을 내어주시어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이라니?’

    황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주안상이 도착하자 눈물을 쓸어낸 류명주가 시중을 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시비마저 내보낸 그녀가 직접 술병을 들었다.

    “돌아보니 명주가 공자님과 잔을 나누는 기쁨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이 잔은 명주가 공자를 위해 마시겠습니다.”

    류명주가 채운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녀가 다른 술잔을 황제의 입가로 가져갈 때 그녀의 손목이 거칠게 잡혔다.

    “대체 무슨 일이냐! 제대로 말을 하란 말이다!”

    황제가 버럭 화를 냈지만 류명주는 더욱 애처로운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공자…….”

    “말하지 않겠다면 나도 그만두겠다!”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리자, 류명주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돌아서려는 황제의 어깨를 붙잡은 그녀가 애달피 입을 열었다.

    “가지 마시어요! 조금만…… 정말 잠시면 되니…….”

    그녀의 말이 구슬프게 이어졌다.

    “명주는 어려서 기방에 들어와 기녀로 살아왔습니다. 따뜻하게 시작했으나 곧 식어버리는 온갖 마음들을 보고 자란 덕분에, 명주는 이미 오래전에 진심이란 것을 믿지 않게 되었지요. 그러다 공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공자께선 명주를 가벼이 여기지 않으셨지요. 마음은 넘치셨으나, 선을 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 명주는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곧 떠날 것을 생각하니, 이대로 공자께 작별인사라도 드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리 공자께 무례를 무릅쓰고 만남을 청하였습니다…….”

    황제는 울음 섞인 그녀의 고백 속에서 중요한 사실만을 짚어냈다.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게 됐다니? 다른 이를 따라가게 됐단 것이냐?”

    류명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가슴에 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왜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이냐? 내게 사람을 보냈으니 너도 이미 내가 황족 중 하나란 것을 알지 않아? 내게 부탁하면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

    류명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명주는 공자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내 신분을 알았는데도 내가 곤란해질 것이 두렵단 말이냐?”

    황제가 추궁하듯 물었지만 류명주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두 눈과 잘게 흔들리는 머리칼에 그녀는 더욱 가엾어 보였다.

    “아니 됩니다. 공자께서 아무리 황친이라 할지라도 그분과 척을 지어서는 안 되어요. 아니, 공자께서 황가의 종친이시니 그분과 척을 지시면 더욱 화를 입으실 것입니다! 명주가 어찌 공자께 해를 끼치겠습니까!”

    “대체…….”

    황제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물었다.

    “누구냐. 대체 누구이기에 황가의 종친마저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냐! 황제는 아닐 것이 아니냐!”

    “그런 말씀 마시어요!”

    손으로 황제의 입을 막은 류명주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황제 폐하는 아니시어도, 그분과 진배없는 분이십니다. 공자님, 명주는 공자를 위해 이러는 것이어요!”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요란한 것이 여러 사람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문 앞에 있던 종복과 시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왔어요!”

    그 소리에 류명주는 꼭 몰이 당하는 토끼처럼 놀랐다. 그녀가 황제를 내실로 잡아끌었다.

    “여기 숨으시어요! 절대 소리를 내시면 아니 됩니다! 그리고 꼭 저들이 모두 떠난 뒤에 나오셔야 합니다. 공자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을 들키면 절대 안 되니,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공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인지, 류명주는 황제를 제 방에 있는 옷장 속에 숨기더니 밖으로 나갔다.

    속에서 열불이 난 황제는 그대로 옷장을 박차고 나가려다 잠깐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어떤 놈이 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황제는 아니지만, 황제와 진배없는 놈이 어떤 놈인지, 내 눈으로 확인할 것이야!’

    이윽고 옷장 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는 간드러졌고, 거만했다.

    “류 낭자, 준비는 끝났나?”

    멈칫했던 황제의 얼굴에 얼음 같은 미소가 피었다.

    ‘네놈이었구나! 네놈!’

    “공공,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류명주가 힘겹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명주가 어려운 마음에 술을 몇 잔 하였더니 치장이 흐트러졌습니다. 금방 정리를 하고 오겠습니다.”

    “이제야 눈치를 챙긴 모양이로구먼. 빨리빨리 움직이시게, 세자를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 않겠나!”

    ‘세자’란 두 글자에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황제가 옷장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갑자기 옷장 속에서 사내가 튀어나오자 몹시 놀란 강왕부의 내시가 격분해서는 고함을 질렀다.

    “이게 어찌 된 건가! 곧 세자를 모셔야 할 여인이 감히 방안에 정부(情夫)를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야!”

    “지금 누굴 보고 정부라 한 것이냐!”

    정부란 말에 드디어 머리 뚜껑이 완전히 열려버린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바로 옆방에 있던 호은이 후다닥 달려왔다.

    황제가 눈앞의 내시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감히 나를 모멸한 천한 것을 끌어내 곤장을 쳐라!”

    “알겠사옵니다!”

    그러자 좌측에 있던 어전시위가 달려 나와 강왕부의 내시를 붙들어 내리눌렀다.

    ‘호은’이란 말에 강왕부 내시는 혼이 달아나기 직전이었다. 강왕부 내시는 눈앞에 있는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간신히 시선을 모았다.

    ‘정부(情夫)가 아니라 인제 보니…….’

    혼비백산한 그의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폐, 폐, 폐하…….”

    온 방에 경악만이 가득 찼다.

    정부(情夫)를 잡으러 달려왔던 강왕부 시위들의 손발도 후들후들 떨렸다.

    ‘뭐, 뭐야. 저 사람이…… 황제 폐하?!’

    ‘이게 무슨 일이냐? 황제가 왜 여기 있어!?’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부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냉혹했다. 앞으로 나선 어전시위 수령이 신분패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폐하께서 행차하셨는데 감히 무릎을 꿇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저 신분패, 진짜 같은데……!’

    ‘아니야, 저건 진짜야!’

    “용서해주시옵소서,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소, 소인이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시가 애걸복걸 매달리면서 마지막 한 줄기 의심마저 날려버리자 강왕부의 시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는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저 뻔뻔한 것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슬쩍 주변 눈치를 살핀 호은은 이러다가 다른 손님들의 이목까지 끌까 봐 염려하여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듣지 못했느냐! 어서 강왕부로 돌아가 벌을 받거라!”

    호은이 이상한 소릴 하자 뭐라 하려던 황제의 눈에 호은이 급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제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호은이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 이곳은 궁 밖이지 않사옵니까.”

    ‘궁 밖이라……. 그러니 지금 이 분노를 참아야 한다, 그 말인가?’

    여전히 분이 끓는 황제의 노기 어린 눈빛이 앞에 있는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폐하’라는 말에 류명주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경악과 망연함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표정과 붉게 부어오른 눈은 황제의 분노를 재차 촉발했다.

    만약 자신이 이곳에 없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저를 향해 당당히 정부(情夫)라 외치던 꼴을 보니 평소 강왕부가 얼마나 권세를 부리며 패악을 떨었는지 알만했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기서 그대로 맞아 죽었을 터였다.

    ‘그리고 명주는 강왕부로 끌려갔겠지!’

    이러니 아무리 황친이라도 그와 척을 지면 화를 입게 되리란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황제는 아니지만, 그와 진배없다 없다 했던가?

    황제는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곧 그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말이 떨어졌다.

    “호은.”

    “네, 폐하.”

    “류 낭자와 입궁하겠다.”

    호은은 흠칫하며 규율에 어긋난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와 강왕부 사람들에게 시선을 준 그의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알겠사옵니다.”

    호은이 준비를 위해 방을 떠나고 황제는 제 손으로 류명주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리벙벙했던 류명주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손을 빼며 다시 무릎을 꿇으려 했다.

    “천첩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다시 붙드는 황제의 목소리가 따스했다.

    “몰랐으니 죄가 없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짐은 네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

    류명주가 감동한 듯 차오르는 격동을 애써 누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네, 폐하.”

    그러다 돌연 황송한 듯 말했다.

    “폐하, 어서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천첩의 신분으로는 입궁할 자격이 없사옵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지난번 그녀에게 자신을 따르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사실, 그녀를 속신하여 궁 밖에 있는 장원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왕부가 하는 짓을 보니 분노가 치솟았다.

    ‘명주가 기녀니 자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빼앗아 갈 수 있을 줄 알았겠지. 그리 나온다면 난 이 아이를 높은 자리로 올리겠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녀를 궁으로 들이는 것? 그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황제다. 천하 만민이 모두 제 백성이니, 신분의 고하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강왕부의 내시에게 시선을 돌린 황제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넌 돌아가 명주가 짐에게 먼저 화답했으니, 강왕부에 가긴 어렵겠노라고 전해라. 형님께 죄송하게 되었다고 말이야.”

    식은땀을 줄줄 쏟던 내시가 곧장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세자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었사옵니다! 제발 황은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황제가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괜찮다. 류 낭자가 짐의 눈에도 보기 좋더니, 형님의 눈에도 그리했구나. 역시 형제지간이라 보는 눈마저 비슷한가 보구나. 탓할 일은 아니다. 조금 전엔 짐이 마음이 앞서 과했던 게야. 그러나 네 행실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이 사람을 모셔가는 태도란 말이냐? 형님께서 네게 일을 시키셨을 텐데, 그러다 주변 사람들이 겁이라도 먹으면 어찌하려고?”

    “옳사옵니다! 모두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모두 소인의 죄이옵니다!”

    내시가 감히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황제가 여전히 차갑게 그를 보며 말했다.

    “다음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너로 인해 강왕부의 명성이 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네 가죽을 벗겨도 모자랄 것이다!”

    황제의 호령은 혹한의 폭풍처럼 매서웠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사옵니다!”

    곧이어 호은이 돌아와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폐하, 류 낭자의 인신계약을 정리하였습니다. 곧 다른 일도 마저 정리하겠사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류명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주는 짐을 정리해 짐과 함께 가지.”

    황제의 말에 놀란 류명주와 호은이 몸을 굳혔다.

    호은이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서 먼저 입궁하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소인이 정리를 끝내면 류 낭자를 모시고 입궁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러나 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자네는 천천히 준비하고 사람은 짐과 먼저 입궁해도 같은 게 아닌가.”

    갑자기 황제가 말을 하다말고 돌연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어차피 입궁하면 전부 바꿔야 할 테니 물건 역시 따로 챙길 필요 없겠어.”

    “폐하!”

    황제는 이미 류명주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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