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9)화 (189/385)
  • 189화. 할 일 없는 서생 놈들

    무슨 악재인지 지난 상처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다친 소염의 머리는 제철 맞은 수박처럼 남의 손에 얻어맞아 쩍쩍 갈라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엔 물에 빠지기까지 하는 바람에 그는 내상까지 입었다.

    태의(太醫)를 배웅하고 돌아온 소달에게 그의 부인이 눈물을 뿌리며 원망을 쏟아냈다.

    “태의가, 벌써 여러 번 연달아 다친 터라 이대로 낫는다 해도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답니다, 노야! 이리되는 바람에 염이의 혼례가 늦어지게 생긴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이미 준비해준 관직에 임관하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그것들의 판결은 왜 아직도 나지 않는 것이에요, 왜요!”

    며칠을 같은 소리에 시달리고 있던 소달도 이미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바깥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당신은 아이나 잘 돌보고 있으시오.”

    그도 생각하면 할수록 속에서 화가 치솟는지라 재촉하는 서신을 부아(府衙)로 보냈다.

    어서 이 사건을 마무리해야 조금이나마 분이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 * *

    한편, 바쁘게 업무를 보던 부윤은 그와 같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말했다.

    “어차피 증거도 확실하겠다, 그럼 어서 사건을 마무리해야겠군.”

    경조윤(京兆尹)이란 자리는 본래 아무나 쉽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능력이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나거나, 아니면 교활하거나.

    지금의 부윤은 날로 보나 등으로 보나 후자였다.

    당금(當今), 소달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크기만 했고, 그에 반해 상대는 겨우 서생 나부랭이들이었다. 거기다 소달 측에서 증거마저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았던가! 사정 한 번 들어주고 등 한 번 떠밀면 모른 척 밀려주면 되는 것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혹 서생 쪽에서 누구 찾아오는 이는 없는지 그가 며칠 말미를 두고 기다리기까지 했으나, 입질이라고 오는 이들이라곤 하나같이 별 볼일이 없었다.

    ‘기댈만한 뒷배가 없다 이건가? 그럼 내 소달의 원을 이뤄줄 테니 너무 억울해들 마시게!’

    * * *

    “재판을 시작한다!”

    지장과 다른 동창들이 다시 재판장으로 끌려 나왔다.

    경당목(警堂木)을 내려친 부윤이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들의 죄를 인정하는가!”

    하지도 않은 행동으로 억울하게 며칠씩 갇혀 있던 소년들은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런 그들이 죄를 인정할 리가 있겠는가?

    소년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 저희가 저지른 일이 아닌데 무슨 죄를 어떻게 인정한단 말입니까!”

    “증인이라 하는 이들도 전부 하인들이니, 애초에 인정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나리, 이런 식으로 사건을 판결하시다니 너무 경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분명 저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 목숨을 잡초나 다름없이 보시는 겝니까!”

    크게 노한 부윤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증거가 이리 명확한 데 아직도 인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감히 본관의 명예까지 모독하다니! 자네들이 죄를 뉘우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엄히 죄를 물을 수밖에!”

    부윤은 빠르게 판결을 내리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가 막 손을 휘둘러 판결을 내리려 할 때였다. 부하 하나가 소리치며 빠르게 달려오는 게 아닌가?

    “큰일, 큰일입니다! 나리!”

    부윤은 기분이 상했다.

    ‘큰일은 무슨 놈의 큰일이냐! 말을 제대로 해야지!’

    “무슨 일이냐!”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망설이던 부하가 입을 열었다.

    “직접 나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리.”

    그 말에 부윤은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사품 관료인 이 몸이 직접 움직여야 한단 말이냐! 관밥 축내는 것들만 해도 몇이나 되는데!’

    그나마 눈치 빠른 부하들이 부윤의 얼굴을 보고 금방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나간 부하마저 다급한 발걸음으로 돌아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리, 아무래도 나리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부하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부윤이 밖으로 나섰다.

    밖을 나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심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래 봤자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진정(陳情)하겠다는 걸 가지고 호들갑들은! 그게 무슨 하늘 무너질 일이야? 이 큰 도성에 사건만 몇 건인데, 억울하다 외치는 사람 하나 없던 날이 있었냐고! 여럿이 진정(陳情)을 하러 온 게 무슨 큰일이라고. 에잉, 쓸모없…….’

    쓸모없단 말이 머리 뒤편으로 사라진 부윤은 부아(府衙) 앞에 모인 이들을 벙벙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여럿이 진정(陳情)하겠다며 모여 있긴 했다.

    ‘아니, 여럿이라지만 이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 * *

    여강(吕康)은 마름을 먹고 있었다.

    마름 껍데기의 양 끝을 잡고 힘을 주자 가운데가 쪼개지며 갈라졌다. 그리고 껍데기를 비틀자 하얗게 윤기가 반질거리는 마름 과육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입에 하나씩 마름을 입으로 가져가는 여강은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안 먹을 것이냐?”

    여강이 바쁘게 먹다 말고 물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흔드는 루안의 시선이 마름을 쪼개느라 까맣게 변한 여강의 손을 스쳤다.

    루안의 눈길을 느낀 여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갓집 공자님은 대갓집 공자님이로구먼. 고상해 뵈지 않아 그런가?”

    루안이 대답했다.

    “북양엔 마름이 없습니다.”

    “무애해각엔 있었지 않은가?”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애해각 옥형선생의 서재 밖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선생께서 그곳에 마름나무를 심으셨었다.

    매년 마름이 익는 시기가 오면, 그 앞에 앉아 오매불망 마름만 바라보던 이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꼭 물고기가 자라기만을 기다리는 고양이 같았다.

    의안왕은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서원 밖에서 마름을 사다 주었었다. 그때 그녀가 의안왕에게 말하기를, 익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이 귀중하다 했었다.

    이렇듯 어떤 이는 배우지 않아도 세상에 존재하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는 법을 당연한 듯이 깨닫는다.

    그것은 빈(貧)이나 부(富)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소씨 가문의 일이 그리 급한가?”

    여강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막 통정사에 들어갔잖은가. 이리 급하게 상대편을 제거하려는 건, 너무 서두는 게 아닌가?”

    루안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회는 금방 지나가지요. 이대로 놓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루안의 판단력을 신뢰하는 바가 아니던가.

    “더구나 상대편을 제거하는 일 역시 한두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제대로 약을 쳐놓지 않으면 늦을 것입니다.”

    결국, 여강은 루안의 설득에 넘어갔으나 그를 놀리며 입을 열었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로구먼! 사실 이것도 다 그 소저 때문이면서.”

    루안이 부정하지 않자 여강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알겠네! 우리 꼬마 사제가 마음에 품은 가인(佳人)을 위해서라는데, 사형이 되어서 한 손 안 거들 수 없지!”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형!”

    여강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앞으로 날 좀 덜 찾아오면 되네.”

    덜 찾아와야 귀찮은 일들도 덜 할 게 아닌가!

    * * *

    부윤은 그만 눈이 다 풀릴 지경이었다.

    웅성거리며 모인 인파가 관부 앞 대로변을 거의 메울 지경이 아닌가!

    가장 앞쪽을 채운 이들은 소년 무리로, 잡혀 온 서생들과 비슷한 또래들로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론 소년들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젊은 서생들이었는데, 문사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구먼! 도성의 책벌레들이 다 튀어나왔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기까지 와서 뭣들 하는 것이야? 할 일들이 그렇게 없나?’

    속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쳐대는 부윤의 손이 파들파들 떨려 왔다.

    내심 욕을 퍼붓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서생들이 일을 벌였던 것은 언제나 작은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지금 그가 쓰고 있는 오사모(*烏紗帽: 과거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관모)가 날아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정신을 바짝 차린 부윤은 모인 서생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생 여러분, 무슨 일이시오? 고발을 원하거든 고발장을 전하거나, 서면으로 제출을 하십시오. 서기(書記)가 있는 곳에 가서 등록하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여러분들이 대로를 막고 있으면 부아(府衙)에 볼일이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 일을 보겠소? 공무에 방해가 되지 않겠소?”

    그러자 대희가 부윤을 향해 장읍(*長揖: 두 손을 맞잡아 앞으로 뻗으며 눈높이만큼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혀서 하는 인사)으로 예를 갖추며 앞으로 나섰다.

    “부윤 나리, 실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희는 고발이나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공무에 누를 끼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며, 저희는 그저 동창의 억울함을 진정(陳情)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진정(陳情)하러 왔다면, 본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공무집행에 지장이 생기는 것 역시 피하기 어려운 바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본관이 마침 그 사건을 보는 중이었으니,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여러분 중 몇 명이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소. 지금 모인 인원은 너무 많아 부아(府衙)에 모두 들일 수가 없으니, 대표 몇 명을 뽑아 주시오!”

    인원을 모아 진정을 한다는 것은 사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세를 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서생들이 여기서 한발 양보해 인파를 흩어 놓을 수만 있다면, 그 뒤의 일은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윤의 속셈은 대희에게 먹히지 않았다.

    대희가 목청을 놓여 소리쳤다.

    “나리, 저희는 모두 이곳에 자발적으로 모였기에 대표가 없습니다! 만약 이 사건에 존재하는 많은 의문점을 깨끗하게 풀어내지 않는다면 앞으로 부윤 나리의 청렴한 명성에도 분명 영향이 가게 될 것입니다! 나리, 부아(府衙)에서 저희를 모두 수용하실 수 없으시다면, 차라리 나리께서 공당(公堂)을 이곳으로 옮겨오심이 어떠십니까? 그리하셔서라도 부디 죄의 유무를 모두가 있는 이곳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옳소!”

    뒤에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윤 어르신, 이곳에서 사건을 판결해주십시오!”

    부윤은 속으로 쌍욕을 내질렀다.

    ‘요즘 서생 놈들을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들이야! 대체 무슨 서책을 읽었기에 이리 교활하기가 늙은 구렁이 저리가라인 것이야!’

    분명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부윤인 제 명성인데 어쩜 저리 간절하게 말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거절도,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게 만들고 있었다.

    “서생 여러분…….”

    부윤은 제 성질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설득을 해보려 입을 열었다.

    “부아의 사건 판결이 이루어지는 공당(公堂)의 위엄이 있는데 길거리에서 판결이라니, 그것은 너무 체통 없는…….”

    부윤이 제 말을 마치기도 전이였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장하고 사람들 틈에 끼어있던 한등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없으신 것입니까, 나리?”

    부윤은 울컥 핏물이 솟구치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말을 하는데 끝까지 들어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만 그래?’

    그러나 한등의 한마디는 이미 다른 이들의 마음에 의심의 불길을 일으킨 뒤였다.

    “나리, 저희는 다른 것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리께서 판결하시는 것을 듣겠다는 것뿐인데, 이마저도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리! 저희는 반드시 합리적인 의문점만 질문을 드리겠다, 약조하겠습니다. 절대 공당(公堂)의 질서를 어지르지 않겠습니다!”

    “부윤 나리! 부윤 나리의 공명정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공당의 가장 커다란 체통일 것입니다!”

    한등이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나리, 공당을 옮기셔서 공명정대함을 드러내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