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03)화 (203/385)
  • 203화. 그렇게 매력적이에요?

    류명주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 강왕세자의 시위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몹시 놀란 시비가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열었지만, 시위가 쳐서 먼저 혼절시켰다. 바들바들 떨던 류명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그녀의 목이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혔다.

    음침한 얼굴의 강왕세자가 또다시 고함을 쳤다.

    “말하래도!”

    류명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그가 손님으로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소씨 가문 사람인가?’

    문제가 될 줄 알았다, 그 일이 문제가 될 줄 알았어! 그런데도 지온 소저의 꾐에 넘어가 그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거 봐, 결국 이런 일을 당하게 됐잖아!’

    “고, 공자…….”

    “누가 네년이 입궁하여 증언하게끔 시켰는지, 물었을 텐데.”

    강왕세자의 얼굴이 음험했다.

    “그…….”

    류명주가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소저, 소저 하나가 찾아왔었습니다. 제 오라비가 갇혔다고 사정을 하는 통에 불쌍한 마음이 들어…….”

    류명주는 불쌍해서 증언해준 것이란 말 외에 다른 것은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억울하다 사정하는 이의 부탁 때문에 증언을 했을 뿐, 소씨 가문을 향한 복수심은 절대 아니라고 무조건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다.

    ‘소씨 가문을 향한 복수심이 아니야! 소씨 가문과는 어떤 관련도 없는 거라고!’

    호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저 호의!

    “지씨 가문의 소저였더냐?”

    강왕세자가 물었다.

    “저, 저는……. 소저의 성이 지씨였단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강왕세자의 고개가 한 번 끄덕여지자 류명주는 제 목을 쥐던 손에 힘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닥으로 쓰러진 류명주가 컥컥, 기침을 해댔다.

    강왕세자는 제 잔의 차를 버렸다. 그리곤 불쌍할 정도로 기침을 해대는 류명주를 향해 다시 잔을 채워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

    손을 파들파들 떨던 류명주가 건네는 차를 받아 마셨다. 차를 마시고서야 그녀는 다소 안정을 찾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류명주는 눈앞에 있는 이의 신분을 가늠하며 제가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아니, 이 사람은 소씨 가문에서 온 사람이 아니야.’

    그가 내보이는 기운이나 하는 행동들만 봐도 그는 소염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은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씨 가문은 뿌리가 얕은 집안이야. 그런 집안에서 저런 사람은 절대 나올 수 없어!’

    류명주는 그제야 내심 안도했다.

    ‘소씨 가문 사람만 아니면 된다. 내가 상황에 따라 응대만 잘하면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을 거야…….’

    옷장에 있던 지온은, 루안이 제 손을 너무 강하게 움켜쥐는 바람에 아픔을 느꼈다. 지온이 반항하듯 손을 비틀자 그제야 깨달은 듯 루안이 손에 힘을 풀었다.

    “류명주에게 다른 말도 했소?”

    제 귓가에 속삭이는 루안의 귀엣말에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어두워 그가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 그녀가 루안의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무어라 끼적이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황제가 있을 때조차 이 정도로 큰 압박을 느끼진 않았다. 황제가 있을 때보다 강왕세자가 있는 지금이 더 조심스러웠다. 괜히 목소리를 냈다가 자신들이 있는 것을 들킬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말해 보거라.”

    의자에 등을 기댄 강왕세자의 시선이 류명주의 전신을 휘돌았다.

    “분위기가 어땠는지부터 시작해서 당시 상황에 대해 전부 말해라. 빠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멈칫한 류명주가 대답했다.

    “벌써 시일이 꽤 지나 아주 세밀하게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럼 네가 기억하는 대로 말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서생들이 증인 확보를 위해 장락지를 찾았던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반적인 이야기를 간략하게 한 번 전한 그녀는 중요한 부분을 다시 짚어가며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 남장한 지온과 이미 만났었다는 것과 증언한 후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약조한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지온을 생각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자신 역시 사건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지온 소저와 자신이 사전에 일을 계획했다 오해하면 큰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씨 가문 소저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말이냐? 그 소저가 문제없으리라 말한 것을 믿고 황궁까지 찾아가 증언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류명주의 낮은 대답에 강왕세자는 침묵에 빠졌다.

    ‘전후 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강왕세자는 제 의심이 과했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세자비의 말에 수긍이 갔다.

    ‘지온이란 아이가 수를 쓰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라 했지. 집안에 들이면 딱 좋았을 아이라 하더니, 확실히…….’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대장공주가 수양딸로 들인 아이였다. 선대에 이미 원수를 진 집안인데 혼사 성사될 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젠 우리 집안에 혼인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가 차를 입에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강왕세자의 눈 끝자락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류명주가 꿰듯이 걸려들었다.

    막 험한 일을 당한 그녀의 옷깃은 다소 방만히 흐트러져 있었다.

    반쯤 갈무리 되었던 머리칼은 모두 풀려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로 후두두 쏟아진 채였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갈라진 틈으로 하얗게 윤기를 머금은 목선이 매끄러웠다. 반쯤 뭉개진 입술연지에, 혼란스레 흔들리는 눈빛을 가진 그녀는 우수(雨水)에 쓸린 해당화처럼 여렸다.

    유린이라도 당한 듯 상처 입은 그녀가 유별스레 아름답다 생각한 강왕세자는 절로 동하는 욕구를 느꼈다.

    ‘아직 청루 기녀라 했던가.’

    본래 제 욕구를 참는 이가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저 취하고 보는 이가 바로 강왕세자 아니던가.

    류명주가 분위기가 기묘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미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선수 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강왕세자가 우악스레 그녀를 붙들었다.

    그가 그녀를 내실로 끌고 들어가자 놀란 류명주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강왕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침상 위로 넘어뜨렸다. 그가 그녀의 옷을 찢으려 달려들자 류명주가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안됩니다, 공자! 저는 머리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저희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공자! 아니 됩니다!”

    강왕세자가 짜증스레 말했다.

    “네가 이미 머리를 올렸으면, 본 세자가 너를 취했겠느냐?”

    두 사람이 실랑이하듯 엉켜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왕세자는 앞을 지키는 제 시위가 소란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무엇보다 흥이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강왕세자는 흥이 식어버렸다.

    류명주를 놓아준 그가 어두운 얼굴로 내실 밖으로 나갔다.

    “누구냐!”

    ‘감히 본 세자의 흥을 깨다니! 제 무덤을 파러 왔구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갖가지 색들로 화려하게 치장한 요염한 여인이었다.

    안으로 발을 들인 여인이 강왕세자에게 예를 갖췄다.

    “공자를 뵙습니다. 류 부인이라 합니다.”

    강왕세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 허리끈을 동인 류명주가 내실 밖으로 나오다 그녀를 보곤 소리쳤다.

    “어머니!”

    당연히 친어미는 아니었고, 기녀가 기생 어멈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웃는 낯으로 들어온 류 부인이 강왕세자에게 차를 올리며 그를 설득하려 입을 뗐다.

    “명주를 어여삐 봐주시니 어미 된 이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곳에도 나름의 지켜야 하는 규율이 있으니 말입니다. 명주는 다섯 살 때부터 제가 정성으로 키운 아이입니다.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물론이고, 시문(詩文)과 예법까지 모두 최고의 선생을 모셔와 가르쳤지요. 작고 어렸던 명주가 이리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 되었으니 이 어미는 명주가 그저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

    강왕세자가 역정과 함께 그녀의 말을 툭 자르고 들어왔다.

    “몸값이 얼마인지 말해라.”

    그의 무례에도 류 부인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공자님, 명주의 머리를 올리는 일은 연회를 열어 손님들께 발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희의 규율인지라…….”

    한마디로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르는 이가 그녀의 머리를 올릴 수 있단 소리였다. 그러나 강왕세자는 류 부인과 더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무겁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군소리 말고, 하루 주지. 내일 데리러 오겠다.”

    대뜸 말을 던진 그는 종복을 밀치곤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공자님!”

    불러도 잡히지 않는 강왕세자 앞에, 류 부인은 무력했다.

    ‘대체 누구기에 이리 무도하게 구는 것이야!’

    그때, 강왕세자의 시종이 들어오더니 내던지듯 은표 몇 장을 던졌다. 그리곤 거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그저 세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비나 해놓으면 되네! 만약 제때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커험!”

    류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나리. 혹, 세자께서 어느 집안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내일이면 자연히 알게 될 터!”

    말을 던진 시종이 그대로 자리를 떠버리고, 류 부인은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대체 어느 왕가(王家)이기에 이리 횡포를 부리느냔 말이야!”

    모든 것을 지켜본 루안과 지온은 옷장을 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겨우 한나절 만에 일이 이렇게 커지다니…….

    황제가 류명주를 마음에 들어 한 것도 모자라, 무슨 이유에선지 강왕세자마저 갑자기 그녀를 원하고 나섰다.

    지온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류 낭자가 그렇게 끌리나요?”

    지온의 질문에 경계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루안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소. 난 그녀에게 끌리지 않으니 알 수 없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지온에게 물었다.

    “만약에 류 낭자를 뺏기게 생겼다는 것을 알면…… 그가 어떻게 나올 것 같소?”

    못된 생각이었다.

    말없이 차를 마시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증언을 해준다면 그녀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다고 류 낭자에게 약조했어요.”

    “흠…….”

    “직접 물어보죠. 류 낭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자고요.”

    * * *

    흐트러진 머리 그대로 류명주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류 부인이 그런 류명주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류명주의 목소리가 여상히 흘러나왔다.

    “우선 어느 왕가의 세자인지 알아보는 게 먼저겠지요.”

    그녀의 말속엔 정 안 될 것 같으면 이대로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속뜻이 숨어 있었다. 그 말에 안도한 류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리 걱정하고 있을 것 없어. 몰락한 집안에서 괜히 유세를 부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그럼 그자에게 겁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류명주는 지금이 전성기였다. 그녀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돈을 바리바리 바치고 있던가!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호시기였으니, 돈 열리는 금전수(金錢樹)인 류명주를 떠나보내는 것은 류 부인에게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밉보여선 안 되는 이라면, 아쉬움을 가지는 것보단 빠르게 류명주를 포기하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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