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1)화 (191/385)
  • 191화. 까발려진 위증

    대희의 얼굴에 떠올랐던 분노의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희는 웃는 듯 아닌 듯한 묘한 표정으로 부윤을 향해 손을 모아 공수하며 입을 열었다.

    “나리, 보셨습니까? 깃발엔 글자가 없고 그저 면 요리가 담긴 그릇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대낮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증인이, 밤 중에 그 많은 인파가 있던 곳에서 소염이 누군가에게 맞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뭐라?!’

    상인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상인에게 다가온 대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력이 상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저의 동창들도 저 깃발에 쓰인 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학업에 정진하며 서책을 읽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상인에게 이런 상황은 흔치 않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당신, 상인들은 눈을 그리 많이 쓰는 직업도 아닌데, 혹, 나면서부터 눈이 좋지 못했던 것인지요?”

    상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공자, 난 그저 잠시 정신을 팔다…….”

    그러나 이미 그의 곁까지 다가온 대희가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아 위로 들었다.

    상인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곧바로 나타난 한등이 상인의 어깨를 잡아 꾹 내리누르자 강력한 힘에 상인은 얌전히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여기를 봐주십시오!”

    대희가 모인 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자의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있습니다! 이 위치는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붓을 잡아 생긴 굳은살입니다. 증인, 이 굳은살이 설마 장부를 쓰다 생겼다 말할 것은 아니겠지!”

    거리는 단숨에 소곤거리는 소리와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그때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증인은 가짜다! 애초에 상인이 아니었던 거야! 앞에 있는 깃발도 제대로 못 보는데 밤에 뭘 제대로 볼 수나 있겠어? 저자는 위증을 했다!”

    “비열하고 파렴치한 소씨 가문에서 증인을 매수하여 증거를 조작했다!”

    흐름을 놓치지 않고 대희가 소리쳤다.

    “나리, 저희 서생들을 위해 신원(伸冤)을 해주십시오!”

    “맞습니다, 나리! 신원(伸冤)해주십시오!”

    부윤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거리에 나와 판결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한쪽 편을 들어 움직이는 것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던 것이다.

    ‘탓을 하려면 소씨 가문이 멍청한 것을 탓할 수밖에! 그러게 언변이 청산유수인 자를 데려왔어야지, 어디서 저런 자를 데려와서는!’

    “조용!”

    부윤이 경당목을 두드리고 말했다.

    “증인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으니 삭제한다!”

    부윤의 말이 떨어지자 서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서생들이 함께 증인을 찾고, 소문을 퍼트리며 지난 며칠을 얼마나 바쁘게 지냈던가? 그래도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두 힘이 함께 모여 결국 해냈구나! 기분 최고다!’

    “나리.”

    대희가 목소리를 냈다.

    “소씨 가문이 증거를 조작한 것이 드러났으니 신원하여 제 동창들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부윤이 수염을 쓸며 입을 열었다.

    “위증에 대한 것은 본관이 사건을 결론지을 때 당연히 추적하여 해결을 볼 것이오. 그러나 조금 전 증언이 삭제되었어도, 다른 증인과 증언이 아직 많으니 일일이 대조하여 확인해야 할 것이오. 자네와 다른 서생들의 동창의 신원(伸冤)을 위한 마음은 본관도 깊이 깨달았으나, 사건의 판결은 그렇게 내리는 것이 아니요. 아직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증언들이 있고, 본관은 반드시 그 모든 증언들을 다 확인하여 밝힌 뒤에야 저들을 석방할 수 있소.”

    “나리…….”

    부윤이 대희의 말을 끊었다.

    “여러분들이 위증을 밝혀낸 것에 대해 본관,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그러나 부아는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곳이고, 자네들 때문에 그것을 깰 수는 없소. 자네들이 공당에서 동창을 풀려나게 하고 싶다면, 다른 모든 증언이 모두 위증이란 것을 일일이 증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소. 이것은 본관이 여러분들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법도라 그런 것이오.”

    부윤이 법도를 들고나오자, 서생들도 반박할 말을 잃었다.

    소씨 가문이 조작한 증언이 너무 많아 짧은 시간 내에 전부 뒤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고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서생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본 부윤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생 여러분들도 부아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사건 판결은 연극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길 바라겠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오. 사건을 마무리 지으며 풀어줘야 할 사람이 있다면 본관은 반드시 풀어줄 것이오. 퇴당(*退堂: 관리가 법정을 물릴 때 외치는 말)!”

    부윤이 경당목을 치자 수하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내왔던 상과 의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윤은 어찌할 줄 모르고 선 서생들을 흘긋거리곤 미소를 지었다.

    역시 어려서 그런지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이루어진 판결에 위증이 드러났으니 이 사건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 소씨 가문에 빨리 처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연락을 해야겠군…….’

    * * *

    길가에 서 있던 마차 안에는 두 사람이 볶은 밤을 까먹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눈이 나쁜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신지가 묻자 지온이 대답했다.

    “사람을 볼 때 눈을 찌푸리면서 가늘게 뜨고 보더라고요.”

    그녀가 자주 보아온 익숙한 표정이었다. 무애해각에 있던 많은 학생 중 시력에 문제가 있던 이들은 다들 눈을 그렇게 뜨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에 있던 굳은살은 대희 본인의 눈썰미로 찾은 것이었다.

    대희를 보고 인재라던 루안의 말이 옳았다. 확실히 타고난 재능이 남달라, 단서가 될 만한 것 한 가지를 찔러 주자, 마무리까지 이리 멋지게 일을 성공시켜 가져온 것이다.

    “그런 것이었군.”

    유신지가 대답하며 제 눈을 찌푸리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신지 공자님이 그런 표정을 한 것을 저는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공자님의 시력이 좋아 그렇겠지요?”

    그러자 유신지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전에는 저도 등을 켜놓고 서책 보는 것을 좋아했었지요. 그래도 저는 아까 그놈처럼 깃발에 적힌 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심하게 눈이 나쁜 것은 아니라 그 정도 구분은 합니다.”

    유신지는 말을 하며 껍질 벗겨낸 밤을 입으로 던져 넣었다.

    ‘아이고, 달다, 달아! 재미난 구경을 하면서 먹기 딱 좋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겠지요?”

    유신지가 말했다.

    “이대로 기세가 흩어지면 뒷일이 힘들어집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지온이 마차의 창 너머로 한등에게 손짓을 보내자, 그를 본 한등이 곧 대희에게 무어라 말을 전했다.

    이윽고 대희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몸을 돌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잠시 걸음을 멈춰주십시오. 저희가 부아에다 당장 결론을 지어 달라 하는 것은 확실히 부담을 주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금군통령의 위치가 얼마나 높습니까? 그 권세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품계만 해도 부윤에 비교할 수 없이 높은데 어떻게 판결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희의 말에 서생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

    맞는 말이 아닌가! 부윤이 자신들이 옆에서 판결을 볼 수 있게 해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윤이 소씨 집안을 앞에 두고 감히 무슨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리되면 악인들만 치외법권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단 소리가 아닌가?

    “부윤이 판결할 수 없다면, 누가 판결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더 높은 분이시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중얼거린 혼잣말에 대희가 대답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십시다! 가서 높으신 나리들께 정의를 실현해 달라 요청을 드립시다!”

    * * *

    “부윤 어르신!”

    소씨 가문의 총관인 소지가 분기탱천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 확고하게 약조를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모른 척하시는 것입니까!”

    부윤은 당장이라도 눈을 번뜩이며 화를 내고픈 충동을 억제하며 덤덤하게 반문했다.

    “본관이 무엇을 약조했소?”

    “당연히 저들에게 죄를 지우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소지가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하자 부윤이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소 총관. 본관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엄히 벌할 것이라 했지, 자네를 도와 죄도 없는 이를 중상하고 모략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조정엔 법도란 것이 있소. 본관은 법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오.”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이미 소씨 가문이 증인을 매수한 것이 모두 까발려진 마당에, 여기서 더 일을 벌이라니? 부윤을 때려치우라는 말과 같은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전이야 모른 척 사정을 봐줬지만, 이젠 일이 커질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어찌 소달과 같이 있다가 흙탕물을 뒤집어쓰란 말인가?

    총관인 소지가 부윤을 말로 이길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부윤이 돌연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소 장군께선 장군이시라지만, 한낱 총관인 자네가 본관 앞에서 이런 위세라니 가당찮구먼! 여봐라!”

    곧 수하가 나타났다.

    “네!”

    부윤이 손을 휘둘렀다.

    “소 총관을 모시고 나가거라!”

    소지가 크게 분노하여 소리쳤다.

    “지금 입 닦고 모른 척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부윤이 수하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네!”

    수하들이 큰소리로 대답을 하곤 소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화가 난 소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오천랑(吳天朗: 부윤의 이름)! 감히 소씨 가문을 이리 막 대하다니, 소 장군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부윤의 신색은 평온했다.

    총관이 끌려나가자 부윤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자네가 좀 더 예의 있게 나왔다면 본관이 언질이라도 해줬을 텐데. 이리 방자하게 군것은 자네니, 소씨 가문이 무너질 때 본관이 돕지 않았다고 냉정하다 말하지 말게.”

    때마침 들어온 고문이 그의 혼잣말을 듣고는 웃으며 물었다.

    “나리, 화가 나신 것입니까?”

    그러자 부윤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관이 화가 날 게 무엇인가? 소달이 곧 고꾸라지게 생긴 것이 사실인 것을.”

    부아 앞에 있던 서생들은 걸음을 돌려 정양문(*正陽門: 내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정양문은 정사당(政事堂)과 어사대(御史臺), 통정사(通政司) 등 여러 이름 높은 관청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향한 이상 폐하까지 경동(驚動)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그깟 서생 나부랭이 몇 명 쥐고 흔드는 것쯤 별것 아니라 생각했겠지만, 소달도 저들이 이렇게까지 크게 일을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꾸민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녕 기재가 따로 없군. 앞으로 조정에 발을 들이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르게 될지, 감히 짐작하지도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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