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02)화 (202/385)
  • 202화. 하나를 보내니 또 다른 하나가

    루안의 행동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던 지온이 애써 수습을 하곤 낮은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난번에 옥비에게 조금이지만 저를 드러냈던 것은, 옥비를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미 서체까지 바꿔가며 이런 상황을 대비까지 해두지 않았던가. 더 나아가 걸음걸이나 몸짓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 지온의 몸으로 깨어난 그때, 자신은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루안의 마음을 제대로 다독였는지는 고사하고, 지온은 귀가 뜨겁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급히 그를 밀어낸 지온이 루안을 향해 눈을 홉떴다.

    ‘어디서 이런 못된 것만 배워서는!’

    하지만 사위가 너무 어두운 나머지 그녀가 두 눈을 부릅떠봤자 이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지온에게 밀려난 루안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류명주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그녀에게 물었다.

    “계속 이리 지낼 생각이냐?”

    미소와 함께 류명주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생각해본 적 없냐 물었다.”

    류명주가 멈칫했다.

    같은 질문을 한 이가 없지 않았다. 저 질문이 대부분 속신(贖身)을 암시하는 말이란 것을 류명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온이 했던 당부를 떠올린 류명주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명주의 이런 신분은 공자님을 곤란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돌리는 법을 모르는 듯했다.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류명주가 몹시 놀랐다. 그리고 루안과 지온은 경악했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설마 류 낭자를 궁으로 데려가겠다는 건가? 하지만 류 낭자는 기녀가 아닌가!

    ‘황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다른 고민은 할 필요 없다. 나를 따르고픈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대답하면 된다.”

    황제의 말에 류명주가 고개를 떨궜다.

    보고 있던 루안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지온에게 속삭였다.

    “설마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예요.”

    지온의 대답에 루안이 되물었다.

    “확신하오?”

    “네. 류 낭자에게 따로 당부해둔 게 있거든요.”

    그녀와 몇 번 만나며, 지온은 류 낭자가 가볍게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지.’

    그녀는 오히려 늘 자신의 신분을 되새김질하며 스스로가 위험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되도록 피하고 보는 아주 신중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마침 증인으로 나서준 류명주가 고마워서 일부러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도 전해둔 참이었다. 속신을 해주겠단 사람이 나타나도 당분간은 허락하지 말라 해두었던 것이다.

    ‘제 안전을 위해서라도 류 낭자는 허락하지 않을 거야.’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류명주가 황제를 향해 곱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요 공자님. 하지만 명주는 공자의 말씀에 따를 수 없습니다.”

    황제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날 따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다른 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마음을 풀어줘야 하는 일도 그만둘 수 있을 텐데, 이 편이 더 자유롭지 않겠느냐? 혹시 내가 싫은 것이냐?”

    그러자 류명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황제를 우러러보는 마음이 가득했다.

    “명주는 기녀입니다. 기녀에게 손님을 거절할 자격이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지식이 미천한 무뢰한이 찾아올지라도 모실 수밖에 없는 것이 저와 같은 기녀입니다. 그런데 고매한 인품을 가지신 공자를, 명주가 바라마지는 못할망정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지요? 하오나…….”

    “하오나, 무엇이냐?”

    그동안 거절을 당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황제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작은 탄식과 함께 류명주가 슬그머니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명주가 공자를 따른다면, 명주의 마음과 눈은 오직 공자 한 분만을 담게 되겠지요. 그러다 공자께서 다른 처첩들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명주의 마음엔 질투가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오랜 시간이 흘러가면 어찌 되겠는지요. 진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에도 어둡게 그림자가 질 것이고, 제 용모도 빛없이 흐려지겠지요……. 그리고 끝내는 오늘처럼 즐겁고 기쁜 날은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명주는……. 그러니 지금이 좋습니다, 공자. 공자께서 명주를 이리 찾아주시어 명주는 행복합니다.”

    조곤조곤 말하는 류명주의 눈에 아련함이 비쳤다. 제 신세에 대한 처연한 슬픔이 그녀의 신색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내렸다.

    이런 모습의 여인을 본 일이 없었던 황제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궁에 있는 옥비가 떠올랐다.

    ‘지금 옥비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은가?’

    현비의 자작극 사건으로 옥비가 받은 피해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자신에게 보내오는 원망 섞인 눈빛을 그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니 역시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게야. 그러니 처음의 그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넌 내가 안심이 안 된다. 혹여 예를 모르는 것들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류명주가 마음 놓으라는 듯 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공자. 절계루를 찾는 손님 대다수가 체면을 소중히 챙기십니다. 혹여 그리 무뢰한 이가 한, 둘 있어도 명주가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황제는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도 모셔야 한다니!’

    그러나 황제는 제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류명주가 살랑살랑, 부드럽게 설득을 계속하자 황제는 우선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나름의 절충안을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짐……. 이렇게 하지. 증표를 남기고 가겠다. 혹 네 생각이 바뀌거든 내게 사람을 보내 전해주거라.”

    그리곤 붓을 들어 어딘가의 주소를 적었다.

    옷장 속에서 지켜보던 지온의 손이 황제를 따라 가볍게 움직이자 루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평왕부(平王府)로군.”

    강왕부가 아닌 평왕부의 주소를 남긴 황제는 류명주와 좀 더 말을 섞다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제가 떠나고 뽀르르 나타난 시비가 오밀조밀,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된 옥패를 보곤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엄청 예쁜 옥이네요!”

    그러나 시비와 달리 류명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넣어 둬.”

    삐죽 입술을 내밀며 명주를 흘끔거린 시비가 아까운 듯 입을 열었다.

    “안 하시게요? 이런 색을 내는 옥은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요!”

    류명주가 고개를 저었다.

    “둘도 없이 아름답다 한들 그게 다 무어라고. 사용하면 그게 다 빚으로 돌아오는 것을.”

    시비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류명주는 다른 말 없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난 좀 쉬어야겠으니 이제 손님은 그만 받아.”

    “네.

    * * *

    옷장에 있던 기관을 닫은 루안이 밖으로 나왔다.

    지온이 물었다.

    “평왕세손과 그가 막역한 사이였나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평왕세손과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 좋을 수가 없소. 평왕부에 일을 맡긴 것은 평왕세손이 아닌 평왕세자 때문일 거요.”

    지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왕세자와 황제의 나이 차이가 상당할 텐데? 어떻게 두 사람이 친할 수가 있지?’

    루안이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려 입을 열었다.

    “황제의 아들로 입적할 때 종정(宗正)이 필요하지. 그때 종정으로 나선 이가 평왕(平王)이 아닌, 평왕세자였던 것이오.”

    그제야 지온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황이 병으로 쓰러진 후 의안왕을 입적할 때 종친(宗親)으로 나섰던 이가 평왕세자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강왕부에서 평왕세자를 매수해 의안왕을 황제로 올렸다는 말이었다.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황제와 평왕부 사이는 여타 종친들과 비교하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평왕부에 언질만 주면 평왕부는 빈틈없이 준비할 터였다.

    루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둑해져 가는 하늘을 보던 루안은 지온과 놀잇배를 타고 경치 구경을 하러 갈까 고민했다.

    그때 급하게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공자! 공자님!”

    “무슨 일이냐?”

    안으로 들어오는 한등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왕세자가 찾아왔습니다.”

    루안이 멈칫했다.

    “오자마자 류명주를 지목하며 찾았습니다. 문 앞 종복이 오늘은 더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입니다.”

    지온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도 가지 않고 황당하기만 했다.

    “그자가 어떻게 왔지? 설마 그를 따라서 온 건가?”

    한등은 대답하지 못했다.

    금군통령이 강왕부 쪽으로 붙은 이가 아닌가? 그러니 강왕세자가 황제의 행적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살펴보는 것이 좋겠군.”

    루안이 다시 벽에 걸린 그림을 옆으로 치웠다.

    두 사람은 또다시 옷장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화장도 미처 끝내지 못한 류명주가 분주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다.

    “명주가 인사 올립니다.”

    강왕세자의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미처 단장을 끝내지 못해 다소 흐트러진 모습의 그녀는 머리도 반쯤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런 명주가 나름 운치 있다고 생각했는지 강왕세자의 얼굴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창공만큼이나 높을 수 있는 것이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사내의 인내가 아니던가.

    “네가 류명주인 것이냐?”

    자리에 앉으며 강왕세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류명주가 직접 그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잠시 앉아 계시면, 명주가 마저 단장을 마치고 오겠습니다.”

    “됐다.”

    강왕세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훌륭하구나.”

    손님이 그렇다는데, 류명주가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류명주가 그에게 듣고 싶은 곡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강왕세자가 노래나 듣자고 이곳을 찾았겠는가?

    그가 말했다.

    “대화나 하자꾸나.”

    “네.”

    류명주가 마지못해 비파를 내려놓았다.

    찻잔을 손에 든 강왕세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뭔가는 가늠하는 듯 그녀를 살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류명주는 소름이 끼쳤다.

    ‘뭘 잘못 먹었나, 무슨 눈빛이!’

    저를 살피는 시선이 미녀의 용모를 바라보는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범죄자를 살피는 눈이라 해야 옳았다.

    드디어 강왕세자의 입이 열렸다.

    “듣자 하니, 얼마 전 입궁을 했었다지?”

    ‘뭐야, 그 일 때문이었어?’

    순간 류명주의 마음이 풀어졌다.

    그녀가 입궁하여 증언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황궁은 어떠한지, 황제는 또 어떤 분이셨는지 많은 이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어왔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만…….”

    강왕세자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찌 입궁까지 해가며 증언을 했지?”

    류명주가 멈칫했다.

    “증언한 자네를 소씨 가문에서 어떻게 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두렵지도 않았나?”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류명주가 답변을 고심하고 조심하며 대답했다.

    “도의를 생각하니, 명주는 다른 것을 고려하기 어려웠습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강왕세자의 입에서 비웃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네더러 입궁하여 증언해 달라 부탁한 이가 있었겠지. 아니 그런가?”

    옷장 속 지온은 제 손을 더욱 움켜쥐는 강한 힘을 느꼈다.

    루안의 얼굴이 깊은 호수처럼 침전했다.

    ‘강왕세자는 황제를 위해 온 것이 아니야. 저자는 소달의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다.’

    그는 무엇을 알아냈을까?

    “그렇습니다.”

    머뭇거리던 류명주가 대답했다.

    “네게 입궁해 증언하라 한 자가 누구냐?”

    찻잔을 내려놓은 강왕세자의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말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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