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90)화 (190/385)
  • 190화. 길거리에서 열린 판결

    한등의 구호에 주변 사람들도 함께 한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인, 공당을 옮기셔서 공명정대함을 드러내십시오!”

    ‘서생 놈들!’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에야 부윤은 자신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자신이 없는 것이냔 말로 시작해놓고, 다음엔 공명정대란 사탕 같은 말로 부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끼리 피리 불고 비파까지 다 켰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나리.”

    그때, 부윤의 보좌진 중 하나인 고문이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더 거절하시면 저들의 화를 살 수 있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잘못하면 상부에까지 소식이 들어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더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부윤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겠군. 여러분들이 그리 분명하게 약조를 했으니 이번엔 본관도 모두가 원하는 대로 따라드리겠소. 그러나 공당의 질서를 어지르지 않겠다는 그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희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라도 누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제가 먼저 부윤 나리 앞에 서겠습니다!”

    “저 역시 그리하겠습니다!”

    “나리, 마음 놓으십시오!”

    이윽고 수하들이 공당의 상과 의자를 가지고 나오자 부윤이 올라가 앉으며 말했다.

    “용의자를 대령하라!”

    드디어 부아 밖으로 나오게 된 지장과 일행들은 역시나 밖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고 매우 놀랐다.

    “지장!”

    대희가 지장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자네들의 무고함을 증언하기 위해 이곳에 왔네! 자네들이 진정 악의를 품고 타인에게 상해를 입힌 것이라면, 오늘 부윤 어르신께서 어떤 판결을 내리시든 우리는 두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네들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면, 우리는 관직에 나가 공명(功名)을 세울 기회를 잃게 될지라도 반드시 상고(上告)하여 신원(伸冤)할 것이다!”

    “옳소!”

    한등이 카랑카랑,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소씨 가문이 제 가문의 권세를 믿고 자네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면, 우리는 천하에 있는 모든 서생을 위하여, 그리고 자네들을 위해 반드시 정의를 되찾고 말 것이네!”

    한등의 말은 서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그 말이지!”

    서생들에게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던가! 소씨 가문이 그리 중요한 것을 함부로 더럽힌 것도 모자라 일신의 장래마저 망가뜨리려 하였으니, 세상에 어떤 서생이 이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겠느냔 말이다! 

    부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대체 누가 입을 놀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말마다 명치를 치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독해도 이만저만 독한 게 아니었다.

    ‘내 이럴 것이 아니라 더 고생할 것 없이 그만 증거들을 내밀고 싹 다 치워야겠구먼!’

    경당목을 내려친 부윤이 소리쳤다.

    “조용! 원고를 대령하라!”

    부윤의 명령에 소씨 가문의 총관이 나타났다.

    사실 총관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편히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당이 부아 밖으로 옮겨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많은 서생이 호시탐탐 저를 노려보고 서 있자 총관은 저도 모르게 스멀스멀, 불길한 생각이 올라왔다.

    ‘설마하니 무슨 이변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내심 중얼거리던 총관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을 다잡았다.

    ‘부윤 나리가 우리 편인데 겁낼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사건을 뒤집고 싶어도 저쪽에서 증거를 찾을 수나 있겠어?’

    이윽고 지장 일행과 소씨 가문의 총관이 서로 인사를 마치자 부윤이 입을 열었다.

    “공당에 있는 양측 중 어느 쪽이, 무슨 일로 소를 제기한 것인지 말하라.”

    그러자 소씨 가문의 총관이 입을 열었다.

    “소인은 금군통령, 소 장군 댁의 총관으로 있는 소지(蕭志)라 합니다. 지장과 공명, 상우 등 서생들이 제 가문 공자님의 목숨을 해하려 모살 음모를 꾸몄으므로 저는 제 주인의 명에 따라, 이에 소를 제기하는 바입니다. 소장(訴狀)은 이미 올려드렸으니, 부윤 나리께선 열람하여 주십시오.”

    총관의 말을 듣고 있던 주변 서생들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번졌다.

    소염에게 상해(傷害)를 입힌 것이 진짜 지장 일행인지에 대해서는 우선 차치하고라도, 총관이 제기한 소가 너무도 악의적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두고 모살 음모라는 것인가? 분명 무리 대 무리가 싸움을 벌이다 물에 빠진 것이 아니었던가! 설령 소염이 다치게 된 것이 진정 그들의 탓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을 뿐이 아니냔 말이다!

    우연한 상해와 모살(謀殺)은 글자 수만 같은 두 글자지, 그 성격은 전혀 달랐다. 더구나 거기에 음모(陰謀)까지 더하다니, 이리 악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거만과 위세를 부리는 것에 익숙했던 소지는 서생들의 감정 따윈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증인 역시 저희가 모두 올려드렸으니 그도 함께 봐주십시오.”

    내심 한숨을 내쉰 부윤은 소씨 집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했다.

    소씨 가문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문이라지만, 가문의 총관이라는 자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되는 데까지는 해보는 수밖에.’

    그 사이 소씨 가문에서 올린 소장을 꺼낸 서기가 내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모여 있던 서생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사실 왜곡의 본보기가 있다면 바로 이 소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저 혈기에 한판 뜬 것을 두고 모살 음모라 이름을 붙인 것도 모자라, 소장에는 지장 일행의 손속이 무척이나 잔인하다고 적혀있었다. 지장 일행이 노를 손에 쥔 채로 소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때가 오자 그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면서 말이다.

    소장 낭독이 끝나자 증인이 올라왔다.

    “나리!”

    그때 대희가 목소리를 냈다.

    “저들은 뱃일하는 일꾼들입니다. 비록 집안 하인에 들어가진 않으나 그들의 생계가 모두 저들의 손에 달려있는데, 일꾼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총관이 입을 열려고 하자 부윤이 막으며 말했다.

    “조급하게 나서지 마시오. 증인은 더 있소.”

    그리고 제 수하에게 다른 증인을 데려오라 명령했다. 새로 올라온 증인은 여행객이었다.

    여행객은 아주 점잖아 보였는데, 제 말로는 외지에서 온 상인이라 했다.

    일이 있던 그 날 밤, 그는 장락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사고가 있던 두 놀잇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지라 소염이 머리를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희가 물었다.

    “그날 일이 있던 놀잇배 주변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것이 음모였다 확신하는 것이오?”

    상인이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은 소 공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근처로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금방 누군가의 발에 차여 뱃전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오. 그리고 노가 소 공자의 머리로 날아왔고 배 아래로 떨어졌소. 그 일에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많이 모여 있던 이들에겐 그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고, 아직 그쪽으론 가지도 못한 이에게만 그런 불운한 일이 벌어졌겠소?”

    대희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부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아닌가?

    소지가 곧바로 나서서 증언을 보충했다.

    “나리, 저희 공자님의 다리에는 아직 멍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당시 분명 누군가의 발에 차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부윤이 입을 열었다.

    “더 할 말이 있소?”

    지장이 입을 열었다.

    “나리, 서생들도 자신을 위해 변론해도 되겠습니까?”

    “허하겠다.”

    지장이 다시 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우리 중 두 사람이 손을 써야 했단 말이 되오. 하나는 소염을 발로 차야 했고, 다른 하나는 노로 소염을 때려야 하오. 맞소?”

    “그렇소.”

    지장이 제 일행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날 밤에 우리 일행들은 모두 뱃놀이를 갔었소. 그러니 당신이 지목해보시오. 누가 발로 찬 사람이고, 누가 때린 사람이오?”

    상인이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일행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분별이 되지 않소.”

    지장이 차갑게 말했다.

    “소 공자는 누군지 알겠고, 우리는 분별이 안 된다 이 말이오?”

    상인이 웃음을 지었다.

    “그날은 어두운 밤이었는데, 어떻게 얼굴을 구분하겠소? 내가 본 것은 누군가 물에 빠진 것이었소. 다들 소 공자란 사람이 빠졌다고 했으니 아마 그렇지 않겠소? 혹, 다른 사람이 또 물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면 말이오.”

    거짓말도 참으로 매끄럽지 않은가!

    소년들은 답답함에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더욱 화가 났다.

    그사이 한등은 제 편의 증인을 데려오기 위해 무리에서 잠시 몸을 뺐다.

    ‘말 만들어 내는 거 못하는 인간도 있냐?!’

    비록 자신들에겐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은 없었지만, 간접 증인은 넘치지 않던가!

    ‘그들을 모아서 내 난리 한 번 떨어주마!’

    그런데 그때 시동으로 변장한 서아가 달려오더니 한등의 손에 쪽지 한 장을 쥐여주는 게 아닌가?

    “빨리, 빨리 대희 공자님께 전해!”

    잠시 길가에 세워진 마차에 시선을 보낸 한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쪽지를 전해 받은 대희가 쪽지를 펼쳤고, 그의 미간에 잡혔던 깊은 주름 역시 활짝 펼쳐졌다.

    “부윤 나리,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서생에게 증인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대희가 입을 열었다.

    “사건이 있던 그 날은 밤이었습니다. 저희가 장락지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사건을 목격했는지를 물었을 때, 다들 너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증인만이 저희 일행이 소 공자를 때려 물에 빠뜨리는 것을 보았다고 확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서생은 증인의 시력에 대해 반드시 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인 대희의 말에 부윤은 슬쩍 상인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은 눈빛이 다소 흔들리긴 했지만,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 시력은 어떻게 검사하실 생각이시오? 설마 밤까지 기다렸다가 실제 현장에서 훈련이라도 하게 하실 셈이오?”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소이까.”

    대희가 몸을 돌리더니 옆쪽에 있는 음식을 파는 노점 한 곳을 가리켰다. 가게엔 깃발이 걸려 있었는데, 오늘 아침나절에 막 새로 걸은 것이었다.

    “지금은 대낮이라 빛도 충분하여 밝소. 그러니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밤에 보는 것보다 더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오. 증인은 저 깃발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말해 주시겠소?”

    모인 서생들이 우르르 고개를 돌려 대희가 가리킨 노점의 깃발을 보았다.

    누군가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옆 친우에게 물었다.

    “무슨 글자인가? 난 안 보이네.”

    그러자 옆에 있던 친우가 얼른 나서서 주의시켰다.

    “쉿! 조금 있다가 말하게! 저자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때, 대희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떠시오? 보이시오?”

    그러자 상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운 글자가 몇 개 되지 않아,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아마 점포의 명호이거나, 아니면 싸고 좋은 물건을 취급한다는 호객용 글자가 아닌가 싶소.”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대희가 호통을 쳤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군! 정녕 저 깃발에 쓰여 있는 글자를 모른단 말인가!”

    “공자를 실망하게 하여 미안하오만, 정말 모르오. 겨우 상행이나 하는 나 같은 자와 공자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

    말을 하던 상인은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소씨 가문 총관의 눈빛이 그렇게 흉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야? 왜, 뭐가 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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