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9)화 (199/385)
  • 199화. 더는 날 좋아하지 않으신다!

    차가 준비되고 방에 있던 이들이 모두 떠나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가 외투를 벗었다. 외투 밖으로 불쑥, 강왕세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옵니까?”

    소달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자리에 앉은 강왕세자가 찻잔을 들었다. 가만히 소달을 향해 시선을 보내던 그가 도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문병을 왔다 하지 않았나.”

    문병이라니, 소달의 마음에 작은 감동이 어렸다.

    “큰 상처도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자.”

    “음.”

    강왕세자가 물었다.

    “자네를 돕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나를 원망하진 않았나?”

    소달이 대답이 붙은 듯 따라왔다.

    “신이 어찌 그런 마음을 먹겠사옵니까. 그 상황에 신의 직위를 보전해 주시는 것만 해도 세자께 쉽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소달의 대답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강왕세자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자네가 알고 있다니 다행이로군. 이번 일로 자네 느낀 게 있을 텐데?”

    살피듯 밖을 흘끔거린 소달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폐하께선 이미 강왕부를 경계하고 계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알지 않겠나…….”

    강왕세자가 말했다.

    그는 이미 지난번 일을 통해 머리가 굵어진 황제가 자신들을 방해물로 본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소달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신이 우둔하니 설명을 해주시겠사옵니까?”

    강왕세자가 차갑게 입을 뗐다.

    “폐하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들은 여강과 루안이야. 원창(*袁彰: 원 재상)은 아직 확실하게 입장을 표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마음이 기울었다고 봐야지.”

    그제야 강왕세자의 말을 이해한 소달은 머리에 벼락이라도 내리친 듯이 놀랐다.

    “아! 어쩐지 별것도 아닌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커진 것인지 신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뒤에서 손을 쓴 자가 있었던 것이옵니까?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미가 필요했겠지. 자네를 끌어내릴 만한 사건이 말이야.”

    “신은…….”

    “자네도 억울할 것 없어.”

    강왕세자가 소달을 향해 날카롭게 눈을 흘겼다.

    “대처랍시고 자네가 저지른 멍청한 일들을 보게! 오 부윤이 시키는 대로 따라오지 않았을 때 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았어야지! 그때 눈치껏 손을 털고 나와야지, 끝까지 버티는 건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듣자니 자네가 문관들 앞에서도 욕과 다름없는 폭언을 퍼부었다더군. 그런 자네를 그들이 끌어내리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세자 전하!”

    “기왕 멍청한 짓을 했으니 끝까지 하도록 해. 그렇게 해서 군중 뒤에 숨은 놈을 속여 꾀어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테니.”

    비릿한 웃음을 차갑게 흘린 강왕세자가 다시 외투를 뒤집어썼다.

    “몸 관리 잘해서 빨리 업무에 복귀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강왕세자가 떠났다. 그러나 소달은 강왕세자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기왕 멍청한 짓을 했으니 끝까지 하라니……. 군중 뒤에 숨어, 모든 게 엉망이 되도록 조장한 그 독사 같은 새끼를 끌어내란 뜻인가?’

    * * *

    강왕부에 돌아온 강왕세자를 맞이한 세자비가 직접 그의 소세(梳洗)와 환복 수발을 들었다.

    “지난번에 알아보라 했던 이는 알아봤소?”

    세자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보라 했던 이라시면…….”

    “지씨 가문의 소저 말이오.”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이 된 세자비가 손을 저어 시녀들을 내보내더니 강왕세자를 향해 입을 뗐다.

    “남다르게 영특한 소저입니다. 지씨 가문의 차남가는 그 아이를 귀신처럼 무서워하는데, 삼남가는 어떻게 해서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어요. 대장공주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힘으로 아비의 가산을 회수한 것도 그렇고, 지금의 조방궁 역시 제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을 만큼 장악했습니다. 돈과 사람, 모든 것을 손에 쥔 것이지요. 도련님께 일만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집안에 들이기에 적당했을 사람입니다. 집안 수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수를 쓰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도련님 관리도 물 샐 틈 없이 해냈을 테지요.”

    고개를 끄덕인 강왕세자는 서재로 향했다.

    * * *

    서재에는 누군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인이 알아본바, 류명주는 지씨 가문 소저의 부탁을 받고 증언 차 걸음 했던 것이었습니다. 옥에 갇혔던 서생들 중에 그 소저의 친척 오라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그랬군.’

    강왕세자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우연이겠지?’

    제 친척 오라비가 잡혀 들어갔으니 그를 돕기 위해 그녀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벌어진 사건의 규모가 상당하지 않았던가. 대장공주가 손을 쓴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아이에게 이 정도 일을 벌일 만큼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주모(主謀)는 루안과 여강인가보군.’

    물론 소달이 거하게 제 무덤을 파기도 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둔 게야.’

    교활하기가 독사 못지않은 문신들이 그걸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 * *

    깊은 밤이었다.

    (*輦: 제왕이 타는 수레)에 올라 후궁으로 향하는 내내 황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쉬고 있었다.

    “폐하, 도착하였사옵니다.”

    황제는 눈을 뜨고서야 도착한 곳이 영수궁 앞인 것을 알게 되어 멈칫했다.

    “폐하.”

    그를 맞으러 나오는 옥비를 본 황제의 마음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래, 그랬지.’

    어쩔 수 없는 며칠을 제하면 3년을 꼬박 영수궁으로 걸음 했으니 호은도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연에서 내린 황제가 영수궁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소세(梳洗)와 환복 시중을 들며 옥비가 재잘거렸다.

    “폐하, 오늘은 어찌 이리 늦으셨는지요? 업무가 많으셨던 것입니까? 폐하, 이화원에 계수나무 꽃이 피었사옵니다. 그래서 신첩, 폐하께 꽃구경을 청하려 했사온데 혹 시간 내기가 어려우시거든 신첩이 꽃이라도 따오라 하겠사옵니다. 따온 꽃으로 계화 술을 빚어도 좋을 것입니다. 응달에 말려 계화차를 내…….”

    그리 재잘거리는 옥비를 황제는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질한 눈썹, 화장으로 그린 태가 역력한 눈. 물론 입술도 그러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던 황제가 문득 물었다.

    “소세는 안 하는가?”

    재잘재잘 입을 놀리며 떠들던 옥비의 음성이 뚝 끊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돌아갔다.

    옥비의 시선을 마주한 황제가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갑자기 화장하지 않은 모습이 어땠는지 떠오르지 않아서.”

    짧은 정적이 흘렀으나 생긋, 얼굴에 웃음을 띤 옥비가 다시 그에게 허리띠를 둘러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최고의 모습으로 폐하를 맞이하는 것이지요.”

    “음.”

    * * *

    금벽은 혹시 있을지 모를 시중을 위해 밤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러다 침전에서 홀로 나오는 옥비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저를 찾으시지 왜 혼자 나오셨습니까?”

    옥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답답해 바람이나 쐬러 나온 것이야.”

    ‘답답하여 바람을 쐬러 나오셨다니?’

    멈칫한 금벽이 내전을 흘끔거렸다.

    털썩, 주저앉듯 앉아 한참을 말없이 있던 옥비가 돌연 목소리를 냈다.

    “금벽아, 그분은 더는 날 좋아하지 않으시는구나!”

    ‘좋아하지 않으신다니? 누가?’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금벽의 귀에 옥비의 음성이 이어졌다.

    “오늘 그분께서, 내게 이 밤에 소세는 하지 않냐 물으시더구나.”

    그제야 금벽은 옥비가 말하는 그분이 황제란 것을 알았지만, 더 큰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소세를 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금벽은 궁금한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물었어도 옥비는 대답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질문의 답을 옥비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소세로 얼굴을 씻어내면 제 얼굴은 더는 ‘옥종화’의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옥종화가 아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 수 있지? 내가 어떻게 궁 한 채를 소유할 수 있겠냐고……!’

    옥비는 저 자신을 감싸 안듯이 두 팔을 껴안았다.

    ‘당신만, 당신만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나도 내 원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마, 바람이 찹니다. 옷을 좀 더 챙겨 입으셔요.”

    금벽이 여벌로 챙겨온 피풍의를 옥비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바람을 막는 피풍의로 몸을 감쌌지만 옥비는 조금의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기한이 있는지 몰라…….’

    3년이 흐르지 않았던가. 드디어 그도 자신과 하는 이 놀이가 지겨워졌는지 몰랐다.

    그는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그에게 다시 의안왕의 자리로 돌아가라 한다면…….

    과연 그가 그것을 원할까?

    * * *

    이튿날은 황제의 휴무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황후의 거처를 찾은 황제는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식사까지 마친 후에야 화춘궁을 나섰다.

    호은이 물었다.

    “폐하, 영수궁으로 돌아가시겠사옵니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장복궁에 드시겠사옵니까?”

    장복궁은 신비의 거처였다.

    그러나 황제의 고개가 또다시 좌우로 흔들렸다. 의아해진 호은이 물었다.

    “아니면 청녕궁에 들러 잠시 쉬었다 가시겠사옵니까?”

    요즘 황제와 관계가 좋아진 태후의 궁, 청녕궁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그러나 달리 말이 없던 황제의 입에서 뜬금없는 곳이 나왔다.

    “장락지가 그리 재미있다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호은은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러나 황제의 목소리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이어졌다.

    “짐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내가 의안왕이었던 시절, 형님인 태자 전하께서도 그런 곳엔 걸음을 하지 않으셨거든. 그러나 도성에 있는 청년 중에 장락지를 한 번 안 가본 이들이 있겠나?”

    호은이 조심스레 단어를 골라가며 입을 뗐다.

    “소인이 간혹 출궁할 일이 있을 적에 들렸던 기억이 있었사온데……. 그렇사옵니다, 폐하. 무척 흥겨웠던 곳으로 기억하옵니다.”

    황제의 말이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왔다.

    “그럼 그곳으로 가자.”

    “네?”

    호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얼이 빠진 호은을 향해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치뜨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암행을 나가시려는 것이로구나!’

    내심이야 어떨지 몰라도 감히 황제의 말을 거절할 수 없던 호은이 대답했다.

    “폐하, 출궁하시려면 환복을 하셔야 하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승원궁으로 가지.”

    * * *

    반 시진 후.

    평범한 평상복을 입은 황제가 마차에 올라 궁을 나섰다.

    마차는 장락지로 향했다. 장락지는 오후 시간이 가장 한적하여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흥겹다지 않았나?”

    호은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 대낮에 장정들은 일을 합니다. 해가 떨어진 밤이 되어야 즐길 수 있사옵니다. 그래도 오늘은 휴일이라 평상시보다 사람이 많은 것이옵니다.”

    “아, 그러하냐?”

    그제야 사정을 이해한 황제가 두어 걸음을 떼었지만, 그제야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은……. 장락지에 오면 무얼 하나?”

    “뱃놀이를 즐기옵니다. 음주가무도 즐기고 기녀도 희롱…… 헙!”

    호은이 저도 모르게 뱉을 뻔한 단어를 꿀꺽 삼켰지만, 황제가 이를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먹고 마시고 즐긴다’는 것이 아닌가?

    먹고 마시는 것이야 궁에서 이미 최고의 것으로 진상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왕 궁 밖까지 나왔으니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 될 터.

    기녀 이야기에 황제는 소달 사건이 있던 날 본 류명주가 떠올랐다.

    “가서 류명주란 기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거라.”

    “알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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