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01)화 (201/385)
  • 201화. 또 궁을 나갔소

    “옥비가 진짜 ‘옥종화’였다면 그가 그렇게 행동했을까?”

    루안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러지 않았을 것이오. 그녀를 믿었을 테니, 분명 그 자리에서 바로 깨끗하게 누명을 벗겼겠지.”

    그러나 황제의 결정은 궁으로 돌아가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궁에 돌아가면 더더욱 누명을 벗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그랬다.

    지온이 쓰게 웃었다.

    “그녀가 진짜는 될 수 없단 걸 그도 알아버린 거예요.”

    현비가 저지른 바보짓의 불똥이 다른 곳에 튀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황제의 마음에 의심이란 씨앗이 심긴 그때, 옥비를 향한 황제의 눈에 씌워져 있던 ‘옥종화’란 껍데기를 불똥이 살라버린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한 번 떠올린 것만으로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영원히 알지 못했어야 유지할 수 있는 관계도 있는 법이다.

    루안이 지온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술을 뗐다.

    “마성(魔性)이로군.”

    지온이 눈썹을 튕겨 올렸다.

    “뭐라고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은 그가 시선을 모로 틀었다.

    “당신 탓이니까. 마성 넘치는 당신 탓.”

    지온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손을 쥔 루안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가 그토록 원해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실은 내 곁에 있단 생각을 할 때마다 얼마나 상쾌한 기분이 드는지…….”

    “날아갈 것 같죠?”

    “그렇소, 하늘 끝으로 날아갈 것 같소.”

    * * *

    밤이 되기 전에 황제는 궁으로 돌아왔다.

    황후와 함께 식사를 한 그는 승원궁으로 돌아와 정무를 보고 있었다.

    해시 초(亥時 初)가 막 지났을 무렵, 승원궁 밖에서 음성이 울렸다.

    “옥비마마를 뵙습니다.”

    가마에서 내린 옥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본궁이 폐하를 위해 선방(膳房)에 야식을 준비하라 일러 가져왔네.”

    그녀가 이리 찾아왔을 때, 이전이라면 호은은 보고도 올리지 않고 바로 안으로 모셨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 그녀를 맞이한 것은 호은의 공손한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마마. 하오나 폐하께선 지금 정무로 몹시 바쁘시옵니다. 야식은 소인이 잠시 후에 가져다 드리겠사옵니다.”

    호은의 대답에 멈칫한 옥비가 말했다.

    “본궁은 지금 바로 들고 들어갔으면 싶은데.”

    허리를 깊게 숙인 호은이 조금 전보다 더욱 공손히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하오나 폐하께서 보셔야 할 상소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말씀하시어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본궁도 아니 된단 말인가?”

    호은이 말없이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이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본궁은 예서 기다리겠네.”

    거듭된 권유에도 그녀가 계속 남아있겠다 고집을 부리자 호은도 도리가 없어 입을 열었다.

    “마마, 이곳은 바람이 찹니다. 옆에 있는 편전에서 기다리시지요.”

    옥비는 불안했다.

    아침에 황제가 떠난 후로 그녀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황제의 속내를 살피기 위해 야식을 핑계 삼아 찾아왔지만 이렇게 보지도 못하게 앞을 막아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괴롭혔다.

    * * *

    한참을 앉아있다 보니 어느덧 해시(亥時)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편전 밖으로 나오던 그녀는 막 승원궁 밖으로 나오는 호은을 보곤 급히 그를 부르며 다가섰다.

    “폐하께서는…….”

    호은의 얼굴에 송구한 표정이 가득 떠올랐다.

    “마마, 폐하께선 막 쉬러 들어가셨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인이 마마를 찾아뵈려던 참이었사온데, 마마께서도 그만 돌아가 쉬시지요.”

    옥비는 멍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제 처지가 들고 온 야식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바람을 맞더니 식어버렸구나. 차갑게 식은 게야.’

    * * *

    연회가 끝났다.

    주루 밖으로 나온 강왕세자에게 종복이 다가와 물었다.

    “세자, 장원으로 돌아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강왕세자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마음을 바꾸었다.

    “바람을 쐬어야겠다.”

    “알겠습니다.”

    따그닥따그닥 길을 따라 정처 없이 움직이는 마차로 바람이 불어 들었다.

    마차에 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강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장락지인 것이냐?”

    “네, 세자.”

    종복이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주루가 장락지 근처였습니다.”

    장락지를 보자 며칠 전 궁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강왕세자가 지나가듯 물었다.

    “궁에서 증언했던 기녀 이름이 무엇이었지?”

    “류명주라 합니다. 이달의 화괴낭자이지요.”

    종복의 대답에 강왕세자가 마주 답했다.

    “가서 그 기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거라.”

    “네, 세자.”

    * * *

    류명주의 명성이 워낙 커진 터라 손님 자리는 이미 예전에 만석이었다.

    강왕세자가 제 신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방도가 없었던 종복이 그대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기녀 하나 만나려는 것뿐인데, 그것이 어렵다?”

    황당해하는 강왕세자에게 종복이 물었다.

    “소인이 지금이라도 가서 세자 전하의 신분을 전해볼까요?”

    그러나 강왕세자는 흥미가 식어버렸다.

    “기녀 하나에 무슨 내 신분까지. 돌아가자!”

    어차피 잠시 흥미가 동했을 뿐인 것을…….

    강왕세자가 다시 이 일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며칠이 흐른 뒤였다.

    * * *

    난택산방에서 돌아온 지온은 쪽지 하나를 전해 받았다.

    쪽지를 본 지온은 곧장 다른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방궁을 나섰다. 다관(茶館)의 후원을 지나 밖으로 나온 지온이 멈춰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 있던 루안이 손에 들었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들어오는 지온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이렇게 변장까지 시키고.”

    작게 불평하는 지온의 모습을 루안이 천천히 훑어 내렸다.

    ‘남장을 몇 번 하더니 점점 더 그럴듯해지는군.’

    “기녀와 주안상을 들어야 하니 당연히 변장을 해야지.”

    “네에?”

    뜬금없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온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 출발한 마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두 사람이 내린 곳은 절계루 앞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곧 사람이 나와 둘을 조용한 별실로 안내했다.

    루안이 별실의 창을 열자 은은한 음악 소리가 창을 타고 밀려들었다.

    들려오는 음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온이 루안에게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류명주?”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지온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가 또 궁을 나갔소.”

    그제야 이해한 지온이 조용히 물었다.

    “그가 여기로 올 거라 생각하는 거죠?”

    웃음과 함께 루안이 대답했다.

    “여기 말고 그가 또 갈만한 곳이 있을지, 나는 모르겠군.”

    황제는 제 신분을 감추고 움직이는 암행에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출궁에도 그는 곧장 장락지로 향했고 다른 곳은 들리지도 않았다.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요 며칠 계속 침수를 승원궁에서 들었소.”

    지온이 흠칫 놀랐다.

    이는 며칠 동안 옥비를 만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

    “영수궁에서 야식을 준비해 찾아갔는데도 만나지 않았소.”

    그 일은 이미 궁 전체에 퍼져 황후부터, 얼굴 반반한 아랫것들까지 다들 옥비가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옥비가 입궁한 이후, 그가 그녀에게 이리 오래 차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다른 이를 찾아간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마음이 떠난 걸까요?”

    의안왕이었을 때도 그는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옥종화에게 연모의 마음을 품은 후로 그는 언제나 그녀를 그리워했다. 옥비를 ‘옥종화’로 만들어 살게 한 지난 3년, 그는 3년을 하루처럼 옥비를 아끼며 귀애하지 않았던가.

    지금 황제가 옥비에게 냉담해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녕 류명주 때문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류 낭자 앞길에 꽃 비단길이 펼쳐지겠지.’

    그때, 누군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루안의 말에 문을 연 점소이 모습을 한 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다.”

    대상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곧 손을 뻗어 그림이 걸린 벽의 한 지점을 꾹 눌렀다. 그러자 그림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더니 그림 뒤에 있던 옷장이 드러났다.

    장락지에서 두 사람이 숨어들었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옷장이었다. 작은 방이 무색할 만큼 큰 옷장 안엔 등자(櫈子)도 놓여 있었다.

    지온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루안이 어딘가를 툭툭 건들자 나무판자가 펼쳐졌다. 나무판자엔 촘촘한 바늘구멍이 뚫려있었다.

    옷장 밖으로 비파를 연주하는 류명주가 보였다.

    비파를 연주하던 류명주에게 종복이 찾아와 말을 전하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류명주가 제 옷차림을 다시 정돈했다.

    이윽고 방으로 황제가 들어오자 그녀가 쪼르르, 나아가 그를 맞았다.

    “요 공자를 뵙습니다.”

    몸을 낮춰 예를 갖추려는 그녀를 웃는 낯의 황제가 붙들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이 바빠 어렵게 몸을 뺐다. 그런데 갑자기 너의 노래가 떠올라 찾아왔는데, 내가 곤란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류명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곤란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공자께서 찾아주시는 것이 명주에겐 영광이지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류명주가 주안상을 올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가 거절하며 말했다.

    “주안상은 되었고, 차면 충분해.”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을 할까. 류명주는 금방 그를 위해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옷장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루안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지온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가 지온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설마 당신이 가르친 것은 아니오?”

    놀란 것은 지온도 마찬가지였다.

    ‘류 낭자에게서 내 모습을 볼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마 본인이 알아서 보고 따라 한 것 같은데 그게 이렇게 얻어걸리네요.”

    루안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정신을 차린 건가 했더니, 다른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로군.”

    말없이 조용하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렸다고 봐도 되죠. 몸짓에 비슷한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류명주’는 ‘류명주’니까요.”

    황궁에 있는 옥비는 완벽한 옥종화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옥종화의 외모와 움직임, 말투까지 모든 것을 마치 그림자라도 된 것마냥 따라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녀는 옥종화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흉내를 낸다 해도 영혼을 가지지 못한 존재는 그저 텅 빈 그림자일 뿐이니…….

    그러나 류명주는 달랐다.

    그녀는 누군가와 같아지려고 애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한 지온의 몸짓을 따라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어느 한구석이 옥종화와 비슷할 수는 있다. 그러나 류명주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틀림없는 류명주인 것이다.

    황제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영혼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를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거야. 이제 생생히 살아있는 이를 원하게 된 거야.’

    그렇지 않겠는가.

    가슴이 떨리도록 찬란한 웃음을 짓는 미인과 텅 빈 그림자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테니…….

    돌연 몸이 조이는 느낌에 지온이 고개를 돌렸다. 루안이 그녀를 꽉 붙들고 있었다. 

    갑자기 지난번 옷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지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며 읊조렸다.

    “이상한 짓 하지 마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간 루안이 속살거렸다.

    “이렇게 하면 대화하기 편할 것 같아 그런 것인데……. 더 깊은 생각까지 했나보오, 당신.”

    ‘그, 그런 거야?’

    붕 뜬 기분에 지온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잘근, 그녀의 귀를 약하게 문 루안이 어딘지 질투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앞으로 그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겠소. 저자는 더는 예전의 그가 아니야…….”

    옥비에게 온 마음을 사로잡혔던 황제는 다른 여인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류명주에게서 옥종화의 편린(片鱗)을 발견한 후 옥비에게 차가워지지 않았던가.

    그에게 옥비는 더 옥종화가 아니란 의미였다.

    그런데 만약 또 다른 이에게서 옥종화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어찌 될까?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루안은 아무리 작은 위험부담일지언정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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