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4)화 (194/385)
  • 194화. 울고 싶은 부윤 나으리

    호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서생들이 고한 금군통령 소달의 무고(誣告) 건 또한 짐이 알고 있는바, 서생들에게 대면하여 고할 기회를 허한다. 유필(*諭畢: 가르침을 마치다. 성지의 끝에 붙이는 말).”

    성지를 모두 읽은 호은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생들의 인원이 너무 많아 폐하께서 모두 만나기 어려우실 것이니 대표 몇 명만 뽑아 주시겠나?”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서생들 사이에서 터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원들이 대경실색하여 정신이 쏙 빠진 사이, 안정을 되찾은 서생들은 줄줄이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

    “폐하의 황은에 감사드리옵니다!”

    성루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강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보시옵소서. 그래도 예의를 아는 이들이옵니다. 신이 천수서원에서 저들을 가르쳤기에 어떤 품성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들은 무도하게 일을 벌이는 이들이 아니옵니다.”

    황궁 밖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마음이 무척 흡족해진 황제가 여강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인제 보니 자네가 제자들을 위해 읍을 하러 온 것이었구먼.”

    껄껄, 웃음을 터트린 여강이 두 손을 모아 황제를 향해 공수했다.

    “폐하께 우스운 꼴을 보이고 말았사옵니다. 소 장군께서 제 자식을 두둔하시니, 신 역시 제 제자를 보살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여강의 말을 들은 황제는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개무량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애해각의 선생께서도 그리하셨었지…….”

    말을 꺼내려던 황제가 다시 입을 다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명을 내렸다.

    “돌아간다.”

    * * *

    대희가 내시를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부아에 파견된 금위(禁衛)와 함께 사건에 관련된 이들이 연이어 입궁하는 것까지 본 지온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돌아가죠.”

    유신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쉬워서 눈도 못 떼시면서 돌아가실 수는 있으시겠습니까?”

    그가 시선을 보낸 창밖에서는 붉은색 관복을 입은 루안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지온이 되물었다.

    “좀 더 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됩니다. 되고말고요. 지온 소저가 보시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보셔도 되십니다.”

    유신지가 마지막 남은 볶은 밤 껍질을 벗겨 제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사이, 마차는 정양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거리 여기저기에선 열띤 토론의 장이 벌어졌다. 다들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을 놓고 떠드는 중이었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러 온 이들이 어디 지온과 유신지 뿐이었겠는가?

    “대공자, 공자는 폐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 같으세요?”

    지온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유신지가 대답했다.

    “지난번 일도 있으니, 폐하께선 금군통령을 바꾸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강왕부 쪽은…….”

    지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금방 깨달았다.

    소달은 강왕부의 사람이었으니, 황제가 원한다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무탈하게 지나가기란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유신지가 한 마디를 보탰다.

    “대치 국면을 이룰 가능성이 가장 크겠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지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조정의 다른 대신들은 강왕부를 어찌 보는지…….”

    그 말에 끌끌, 웃은 유신지가 지온을 보았다.

    “거참, 소저는 어쩜 이리 선이 없으신지. 제가 그런 질문을 할 사람으로 적당한 사람 같으십니까?”

    유씨 가문이야말로 조정 대신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러나 지온의 신색은 변함없이 자연스러웠다.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돌아가 양어머니께 여쭤보면 되니까요.”

    마치 유신지가 저를 떠보고 있단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모로 튼 유신지는 제 생각이 너무 과했나 생각했다.

    ‘강왕부와 원한이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뿐, 그녀에게 다른 의도는 없나? 하긴, 지온 소저에게 달리 무슨 의도가 있겠어?’

    피어오르려던 의심을 머리 뒤로 날린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3년 전은 3년 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지요. 그러나 폐하께선 그래도 폐하이십니다.”

    “아!”

    감탄사를 뱉은 지온이 말했다.

    “그럼 아무리 강왕부의 비호 아래 있다 해도 결국 소달은 쫓겨나겠네요.”

    “그렇지요.”

    이윽고 골목 앞에서 마차가 멈추자 유신지가 마차에서 내렸다.

    지온이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에 남은 지온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강왕부는 황제를 누를 수 없어. 이제 서로 물고 뜯게 만들 수 있겠네.”

    * * *

    황궁을 처음 방문하는 대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황궁의 신비마마를 사촌 누이로 두고 있기는 했지만, 대씨 집안에 공자들이 많다 보니 학업이 출중하지 못한 그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희야…….”

    그때 문득 제 이름을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대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과 함께 대표로 뽑힌 다른 동창 녀석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녀석이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모습에 대희는 도리어 진정했다.

    동창 중에 세상의 여러 면면을 가장 많이 본 이가 누구던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버텨 줘야 해!’

    그리 생각하니 머릿속이 맑아진 대희는 동창들을 다독였다.

    “예법은 내가 하는 대로만 따라 해. 그리고 다른 부분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냐? 우릴 부르신 것만 봐도 폐하께선 명철하신 분이 틀림없어. 그러니 다들 겁먹지들 마.”

    “응, 그래.”

    소년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아 사람들도 속속 도착했다.

    * * *

    지장 일행은 오늘 하루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중이었다.

    처음엔 앞으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취소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씨 가문이 증언을 조작한 것이 드러나더니, 급기야 이젠 입궁까지 하게 되었다.

    ‘과거급제나 해야 황궁에 들어와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지장 일행은 궁정(宮廷)과 같은 요지에서 함부로 대희와 다른 동창들을 향해 말을 걸 수 없었던지라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이윽고 황제가 그들을 불러들이자 그들은 부윤의 뒤를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부윤이 먼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자 대희가 뒤를 이어 목소리를 냈다.

    “소생, 대희가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다른 서생들도 대희를 그대로 따라 하며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처음 하는 예법이 어색하긴 했으나, 황제가 지금 고작 그것을 트집 잡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그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몸을 일으켜 제 자리를 찾아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섰다.

    그 와중에 지장은 슬쩍 고개를 들어 대전을 살폈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황제는 무척 젊었는데 그리 무서워 보이지도 않았다.

    대전 안에는 내시를 제외하고 고관(高官) 몇 사람들도 보였다.

    가장 앞쪽에 선 이는 당연히 원 재상이었고, 그 뒤는 자신을 한 달 정도 가르친 여 선생이었다. 그리고 여 선생 뒤로는 붉은색 관복을 입은 젊은 관원이 서 있었는데 지장은 그를 알아보았다.

    전에 제 가문을 찾아 다수전(*茶水錢: 시중드는 이에게 주는 봉사료, 지금의 팁)을 요구했던 루 대인이 아닌가!

    ‘붉은색 관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벌써 영전을 했나 보네.’

    그때 다른 편에 서 있던 소달이, 지장이 다른 이들을 살펴보는 것을 발견하곤 돌연 그를 향해 눈을 희번덕이자, 지장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돌렸다.

    “오(吳) 부윤.”

    드디어 황제의 입이 열렸다.

    “네, 폐하.”

    오 부윤이 황급히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히자 황제가 사건 문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기엔 아주 명확한 사건으로 보이는군.”

    부윤이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당 사건의 가장 직접적인 증인의 증언이 위증으로 확인되었사옵니다. 하여, 신이 이미 그 내용을 문서로 기록해 놓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오나, 아직 일일이 비교대조를 거쳐야 할 남은 증거들이 많기에, 모든 정리가 끝난 후에야 사건을 종결할 수 있사옵니다.”

    부윤의 말은 모두 규율에 따른 것이기에 틀린 데가 없었다.

    황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자네 역시 소씨 가문이 무고(誣告)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절차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당을 열었던 그 자리에서 바로 석방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러자 부윤이 능구렁이처럼 대답했다.

    “위증으로 원고의 진술에 대한 신뢰도가 깎인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판결을 어찌 내려야 할지는 다른 증언을 모두 보고 정리가 끝난 후에야 결론을 낼 수 있사옵니다.”

    황제가 원 재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것인가?”

    “그렇습니다.”

    원 재상에게서 깔끔한 답이 나오자 부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로구먼. 그래도 내게 불똥은 안 튀겠어.’

    “하오나…….”

    그러나 원 재상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른 증인이 하인이나, 뱃사람이라면 다를 수 있사옵니다. 그들은 고용주로부터 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이니 증언에 형평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그들의 증언은 사용할 수 없사옵니다.”

    순간 부윤의 숨이 턱 막혔다.

    ‘원 재상님, 하관이 재상께 무슨 죄를 지은 것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뒷말만 안 붙이셨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을, 왜 그러신 겁니까!’

    그러나 원 재상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겠나?

    ‘내 아들이 엮인 일이다. 무조건 무결점 사건으로 만들어 놓아야 나중에 이 일이 입에 올라도 흠이 안 돼!’

    “오호…….”

    황제가 말꼬리를 길게 흘리자 부윤의 심장도 함께 멎는 듯했다.

    “서생들 말이, 소씨 가문이 가문의 힘으로 위세를 부렸다던데, 그 말은 저들이 사람을 부아로 보낸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 많은 이들이 보고 있었는데, 감히 부윤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옵니다…….”

    부윤이 이를 악물고 해명하듯 대답했다.

    “소 장군께선 이품의 대장군이시오니, 직접 공당에 오시는 것이 어려워 집안의 총관을 대리로 보내셨습니다.”

    “그럼 자네, 그에게서 뇌물을 받았나?”

    “아니옵니다! 절대 받지 않았사옵니다!”

    부윤이 소리쳤다.

    “신,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사옵니다! 신은 소씨 가문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사옵니다!”

    도성의 관리가 언제 방심할 틈이 있던가! 그래서 자신은 늘 일을 모두 마친 후에야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엔 뭔가를 받을 새도 없었던 것이다.

    황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소씨 가문이 지목한 흉수는 누구인가?”

    그 말에 지장 일행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서생, 여기 있사옵니다.”

    그때 대희가 스스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서생도 포함이옵니다, 폐하. 그날 서생도 배에 함께 있었으며, 싸움에도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는 없사오나, 서생만 이번 판결에 빠져 있었사옵니다.”

    “오?”

    황제가 부윤을 향해 물었다.

    “왜인가?”

    부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강이 먼저 선수를 쳤다.

    “폐하, 저 서생은 사실 폐하의 어린 처남이라 볼 수 있사옵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여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씨 가문의 서생이옵니다. 신비마마의 사촌 동생이지요.”

    “오!”

    그제야 이해한 황제가 대답했다.

    “대씨 가문의 사람이었군.”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부윤의 다리가 달달 떨려 왔다.

    ‘폐하께선 내가 사람 따라 차별대우를 했다고 여기시는 건가? 그럼 내가 서생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걸 알면서 그냥 놔뒀다고 여기시는 것인가?’

    부윤은 울고 싶었다.

    다들 정말 왜들 이러느냔 말인가?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면서 겨우 부윤 나부랭이인 자신이 뭐라고 풀어주질 않느냔 말이다! 처음엔 원 재상이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더니, 이번엔 여 학사가 자신을 두 번 즈려밟았다.

    ‘그나마 루 통정이 가만히 있어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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