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진정한 횡포
노기 충만한 눈으로 소달을 노려보던 원 재상이 황제를 향해 말을 올렸다.
“폐하, 소달은 먼저 위증을 하더니, 이젠 증인을 위협까지 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횡포를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소달은 인정할 수 없었다.
“원 재상님! 저것이 헛소리하는 것이 분명한데…….”
“증거는 있소?”
그의 말을 끊은 원 재상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눈으로 소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 장군.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입을 열고 있는 것은 당신이오!”
소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그의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한숨을 내쉰 황제가 말했다.
“소달, 증인까지 나온 상황이네. 자네도 더 추해지기 전에 그만하는 게 좋겠네.”
“폐하!”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더니, 이내 냉정한 얼굴만이 남았다.
“소염의 장락지 사건을 조사한 결과, 서생들과 무관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을 석방토록 한다. 그 외, 소달의 무고죄(誣告罪)가 성립되는바, 금군통령의 직위를 해제…….”
그때였다.
돌연 밖에서 오만한 음성이 낭랑하게 울렸다.
“기다리시지요!”
대전 안으로 들어오는 강왕세자를 본 소달의 얼굴 위로 기쁨이 번졌다.
그러나 황제의 얼굴엔 순식간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황제의 시선이 대전의 문을 지키고 선 내시를 향했다.
‘천자(天子)가 업무를 보는 궁정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데, 이리 함부로 들어오게 한단 말인가!’
황제의 위협적인 눈빛을 받은 내시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이라고 그를 안 막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강왕세자가 흉흉한 기세로 달려와서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들어가 버린 것을 자신이 어찌한단 말인가?
“폐하를 뵙습니다.”
대전으로 들어온 강왕세자는 차리는 듯 마는 듯 예를 올리곤 다른 이들의 문안은 받을 것도 없이 황제를 향해 추궁하듯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선 소달의 직위를 해제하실 생각이시옵니까?”
그때, 잔뜩 미간을 좁힌 여강이 고함을 치고 나섰다.
“강왕세자 전하. 폐하께서 심문하고 계신 곳에 이리 막무가내로 난입하시다니, 무례하십니다!”
그러자 여강을 흘겨보던 강왕세자가 거만스레 입을 열었다.
“감히? 본 세자가 폐하와 하는 대화에 자네가 끼어들 자격이 된다 생각하는가?”
여강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은 한낱 학사(學士)일 뿐이지요. 그러나 신은 또한 폐하의 위엄을 지킬 책임이 있는 폐하의 신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강왕세자께서 지금처럼 무례한 행동을 하신다면 신에겐 당연히 끼어들 자격이 있습니다!”
강왕세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대단하시구먼. 그럼 지금과 같은 자네의 행동을 이간질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나? 본 세자와 폐하는 형제일세. 그동안 대화에 기탄이 없었으니, 자네가 끼어들 필요도 없겠지.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황제는 가슴으로 불같은 분노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요. 형제간에 그리 번거로운 예를 따질 필요는 없지요.”
황제의 대답에 미간에 골을 진 여강이 불쌍한 듯 황제를 바라보고는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대답했다.
“신이 실례를 범했사옵니다.”
여강의 눈빛을 받은 황제는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짐이 사건을 판결하고 있었으니, 형님은 잠시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신도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강왕세자는 돌리지 않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선 소달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짐과 상관없이 소달은 법도를 어겼습니다. 처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의 직위까지 해제하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강왕세자의 대답에 황제가 믿을 수 없단 얼굴을 했다.
“금군통령이 되어 무고죄(誣告罪)를 범한 것도 모자라 증거까지 위조해가며 죄 없는 이를 모함했습니다. 거기다 위력을 행사하여 서생들의 입을 막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직위를 해제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법도를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그러나 강왕세자의 신색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식에 대한 마음이 너무 절박하여 다른 이들을 오해했을 뿐입니다. 거기다 증거도 없으니 잠시 잘못된 생각도 하게 되었겠지요. 다툼이 벌어져 다치게 되었는데, 누가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 생각하겠습니까? 생각해보시지요, 폐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뭐가 그렇단 말인가!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 실수로 사람이 다치는 것도 정상이지!’
황제는 답답함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강왕세자의 말이 이어졌다.
“소염은 지금도 침상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제 자식을 향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번 일은 분명 소달이 잘못한 것이나, 그의 직위까지 해제할 정도는 아닌 듯하옵니다. 더구나 그의 직위를 해제하시면 폐하께선 누구를 세우실 생각이시옵니까? 금군통령이란 자리가 아무나 않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 말입니다.”
순간 황제가 흠칫했다.
지난번 루안과의 대화를 통해 이미 금군통령의 자리를 소달에서 다른 이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소달 본인이 문제를 일으켰기에, 이번 기회에 소달을 금군통령의 자리에서 치울 생각이었다.
그 후에 누구를 앉힐 것인지에 대해선 확실히 적당한 인물을 고르지 못했다. 전례에 따르면 소달이 죄를 범할 시에 일시적으로 부통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소달도 강왕부 사람인데 부통령이 강왕부의 사람일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소달을 내보낸 자리에 다시 강왕부 사람을 앉히게 된다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황제가 말이 없는 것을 본 강왕세자는 거기서 더 욕심을 냈다.
“폐하께 따로 생각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면 소달을 계속 앉혀두시지요. 벌이라면, 감봉이든 장형(杖刑)이든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같단 말인가? 감봉은 형식적일 뿐이고, 장형을 때려봐야 어차피 소달의 체면을 상하게 하긴 어려울 것이니 그가 전처럼 금군통령을 계속한다면, 그는 여전히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쥔 중신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황제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 속에 품은 분노를 참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황제의 시선이 루안을 향했다. 그런데 그때 루안이 그에게 슬쩍 시선을 보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짐에게……. 일단 그가 원하는 대로 받아주라는 것인가! 하긴, 짐은 아직 기반이 확실하지 않아. 소달을 대체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으니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겠군. 참아야지. 일단은 참아야 한다.’
잠시 생각을 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형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소달을 벌하지 않으면 짐의 위엄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소달의 직위를 부통령으로 강등하겠습니다. 통령의 자리는 비워둔 채 그가 계속 통령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강왕세자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통령 자리가 비어있다면 부통령과 통령은 거의 차이가 없지 않은가?
‘황제의 면을 챙긴다 생각하자. 어차피 통령 자리에 마땅히 앉힐 사람도 없지 않은가?’
“폐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시지요.”
황제는 내심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형님. 꼭 형님이 결정이라도 하실 수 있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
황제의 가슴엔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얼굴엔 드러내지 않은 채 계속해서 판결을 이어갔다.
“……소달의 무고죄가 성립하는바, 직위를 하나 강등하며 장형(杖刑) 오십 대에 처한다. 명일(明日) 정양문에서 형을 집행할 것을 명한다.”
“폐하!”
강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장형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정양문에서 집행한단 말씀입니까? 그리되면…….”
백관(百官)과 백성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란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황제가 덤덤히 대답했다.
“짐이 오늘 정양문에서 서생들이 정좌까지 한 사건을 처리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모두에게 그에 합당한 답변을 내어주어야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그것이 싫으시면 직위를 두 개 강등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좋으시겠습니까?”
직위 두 개가 내려가면 보좌관보다 낮은 직위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강왕세자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보직이었으니, 두 가지 선택지 중 어쩔 수 없이 정양문에서 볼기짝을 맞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그리하시겠다니,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하!’
속으로 냉소를 터트린 황제가 소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반대 의견이 있는가?”
소달의 얼굴은 탁한 회색빛으로 어두웠지만, 이미 강왕세자가 허락했으니 그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없사옵니다…….”
“그럼 이리 판결을 내리겠다. 사건을 종결한다.”
모든 신하가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신, 명을 받드옵니다!”
* * *
이윽고 황제는 모든 이들이 물러간 대전에 루안만을 남겼다.
잠시 말없이 앉아있던 황제가 문진(文鎭)을 들더니 부술 작정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루안이 움직이며 황제가 던진 문진을 몸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
몹시 놀란 황제가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문진을 받아 낸 루안은 문진을 도로 황제의 어안(*御案: 황제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고는 손을 모아 공수하며 말했다.
“신은 괜찮습니다. 분노를 거두십시오, 폐하. 지금은 평범한 시기가 아닙니다. 문진에 작은 균열만 가도 내일이면 강왕부에 소식이 들어가겠지요.”
황제의 얼굴 위로 낙담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절망스러운 듯했다.
“짐은 화조차 낼 수 없는 것인가. 황제라고 어좌에 앉아있는 것이 참으로…….”
그러나 루안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폐하, 형세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너무 낙담하실 것 없습니다. 여 학사를 제외하고도 원 재상이 폐하 편에 있지 않습니까?”
황제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짐을 그리 대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자를 두고 짐의 편에 있다 할 수 있겠나?”
루안이 대답했다.
“원 재상은 여 학사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원 재상이 제 입장을 드러내면, 그 순간 권력 싸움의 장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러니 세력이 작은 저희는 절대 먼저 제 위치를 드러내선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원 재상께 그런 내심이 없었다면 오늘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소달에 대한 처벌을 폐하께서 그리 쉽게 내리실 수 있으셨던 것도 원 재상이 있어 균형이 잡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황제는 기분이 많이 나아졌지만,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쉽게 됐군. 소달을 어쩌지 못했어.”
그때 루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겸손이 과하십니다, 폐하. 오늘 폐하께서 쓰신 방법은 저조차 생각지 못한 아주 현명한 방법이셨습니다. 소달에게 명분이 없어졌으니, 폐하께선 그 자리에 적당한 이를 찾아 앉히기만 하시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실권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실권도 명분을 가져야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