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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00)화 (200/385)
  • 200화. 소식

    곧바로 사람을 시켜 알아본 호은이 황제를 절계루로 모시며 말했다.

    “류 낭자는 이달의 화괴낭자로, 본래 호숫가에 있는 배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의협심의 발로로 행한 일이 그녀의 명성을 크게 키워, 그녀가 머무는 화방 주변으로 몰려드는 배들 때문에 뱃길이 막힐 정도였다 하옵니다.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자 류 낭자는 절계루로 몸을 옮겼는데, 다행히 그곳의 환경이 나쁘지 않다고 하옵니다.”

    황제를 모시고 절계루로 들어온 호은은 주인장을 향해 류명주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장은 공손한 태도로, 류명주는 절계루에 잠시 적을 두고 있을 뿐이라 다른 부분은 자신도 알지 못한다며 그녀와 만나려면 직접 찾아가 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주인장의 대답에 호은은 직접 그녀가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그때 류명주는 방에서 비파를 뜯고 있었다.

    유명세는 또 다른 괴로운 문제들을 불러왔다. 벌써 며칠째 밖으로 나가지 못한 그녀는 몹시 답답하고 심심했다.

    그때 문밖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명주 낭자가 안에 있는가?”

    문 앞을 지키던 종복이 대답했다.

    “예. 여기 계시긴 하온데, 낭자께선 잠시 손님을 받지 않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손님을 받지 않는단 말인가?”

    몹시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내 주인 공자께서 주는 첫 만남 선물이네.”

    첫 만남 선물이 아주 귀한 것이었던지, 종복의 목소리에 애석함이 짙게 깔렸다.

    “귀한 분께서 찾아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은 낭자께서 피곤하셔서 쉬는 중이시니 좀 더 늦은 시간에 다시 한번 찾아주십시오.”

    “자네들…….”

    류명주는 찾아온 손님의 목소리가 다소 간드러진다고 생각했다. 사내도 여인도 아닌 듯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 찰나, 류명주는 돌연 며칠 전 입궁했던 때가 떠올랐다.

    번뜩!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치고 지나간 류명주가 제 옆에 있던 시비를 향해 말했다.

    “손님을 모셔와.”

    대답한 시비가 밖으로 류명주의 말을 전하자 호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류명주란 기녀가 이달의 화괴낭자라더니, 역시 뭘 좀 아는구먼!’

    얼마 지나지 않아 호은은 황제를 안으로 모실 수 있었다.

    비파를 내려놓은 류명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를 뵙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은은 눈치 좋게 자리를 비켜 밖으로 나갔다.

    “앉으시지요, 공자.”

    류명주가 부드럽게 물었다.

    “어떤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무거나 좋네.”

    류명주는 그대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말없이 차를 우려내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류명주가 차를 우려낼수록, 처음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던 황제의 두 눈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끝내 황제는 못 박힌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류명주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듯 그를 불렀다.

    “공자님……?”

    “…아무것도 아니네.”

    그녀가 건네는 찻잔을 건네받은 황제가 어렵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그래도 이렇게 뚫어질 듯이 볼 정도의 실수는 아니지 않아?’

    지온 소저와 만났던 그 날, 차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던 류명주는 일부러 눈여겨 봐두었다가 지온의 동작을 비슷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공자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마음을 가라앉힌 류명주가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입궁했던 그 날, 그녀는 주변을 엉성히 살피기만 했을 뿐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때문에 류명주는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저 귀에 익다고만 느끼고 있었다. 다만 호은의 음성이 평범한 이들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보니, 눈앞에 있는 공자의 신분이 아마도 꽤 높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가끔 지체 높은 가문의 장원을 방문해 기예를 선보이곤 했었잖아. 어쩌면 그때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옆에 내시를 데리고 다니는 이가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밉보이는 일은 결코 없어야 했다.

    “요씨 성을 가지고 있네.”

    ‘그럼 그렇지!’

    요씨, 당금의 국성(國姓)!

    그가 황족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재차 정신을 바짝 차리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차에 관한 이야기로 응대를 시작한 그녀는 음악에 대해 말을 나누다 장락지에서 볼 수 있는 절경들과 이름난 주전부리 집들을 소개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황제가 그동안 이런 여인을 만나본 일이 있었겠는가?

    황후나 신비가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명문가의 천금 같은 여식으로 자라온 터라 아무리 살갑게 대화를 한다 해도 손님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대화를 이끄는 류명주에 비하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 황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옥종화는 류명주와 성격은 전혀 달랐지만, 그녀도 류명주만큼이나 온갖 주제를 가지고 나누는 신변잡기식 대화에 능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그날 저녁 찬거리까지 변화무쌍한 주제로 끝없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런 대화를 할 때마다 훈둔이 먹고 싶다며 금벽을 찾았었지…….’

    금벽.

    갑자기 떠오른 이름에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모습을 본 류명주가 하던 말을 멈추고 웃으며 물었다.

    “비파를 연주해드리고 싶은데, 어떠하신지요? 새로운 곡을 배워 꽤 오랜 시간 연습을 하였습니다. 다른 분께 들려드리는 것은 처음이지요.”

    곧 마음을 추스른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놓았던 비파를 든 류명주가 창가로 옮겨 앉아 다소곳이 연주를 시작했다.

    느리게 울리는 비파 선율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실렸다.

    옥종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이 황제의 마음을 유난히 평온하게 만들었다.

    ‘달라야지. 본래가 다른 사람이니 달라야 옳지.’

    그러나 그녀와 다른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와 비슷한 그림자를 가진 류명주를 바라보며 그는 더없이 커다란 그리움을 느꼈다.

    * * *

    다음 날, 지씨 가문을 찾은 지온을 삼남가에서 살뜰하게 맞았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그래도 과거에 오른 이라고 관원들이 함부로 손을 쓰진 않은 것 같더구나.”

    장씨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잠을 설치고, 먹는 것이 부실해서 그랬는지 반쪽이 되긴 했어.”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 이미 제 모습을 되찾은 지 오래인 지장이 웃음을 지었다.

    “며칠이나 들어가 있었다고, 제 어디가 마른 것 같습니까, 어머니? 노파심이 과하세요!”

    지온이 지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튼튼해 보이시는걸요? 걱정은 그만 내려놓으셔도 되겠어요, 작은 숙모.”

    “그렇지?”

    기분이 좋은 듯 지온에게 맞장구를 친 지장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지온아, 너 정말 대단하다. 난 이번에 꼼짝없이 당할 줄 알았거든.”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전 그냥 의견만 전달한 것뿐이에요. 오라버니를 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대희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네 숙부가 벌써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하고 왔다.”

    장씨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유씨 가문에서도 적잖이 힘을 써줬잖니.”

    “네, 그랬지요.”

    장씨 부인의 말에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라버니는 며칠 푹 쉬고 다시 학업에 전념하세요.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 오라버니. 한 번은 소년의 혈기라 생각해주겠지만, 그것이 두 번이 되면 모두가 오라버니를 멀리하게 될 거예요.”

    지장은 지온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좋게 말해 동창들의 의협심을 드러낸 이 일은, 반대로 말하자면 머릿수로 밀어붙인 난동으로 나쁘게 언급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장은 지온이 하는 충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삼남가에서는 성의 가득한 선물을 지온에게 전했고, 그녀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조방궁으로 돌아가기 전, 지온은 큰부인 정씨에게 인사를 여쭈려고 희화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지온은 정씨가 고뿔에 걸려 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온은 정씨에게 안부를 물어 그녀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희화원에서 발길을 돌렸다.

    * * *

    희화원을 떠난 지온은 곧장 조방궁을 향하지 않고 루안과 만나던 주전부리 점포로 걸음을 돌렸다.

    다실(茶室)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금방 다실에 모습을 드러낸 루안과 지온은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온이 말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무엇이오?”

    “제 새어머니인 지씨 집안의 큰부인 정씨 아시죠? 새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주세요. 새어머니 집안의 형제들도요. 화정교(華亭橋)쪽에서 붓과 먹을 파는 점포를 하고 있어요.”

    지온의 말에 루안이 물었다.

    “그 집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오?”

    지온이 미간을 좁혔다.

    “새어머니는 제게 고뿔에 걸렸다고 하셨는데 슬쩍 새어머니의 맥을 잡으니 고뿔이 아니었어요. 외상에 의한 과다출혈이 있었더라고요.”

    장원 깊은 곳에 거하는 부인이 외상에 의한 출혈로 드러눕다니?

    남편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제 집안의 주인 노릇을 하는 터라 그녀가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했을 리도 없었다.

    루안은 확실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사람을 보내 그 집안에 대해 알아보라 하겠소.”

    “고마워요.”

    중요한 이야기를 끝내자 루안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손을 내어 지온의 손을 잡으려던 그때, 밖에서 한등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님,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한등이 얼마나 눈치 빠르고 영민한 녀석인지는 루안이 더 잘 알지 않던가? 지온과 단둘이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한등이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찾아와 방해할 리 없었다.

    루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한등은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의 기색부터 빠르게 살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 화가 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한등은 곧 보고를 시작했다.

    “절계루에서 전한 소식입니다. 높은 분께서 찾아왔다 합니다.”

    “높은 분?”

    한등이 미간에 주름을 잡는 루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하늘을 가리켰다.

    “그분이 출궁하셨다고?”

    루안이 경악하며 말했다.

    “뭘 하러 간 거지?”

    “류명주 낭자를 찾아온 것이라 했다 합니다.”

    “류명주?”

    한등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안과 지온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부딪쳤다.

    “오후 내내 머물렀고, 머무르는 동안 가끔 음악 소리가 들렸다 합니다. 그리고 유시(酉時)가 되어서야 떠났다고 절계루에서 전해왔습니다.”

    보고를 마친 한등이 물러갔다.

    방안엔 한동안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상한 일이로군.”

    루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궁에 있는 그리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 중 누구도 그의 마음을 붙들어 놓지 못하는 것인가.”

    그 많은 아름다운 여인 안에는 황후와 비가 포함되었다. 황제는 매달 그녀들을 정해진 횟수만큼 찾아가 동침해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늘 잠만 자고 바로 떠났다. 그곳에 남아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는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전과 달리 지금은 황제가 황후에게 잘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비의 일로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다. 황후의 가문인 심씨 가문을 들어 완씨 가문을 누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임시방편일 뿐인 것이다.

    “지겨워진 걸까요?”

    지온이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가 속으로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니까요.”

    “어쩌면 드디어 가짜는 가짜일 수밖에 없단 것을 깨달은 것일지도 모르지.”

    루안의 말이었다.

    “지난번 조방궁에서도 다소 달라진 모습을 보였소. 현비가 작정하고 옥비에게 누명을 씌우긴 했소. 하지만 옥비에 대한 그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오.”

    지온은 당시 황제가 보였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옥비를 보호할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완전히 믿는 모습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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