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5)화 (195/385)
  • 195화. 확실한 증거

    그때, 루안이 자신만 빠지면 섭섭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폐하. 비록 이 사건은 용의자에 대한 고발이 주를 이루고 있긴 하나, 모살(謀殺)이 연루된 사건이옵니다. 일이 이러하니, 부아에서는 마땅히 현장으로 사람으로 보내어 조사를 진행해야 하옵니다.”

    황제가 이해했다는 듯이 답했다.

    “살인은 대죄이니 당연히 쉽게 볼 수 없지. 오 경, 이 사건을 받고 장락지로 조사할 인원을 보냈는가?”

    “…….”

    부윤의 다리가 급기야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떨렸다. 부윤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소신, 소신은…….”

    황제의 안색이 변하더니, 그의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보아하니, 조사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모살과 같은 큰 사건을 두고 원고 측 말이 모두 옳다고 판단한 것인가? 자네, 부윤 자리에 참으로 쉽게 앉아있군.”

    대경실색한 부윤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신, 잘못하였사옵니다!”

    그 와중에도 비상하게 돌아간 부윤의 머리는 저를 위한 변명거리를 한 가지 떠올렸다.

    “하오나 폐하! 신이 이 사건의 판결을 곧장 내릴 수 없었던 것은, 피고 측에도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오?”

    황제가 물었다.

    “직접 증거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옵니다. 서생들이 소 공자 때려서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을 본 목격자 말이옵니다.”

    * * *

    그 시각, 지온은 장락지에 있었다.

    놀잇배 위에 있던 류명주는 지온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지온 소저…….”

    지온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 류 낭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증언을 해줄 수 없었고, 저도 무리하게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때와는 형세가 달라졌는데 한 번 나서보지 않으시겠는지요? 협사(俠士)가 되어보시지요.”

    류명주가 멈칫하자 지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생들이 소씨 가문을 어전 앞에 발고하여 지금 폐하께서 직접 심문하고 계십니다. 모르고 계시겠지만, 지금 저희를 돕는 분으로 원 재상님과 여 학사, 그리고……. 아무튼 증언해준다면 제가 류 낭자의 안전은 책임질 것입니다.”

    “저는…….”

    지온이 부드럽게 그녀를 설득했다.

    “류 낭자,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화괴(花魁)로 지내지만, 앞으로는 또 어찌 지내게 될까요? 화괴낭자(花魁娘子)는 매달 한 사람씩, 매년 열두 사람씩 나오지요. 시간이 지나면 또 누가 낭자를 기억하겠습니까? 그러나 낭자에게 이런 의협심이 있다면…… 앞으로 낭자는 그저 웃음만을 파는 평범한 화괴가 아닐 것입니다.”

    * * *

    마차에서 내린 류명주는 조심스레 정양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로선 처음으로 이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갈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류명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 한쪽에 서 있던 지온이 그녀를 향해 깊게 허릴 굽혀 예를 표했다.

    그 모습에 다시 용기를 낸 류명주가 되새김질하듯 저 자신에게 말했다.

    ‘지온 소저의 말이 맞아. 사람들은 의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아무리 기녀라고 해도 의협이란 꼬리표가 달리면 앞으로 내 몸값은 전과 분명 달라질 거야.’

    소씨 가문이 이미 반쯤 쓰러진 것과 다름없다면,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도 별다른 후환을 불러오지 않을 터였다.

    그날 밤, 소염이 보였던 모습을 떠올린 류명주가 이를 갈았다.

    ‘나라고 정말 화가 없는 사람이라 아무렇게나 괴롭혀도 될 것 같았어?’

    그런 마음으로 류명주는 성문을 지키는 수문위(守門衛)에게 다가갔다. 경악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류명주는 제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수문위 나리, 저는 증언하기 위해 왔습니다…….”

    * * *

    말을 마친 부윤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지, 도리상 이게 맞거든.’

    소씨 가문도 증인이 없지만, 서생 쪽도 증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각자가 주장하는 바가 첨예하게 다르지만,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이런 사건의 판결이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루안을 보는 황제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그런가?”

    몇 년간 형부낭중을 지낸 루 대인이 어떻게 사건 판결을 내리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루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오 대인의 말에 일리가 있사옵니다. 하오나…….”

    부윤의 심장이 또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오나? 또 무슨 하오나? 또 나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지? 넣어둬, 제발 넣어둬!’

    그러나 자비 없는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증거는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지 않사옵니다. 직접 애를 써 찾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소신, 서생들이 이 사건을 인지한 후, 동창들을 모아 장락지를 돌아다니며 증인을 찾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그 시일이 너무 짧았사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이야말로 사건을 조사하는 이가 보여야 할 마땅한 태도라 할 수 있겠지. 서생들마저 알고 있는 것을 오천랑(吳天朗)이 몰랐을 리는 없고, 업무 태만으로 가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러나 자신이 직접 심문하여 판결하는 사건이었다. 확실한 증거 없이 판결을 내리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일단 증인을 찾은 후에 다시 판결하는 것이 좋은가?’

    황제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시가 종종, 급히 들어왔다.

    “폐하, 궁 밖에서 한 여인이 사건의 목격자라며 고하고 있사옵니다! 서생들이 신원을 위해 모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 마음이 움직여 특별히 증언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옵니다!”

    그 말에 황제의 기분은 크게 좋아졌다.

    ‘과연! 이것이 바로 천자의 기운이란 것인가! 어려운 일을 만나도 곧 해법이 제 발로 찾아오는군!’

    다른 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는데, 소달과 부윤은 특히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소달은 아무렇게나 증거를 날조하면서도 누구도 진상을 밝히러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부윤은 이 사건을 보자마자 증인을 찾기가 어려울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믿을 만한 증언을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배 위에 타고 있어야만 했다. 당시 배 위에 있던 이들이라곤 놀잇배의 일꾼들을 제외하면 기녀뿐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녀가 감히 소씨 가문과 척을 지려고 한단 말인가?

    “어서 데려오거라!”

    황제는 몸이 달았다.

    “알겠사옵니다!”

    이윽고 내시의 안내를 받은 류명주가 조심스레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머리조차 들지 못한 채 온몸을 납작 엎드리며 정성을 다해 예를 갖췄다.

    “천첩(賤妾), 류명주가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황은에 감사드리옵니다.”

    류명주가 예의 바르게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아래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녹색이 감도는 푸른색의 치맛자락과 가르마 없이 뒤로 가볍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수수한 비녀 하나가 황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인의 곱게 빚은 듯한 시원시원한 얼굴은 수려하기만 했다. 조신한 그녀의 행동과 아름답게 움직이는 자태를 보니, 그녀는 높은 가문의 규수인 듯했다.

    황제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귀한 집 규수가 어찌 그날의 사건을 목격한 것인가? 다른 가족들과 물놀이를 갔다 저들의 배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야?’

    그러나 부윤은 그녀가 자신을 가리킨 호칭을 기억했다.

    ‘천첩이라 했었지. 역시 기녀였군! 기녀가 제 발로 증언을 하겠다고 찾아온 것을 보니 소씨 가문이 진짜 쓰러지기 직전인 것인가?’

    “류 낭자라고 했나? 증언하러 왔다고?”

    황제가 따뜻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류명주가 대답했다.

    “그날 밤, 배 위에서 소 공자께서 노에 맞고 물에 빠지는 것을 직접 보았사옵니다.”

    잠시 머뭇거린 황제가 물었다.

    “배……. 배 위에 있었다고? 배 위에서 무얼 한 것인가?”

    그 질문을 들은 부윤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기녀가 배 위에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기예를 팔거나, 아님 웃음을 파는 것이지. 폐하께선 지금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것인가?’

    류명주는 창피했지만, 꾹 참고 조용히 대답했다.

    “천첩은 응당 청해주신 공자들께서 계시니, 배에 올라 기예를 선보였사옵니다.”

    그제야 그녀의 신분을 인지하게 된 황제였다.

    “자네는…… 기녀였나?”

    “그렇사옵니다, 폐하.”

    황제는 그녀를 몇 번이나 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녀는 다들 홍록(紅綠)이 선연한 의복에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일 수도 있다니, 높은 집안의 규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자, 황제는 류명주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어쩌면 류 낭자도 좋은 집안 출신일지도 모르겠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저런 곳까지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날 무엇을 보았느냐? 본 그대로만 이야기를 하거라. 그 뒤의 일은 짐이 책임을 져줄 것이다.”

    다소 마음이 놓인 류명주는, 그동안 망설이며 속으로 여러 차례 읊조려 보았던 증언의 내용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천첩이 소 공자께 술을 올리려 할 때였습니다. 돌연 놀잇배가 요동을 치더니, 곧이어 밖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사옵니다…….”

    류명주의 증언이 나지막이 이어졌다.

    “……소 공자께서 선실 밖으로 나가셔서 천첩도 그 뒤를 따라 나갔사옵니다. 소 공자께서는 과음하셨던 탓이었는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셨습니다. 마침 그때, 다른 공자께서 소 공자께로 넘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노가 소 공자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곧 소 공자께서 물에 빠지셨사옵니다.”

    그녀는 깔끔하게 설명을 마쳤다.

    황제가 물었다.

    “손에 노를 들고 있던 공자는 누구인가? 저들 중에 있는가?”

    황제가 가리키는 이들은 지장 일행이었다.

    류명주가 지장 일행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천첩이 기예를 선보일 당시에 함께 자리에 계셨던 공자 중 한 분이셨으니, 아마도 소 공자님과 뱃놀이를 오신 일행이실 것이옵니다.”

    사건의 종결과도 같은 말이었다.

    과연 서생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염이 다친 것은 싸움 중에 자기들끼리 다친 것이지, 서생들과는 전혀 상관도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소염이 물에 빠지고 찾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지. 혈기 넘치는 소년들일지라도, 지켜야 할 도리는 지켰던 것이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겠지!’

    한쪽에서 보고 있던 소달은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저 여자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돈에 좌지우지되는 한낱 기녀가 아니옵니까? 그런 기녀의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류명주가 바로 반박했다.

    “폐하! 천첩, 비록 기녀이오나 예의와 수치를 알고 있사옵니다. 천첩이 먼저 증언하지 못했던 것은 소씨 가문의 힘이 크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창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서생분들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와중에, 서생분들께서 어전 앞으로 신원을 하러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천첩, 서생분들의 의협심에 감동하여 저 자신을 위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이리 증언하고자 찾아온 것이옵니다! 

    천첩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옵니다. 혹여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천첩은 일생을 창기(娼妓)로 살게 될 것이며, 다시는 기녀가 되지 못할 것이옵니다!”

    ‘다시는 기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기예를 파는 기녀에게 있어 이보다 더 저주스러운 맹세는 없었다.

    하늘을 향해 맹세하는 그녀의 간절하고도 진실된 모습에, 황제는 이미 거의 그녀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를 참지 못한 소달은 손을 들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후려칠 듯 소리쳤다.

    “천한 계집이 감히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멈추시오!”

    원 재상이 호통을 치며 달려들려던 소달을 멈춰 세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