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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04)화 (204/385)
  • 204화. 방법이 있어요

    류 부인이 떠나고 류명주는 바로 절계루의 주인장을 찾아가 말을 전했다.

    시비는 금방 돌아왔다.

    “주인장이 무슨 사정인지 알았으니,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으래요.”

    그러나 안심이 될 리가 없었다. 류명주가 불안한 마음으로 엉망이 된 제 모습을 정리하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류명주가 다급한 얼굴로 시비에게 말했다.

    “어서 가봐!”

    문을 열던 시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까딱까딱, 시비에게 좌우로 손가락을 흔든 지온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온을 본 류명주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소를 지은 지온이 인사를 건넸다.

    “류 낭자, 그동안 잘 지냈나요?”

    망을 보라며 시비를 문 쪽으로 보낸 류명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면 이미 제 사정을 뻔히 들으셨을 텐데, 굳이 놀리실 게 무엇이신지요.”

    지온이 미소를 거뒀다.

    “기분이 좋지 않을 걸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류 낭자.”

    지온이 예의 바르게 사과하자 류명주는 도리어 자신이 미안해졌다.

    자리를 잡고 앉은 지온이 본론부터 꺼냈다.

    “주인장에게 전달받았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 일은 해결하기 쉽지 않아요.”

    류명주는 못내 실망했다.

    ‘하긴, 그렇겠지.’

    소씨 집안이 그렇게 모욕적으로 나오는데 지온 소저가 한 일이라곤 자신을 찾아와 증언해 달라 부탁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 생각해봐도 그녀에게 힘 있는 뒷배가 없단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본인을 세자라 부르는 상대는 아무리 그래도 왕가 출신이 아니던가.

    “혹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잠시 입을 닫았던 지온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강왕부의 세자에요. 당금 황제 폐하의 친형이요.”

    “뭐라고요?”

    류명주는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강왕부…… 정말 방법이 없잖아.’

    도성 전체를 뒤져도 황제를 제외하고, 또 누가 강왕부에 힘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명주 언니, 어떡해요?”

    문 쪽에 있던 시비가 제 애가 달아 입을 열었다.

    “그 세자라는 분, 그냥 봐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언니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는데……. 순간 동한 마음에 언니를 들였다가 금방 모른 척이라도 하면 그때는…….”

    류명주가 조용히 읊조렸다.

    “내 팔자가 그러니, 그러려니 해야지.”

    웃음 팔아먹고 사는 기녀의 인생은 물 위를 떠다니는 부평초와 같은 것을.

    의협이란 이름으로 명성을 얻으면 남은 삶이 좀 더 쉽게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이게 내 운명이란 거겠지!’

    “아직 포기하지 말아요.”

    지온이 손에 든 찻잔을 가볍게 굴리며 입을 열었다.

    “날 도와서 증언해주면 류 낭자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조했잖아요. 낭자가 증언을 해줬으니, 이젠 내가 약조를 지킬 차례예요.”

    “방법이 있으시겠어요?”

    류명주가 믿지 못하겠단 눈빛으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이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강왕부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무소불위하진 않죠. 지금 류 낭자는 의협으로 명성을 쌓았어요. 그러니 지금 이 일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졌을 때 마음에 분노를 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럼 분명 낭자를 위해 나서는 사람도 나오겠지요. 우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림(仕林)에서 공론화가 될 수 있도록 바람을 잡아 주는 거예요. 그리된다면 강왕세자도 열에 여덟은 포기하게 될 거예요.”

    “소씨 가문을 처리한 방법과 비슷한 것 같은데…….”

    류명주의 중얼거림에 지온이 대답했다.

    “맞아요.”

    지온의 말이 뒤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계획에 결함이 있어요. 기녀를 데려가는 건 죄라 보지 않기 때문에 강왕세자는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더구나 강왕부는 소씨 가문과 비교도 안 되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일이 벌어진 후에 들어올 보복도 소씨 가문보다 더 강할 거예요. 그래서 류 낭자의 안전을 위해 일을 벌인 후, 류 낭자를 도성 밖으로 보낼 수밖에 없어요. 그곳에서 이름과 성을 버린 채 살아야 할 거예요.”

    류명주의 마음이 흔들리며 가느다란 욕심이 피어올랐다.

    이름과 성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의 이름으로 올라있는 기적(妓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니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신중히 고민한 그녀는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무척 크겠지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부와 완전히 척을 지는 것이니,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어요.”

    류명주가 다시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무모한 일 같습니다. 차라리 당분간 그를 모시면서 지내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나중에 제게 질리면 그때 다시 저를 자유롭게 놓아 달라 해도 되겠지요.”

    지온을 향한 류명주의 미소 속에는 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강단과 함께 기녀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 엿보였다.

    “명주는 기방에서 기녀로 자란 여인입니다. 정절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이런 날은 언젠가 반드시 올 것이었습니다. 그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이지요.”

    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류명주’라는 사람을 이해했다.

    정절을 지키고자 목숨마저 내어놓는 여인이 있다면, 그들과 달리 정절보다 제 목숨을 더 중히 여기는 그녀와 같은 이도 있는 것이다.

    강왕부와 척을 지는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그녀는 운명에 몸을 맡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평안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참 똑똑하고 현실적이야.’

    “류 낭자,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어요.”

    징, 손가락을 튕겨 찻잔을 울린 지온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계획대로 잘 흘러가 준다면, 아마 류 낭자는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거예요.”

    * * *

    황제가 남긴 증표는 당일 밤, 다시 황제의 손으로 돌아왔다.

    황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손으로 이리저리 옥패를 놀리던 황제가 평왕부에서 온 내시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평왕부 내시가 대답했다.

    “폐하, 폐하께서 떠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보내 옥패를 전해 왔사옵니다. 평왕세자께선 옥패를 받으시고 한시도 지체 않고 폐하께 전해드리라, 곧장 소인에게 명하셨사옵니다.”

    황제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전부란 말이냐? 다른 말은 더 없었느냐?”

    “그리고 전해달란 말도 있었사옵니다.”

    내시가 황급히 대답했다.

    “보낸 이가 명일 정오(正午)에 꼭 찾아주셨으면 한다, 했사옵니다. 그리고 시간을 꼭 지켜 달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늦는다고 했사옵니다.”

    황제가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무엇이 늦어진다는 것이야?’

    눈치를 보던 호은이 평왕부의 내시에게 물었다.

    “물건을 전한 자는 누구였느냐? 이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느냐?”

    내시가 대답했다.

    “종복으로 보였습니다. 크게 긴장을 한 것인지, 말도 덜덜 떨면서 했습니다.”

    평왕부의 내시는 평왕부의 명성에 겁을 집어먹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며 말을 전했다.

    황제가 손을 젓자 평왕부 내시를 돌려보낸 호은이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류 낭자에게 일이 생긴 듯하니 소인이 내일 다녀오겠습니다. 어떠하시옵니까?”

    건넨 증표가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되돌아온 것도 그렇고, 전해달란 말 역시 평소 같지 않았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짐이 직접 가겠다.”

    황제의 말에 호은이 펄쩍 뛰었다.

    “폐하, 내일은 조회(朝會)가 있사옵니다!”

    “오전 일찍 끝내면 갈 수 있지 않으냐?”

    “하오나…….”

    호은은 내심 생각했다.

    ‘조회가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러나 황제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내일 아침, 조회가 끝나면 곧바로 출궁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방법이 없었던 호은은 그대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어딘가 정신을 팔고 있던 류명주는 멍하니 비파만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 류명주를 보던 지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요, 마음이 안 잡혀요?”

    류명주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소저께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지온이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며칠 전엔 더 큰 일도 했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 그랬다.

    지난번엔 문무대신과 황제를 앞에 두고 언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엔 제 방에서, 그것도 평소에 자신이 잘하는 분야의 연기 한 번 하는 것뿐이었다.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되지!’

    심호흡을 하고 나자 류명주의 마음이 평안을 되찾았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 * *

    황제가 도착했을 때 류명주의 방에선 현을 뜯는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를 본 종복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였다.

    종복이 급히 방을 향해 소리쳤다.

    “요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평소보다 더 살가운 종복의 태도에, 황제는 평왕부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말을 전하러 찾아왔던 종복은 그가 남긴 주소의 위치가 평왕부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를 황친(皇親) 사람이라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것도…… 나름 재미로구나.’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며 황제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류명주가 일어나 그를 맞으러 올 때였다.

    시선 끝에 그녀가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스치자 황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류명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그녀는 특별히 치장에 공을 들인 모습이었다.

    유난히 화려하게 손질한 그녀의 머리엔 그 많은 머리 장식이 빠진 것 하나 없이 달려 있었다. 연분홍빛이 선연한 치마로 허리를 잡아 가냘픈 그녀의 몸 선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황제는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눈 끝 화장이 무언가에 눌려 번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울고 있었던 건가? 눈도 빨갛군.’

    “요 공자를 뵙습니다.”

    류명주는 그를 향해 밝게 웃었다. 그리곤 전과 다름없이 직접 차를 준비했다.

    두어 모금 차를 마신 황제가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려 할 때였다. 류명주가 비파를 들더니 미소와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명주가 새로운 곡을 조금 고쳐 보았는데, 들어봐 주실는지요?”

    그리곤 황제가 허락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곤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곡이었으나, 황제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만 가득했다.

    그는 류명주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서 왜 이리 슬픈 얼굴을 하는 것이야?’

    설마 자신이 황족이란 것을 알게 되어, 저를 힘으로 괴롭힐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지, 아니야. 류 낭자는 증표를 보낼 때까지 그곳이 평왕부인 줄 몰랐다.’

    더구나 전한 말 역시 너무 이상했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늦는다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엇이 늦어진다는 것인가?

    “명주…….”

    비파 연주를 멈춘 류명주가 웃었다.

    “잊을 뻔했습니다. 시간 맞춰 오시느라 식사를 하지 못하셨을 텐데……. 춘아, 어서 상을 올려줘.”

    대답을 한 시비가 방을 나갔다. 류명주가 다과를 들어 황제에게 권했다.

    “명주가 잘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이것으로 잠시 요기만 달래고 계시지요.”

    그리곤 수다를 떨 듯 입을 열었다.

    “많은 분이 절계루의 요리만 훌륭한 줄 아시지만, 실은 다과도 나쁘지 않습니다. 앵두를 달게 졸여낸 앵도전(櫻桃煎) 맛을 한 번 보시어요. 향이 다른 곳보다 더 좋지 않으신지요?”

    그러나 황제는 다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류명주가 집어주는 다과를 밀어냈다.

    “명주…….”

    “입에 맞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럼 다른 것으로 드셔보시지요. 이것은…….”

    “명주!”

    황제가 큰소리를 내자 그제야 손을 멈춘 류명주가 물끄러미 황제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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