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8)화 (198/385)
  • 198화. 병문안

    한편, 약속이 있었던 지온과 유민은 함께 차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상인 유삼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올라와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췄다.

    “두 분 소저를 뵙습니다.”

    유삼에게 마주 예를 갖춘 지온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앉으세요, 유삼야(*三爺: 이름 뒤에 ‘爺’를 붙여 존칭이 됨).”

    그 말에 공손히 고개를 숙인 유삼이 두 사람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를 택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땡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다섯 달 전만 해도 그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서책방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고, 얼마 전 문을 연 향방(*香房: 향을 취급하는 점포)도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제 그도 밖을 나서면 사람들이 삼야(三爺)라 높여 불러주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오늘의 영화(榮華)는 사업을 제대로 일군 저 자신의 능력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삼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 준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으리란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곳은 도성이었다. 세상천지, 장사기술 좋은 이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러나 그 중, 도성에서 제대로 사업을 일으키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금예거(金猊居)의 장부입니다. 확인해보십시오.”

    금예거(金猊居)는 그와 지온이 함께 연 향방(香房)의 이름이었다.

    조방궁에 있는 선고들은 본래 화초 키우는 일과 조향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지온은 조방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조향법을 좀 더 개량하여 선고들에게 향환과 향수를 제조하게 하였고, 그것을 금예거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어차피 조방궁은 황가의 궁관이라 금예거에서 취급하는 향환과 향수의 조향법이 조방궁 밖으로 새어나갈 걱정이 없었다. 파는 입장에서도 이득이었고 선고들은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어 좋았다.

    과거 함옥과 청옥이 그랬듯이 조방궁에서 거친 일을 맡아서 하던 낮은 직위의 선고들도 이제는 괴롭힘을 당해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 이 덕에 지온은 다시금 조방궁 선고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어린 선고들에게 조방궁으로 들어오는 시줏돈은 어차피 손댈 수 없는 그림의 떡 같은 돈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수행하려면 배워야 하는 것이 조향이었으니, 그것으로 돈까지 벌 수 있다는데 기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주지에게 연이 닿은 적통이 아니면 좋은 것은 아무것도 나눠 받지 못하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지온은 유삼이 건넨 장부는 보지도 않고 말했다.

    “장부에 대해선 하로와 이야기하시고, 물품 관련된 문제는 의운과 상의하시면 됩니다.”

    유삼이 그러겠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뵙자고 말씀을 드린 것은 다른 일 때문입니다.”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정양문에서 소 장군의 형이 집행된 것은 유삼야께서도 아시겠지요?”

    유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에 모르는 이가 없는 사건이 아닌가? 하물며 오늘 이 자리에 오는 중에도 그 일에 관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온 참이었다.

    “저희가 여기 앉아있는 동안 오가는 말들을 들어보니 몽땅 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흡족해하는 듯했고요. 만약 저희가 금방 일어난 사건을 작은 책자에 기록해 펴내면 어떨까요? 크게 환영을 받을 것 같지 않으신지요?”

    유삼이 생각에 잠겼다.

    “조정엔 ‘관보(官報)’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내린 유지(諭旨)와 신하가 올린 상주(上奏)를 놓고 토론한 내용을 따로 초록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관원들이 보는 것이지 평범한 백성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는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사건들로 관보를 모방한 ‘민보(民報)’를 내는 것입니다. 며칠에 한 번씩, 도성 전체에 말이지요.”

    유삼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서책방은 대성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손도 많이 갔다. 유씨 가문의 사촌 남매가 쓴 새로운 형식의 소설은 크게 환영을 받았지만, 소설이 풀리면 다른 서책방에서도 금방 비슷한 소설을 냈기 때문이었다. 비록 두 사람이 쓴 것보다 몇 할 급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큼 시장을 빼앗기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도판(*盜版: 해적판) 문제가 있어 반드시 쉬지 않고 다음 권을 출시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온이 말한 ‘민보(民報)’가 나온다면 소설이 가진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만들면 도성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보지가 될 수도 있다!’

    지온과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논의에 들어갔던 유삼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유삼이 떠나자 동석했던 유민은 부러운 얼굴이 되어 지온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어쩜 그렇게 머리가 좋아? 사건만 보면 어쩜 그렇게 좋은 생각이 하나씩 탁탁 나오는 건지, 대단해.”

    지온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너도 못지않게 똑똑하면서 뭘. 소설을 아주 잘 쓰잖아. 요즘 네가 쓴 봉황사(鳳凰辭) 얘기가 벌써 도성에 자자하게 퍼졌다며? 밖에 나가면 소저들이 네 소설 이야기만 한다던데?”

    유민은 으쓱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썼다고 말하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

    “괜찮아. 너무 답답하면 나한테 와서 자랑해.”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딱 한 번 나가 논거였잖아, 형!”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 유모지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 번이라 부른단 말이냐? 며칠 연속으로 나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유씨 집안의 대공자, 유신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어떻게 안 나가냐고! 다들 정양문으로 출동하는데, 나만 몸 사리고 있었어 봐, 나중에 어디 다른 서생들이랑 말이나 섞을 수 있겠어?”

    “그게 아니라 너도 가서 한 손 거들고 싶어서 나간 거겠지.”

    유신지가 잔인하게 유모지의 진실을 폭로했지만 그런데도 유모지는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한 손 거드는 게 당연하지! 억울하게 당하는 게 뻔히 보이는 데 도와야 할 거 아냐! 원겸 형님을 뒤에서 움직이게 만든 사람이 형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형은 사방에 불을 질러도 괜찮고, 나는 양초에 불도 붙이지 말라 이거야?”

    “오호! 지금 장군에 멍군으로 응수한 것이냐? 제법이다?”

    그렇게 아옹다옹 다투며 올라온 유모지는 지온과 유민이 있는 별실에 앉는 순간까지 씩씩거렸다.

    지온이 그에게 차를 따라 건네며 방긋 웃음을 지었다.

    “저는 유모지 공자님을 응원해요.”

    그 말에 씩씩대던 유모지가 반색하며 찻잔을 들어 지온과 건배했다.

    “역시 지온 소저가 뭘 좀 아네!”

    유신지가 지온을 향해 눈을 흘겼다.

    “지온 소저의 응원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어차피 저희 집안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지온이 은근한 말투로 대꾸했다.

    “꼭 집안사람이 되길 바라는 말씀 같네요, 공자님?”

    “크허억!”

    침이라도 뱉을 듯 밭은 소릴 낸 유신지가 덧붙였다.

    “누워서 침 뱉는 말이었던 듯하군요.”

    그 말에 유모지가 즐거운 듯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형은 매번 지온 소저만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니까!’

    그리 생각하니, 지온 소저가 한 집안사람이 되는 것이 제겐 더 좋은 일일 수도 있단 생각이 스쳤다.

    ‘잠깐, 근데 원래 나랑 혼약이 있던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형님과 혼담이 오가는 거면……. 이거 아주 어색하고도 곤란한 상황이 될 것 같은…….’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모지는, 오쟁이를 진다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온이 유신지에게 물었다.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진 않을까요? 원 재상 쪽이…….”

    유신지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원씨 집안에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 원겸 형님도 요새 희희낙락하고 있어요. 욕은 좀 먹을지 몰라도 별일 없을 겁니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며칠 있다 문혜 언니를 보러 가야겠네요.”

    작정하고 원씨 집안을 끌어들이긴 했다. 그래도 원 재상을 번거롭게 만든 것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 아니었던가?

    * * *

    연이은 사건 끝에 소씨 집안엔 병자가 하나 더 늘었다.

    침침한 기운이 가득 드리운 집안에서 소씨 가문의 부인은 얼굴이 다 축축하도록 눈물을 뽑고 있었다.

    소달이 역정을 냈다.

    “거, 그만 좀 우시오! 안 그래도 우중충한데 꼭 우는 소리까지 보태 들어야겠소?”

    소달은 짜증을 내며 제 부인과 혼인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가 막 출셋길에 올랐을 때 부상(*富商: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그와의 혼인을 원하며 찾아왔다. 당시 부상 가문의 여식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불면 날아갈 듯 야리야리한 게 문턱 높은 명문가의 미인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소달도 기쁘게 그녀를 부인으로 맞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왜 사람들이 부인감으로 ‘세가의 여인’을 찾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국공 부인만 생각해도 그렇지! 제 집안에 일이 터지자마자 당장 소매를 걷고 나서잖아!’

    정국공 부인이 제 부군과 함께 자신을 발고하러 황궁에 입궁했을 때, 바로 소달은 깨달았다. 부부가 어찌나 빈틈없이 몰아붙이던지 자신이 말 한마디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자식 교육은 또 얼마나 훌륭해!’

    평소엔 제멋대로 굴지 몰라도 문제가 터지면 절대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울면서 어쩌면 좋냐고 묻는 것뿐인 이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지, 쯧!’

    상인 집안사람이라 그런지 확실히 명문가 규수와는 달리 사람이 경박스럽지 않은가.

    ‘역시 장사치 집안인 게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이들도 다 큰 마당에, 이대로 대충 데리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노야, 화내지 마세요.”

    소달이 화를 내자 얼른 눈물을 닦은 부인이 말을 이었다.

    “화를 내시면 회복이 더 늦어집니다.”

    그 말에 소달이 정색했다.

    “그럼 좀 조용히 하시오!”

    “네네, 노야! 알겠습니다, 조용히 할게요!”

    잠시 말없이 조용히 있던 부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노야, 괜찮으십니까? 베개라도 더 받쳐 드릴까요?”

    “…….”

    그때 시녀 하나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노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당황한 부인이 소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님이라니?”

    소달의 물음에 시녀가 대답하려 했지만, 벌써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 장군, 저희 공자께서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소달은 당장 표정부터 달라졌다. 그는 바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러기엔 입은 상처가 얕지 않았다. 형언하지 못할 고통이 밀려오자 소달의 입이 쩍 벌어졌다.

    “노야!”

    소달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그의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찾아온 손님은 이미 그들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팔 없는 외투로 얼굴까지 가린 사내 하나와 별 다를 것 없는 시종 복장을 한 이까지, 손님들은 단 두 사람이었다.

    “몸도 불편하신데 일어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 장군.”

    시종으로 보이는 자의 말에 소달이 제 부인을 휙 밀치며 얼굴을 가린 이에게 공수를 해 보였다.

    소달이 제 부인에게 말했다.

    “어서 차부터 내오고 다 나가시오!”

    소 부인은 그 말에 우물쭈물 대답하더니,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명한 후 다른 이들을 모두 데리고 자리를 비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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