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8)화 (188/385)
  • 188화. 여론을 만드는 과정

    “언니, 언니는 뭐 본 거 있어요?”

    갑자기 시비가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자 류명주는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빙분 그릇을 들었다.

    “날이 그렇게 어두웠는데, 누가 뭘 알 수나 있겠어? 어서 먹고 그릇 돌려주고 와.”

    “하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말고는 본 사람들도 몇 없죠? 하인들은 증언을 해봐야 인정도 안 되고, 어휴!”

    그렇게 류명주가 빙분을 몇 숟가락 떴을 때였다.

    골목길로 한 무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문사의 복색을 한 그들은, 묵향이 잔잔하게 날 것 같은 십 대부터 이십 대까지의 점잖은 서생들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그리 많은 서생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일은 워낙 드문 일이었던지라, 일대에 소동이 일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어디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서생이 나타난 거야?”

    “무슨 일을 알아보러 다니는 중인가 봐.”

    류명주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서생 몇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아주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그녀의 배에 올랐다.

    “실례하겠습니다. 저희는 천수서원의 서생들입니다.”

    류명주와 다른 이들도 급히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이곳엔 무슨 일들이시온지…….”

    그러자 서생 중 하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낭자. 저희는 그저 여쭤볼 것이 있어 찾아온 것입니다.”

    * * *

    하루 전.

    세 장의 종이에는 세 단어가 적혀 있었다.

    유신지가 쓴 단어는 ‘서생’이었고, 루안이 쓴 단어는 ‘문무(文武)’, 그리고 지온이 쓴 단어는 ‘여론’이었다.

    유신지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저희는 주유와 제갈량만큼 맞을 순 없나 봅니다.”

    “쓴 단어는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뜻은 같으니까요.”

    지온의 말에 루안이 검지로 종이를 툭 찍으며 말했다.

    “딱 좋은 게 아닌가? 전체 계획이 전부 나온 것 같군.”

    유신지의 ‘서생’은 서원에서부터 손을 쓰자는 뜻이었다. 함께 배움의 길을 가는 서생들을 선동하여, 함께 둔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면 되었다. 루안의 ‘문무’는 이 일을 문(文)과 무(武)의 대립으로 끌고 가게 만드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지온의 ‘여론’은 말을 퍼트리고 퍼트려, 도성에 이 일을 모르는 이들이 아무도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지온이 세 장의 종이를 향로에 던져 넣었다.

    “소씨 가문에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원하는 대로 들어주려고요. 길고 짧은 건,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논의를 끝낸 세 사람은 각자 흩어졌다.

    지온은 대희에게 사람을 보냈고, 유신지는 원겸을 찾아갔다.

    그리고 루안은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패를 쥔 이, ‘그’에게로 향했다.

    * * *

    “3일 전, 장락지에서 배가 충돌하고 사람이 물에 빠지는 일이 있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역시 그 일을 묻는 것이었다.

    시비와 일꾼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일이 워낙에 난리가 컸습니다.”

    “네, 그랬지요!”

    다른 서생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 중 한쪽이 저희 동창들입니다. 지금 제 동창들이 일부러 상해를 입혔다는 오해를 받고 부아(府衙)에 잡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 목격자를 찾는 중인데, 혹시 여러분들 중에 보신 분들이 있으신지요?”

    일꾼이 대답했다.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조금만 멀어도 보이는 것이 없는지라 도움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인사를 한 서생이 배에서 내렸다.

    돌아가는 서생의 뒷모습을 보던 시비가 입을 열었다.

    “역시 먹물 먹은 서생들이라 그런지 그때 그 방탕한 공자들보다 훨씬 예의가 바르네요. 그렇죠, 언니?”

    작게 대답한 류명주가 다시 비파를 들더니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 * *

    한편, 금방 골목 구석에 도착한 대희가 마차에 올랐다.

    “지온 동생! 동생이 말한 류 낭자에게 동창이 찾아가 물어봤다는데, 류 낭자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네.”

    지온이 대답했다.

    “기녀일 뿐인 그녀로서는 감히 소씨 가문의 미움을 산다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쩌면 좋겠나?”

    “이번에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소씨 가문에서 거짓말을 저리 강하게 물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저희도 그렇게 물고 늘어지면 되는 것이지요. 저들이 말하는 증인은 모두 제 집안 배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하인들이니 신뢰도가 낮습니다. 그러니 억울하게 당했다는 얘기만 제대로 퍼트릴 수 있다면 많은 사람과 함께 사건 진정(*陳情: 사건의 실정이나 사정을 진술함)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침착한 지온의 모습이 대희를 안심시켰다.

    “알겠네! 내 가서 동창들에게 다들 한 사람당 서너 번씩은 물어볼 수 있게, 열심히 하라고 말하겠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물어봐야지!”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대희 오라버니.”

    대희가 손을 내저었다.

    “이 일에 나도 끼어있었으니, 당연히 해야지.”

    대희가 떠나고 지온이 마차에서 내리자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이제 저희 어디로 갈까요?”

    지온이 물가에 떠 있는 놀잇배 한 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증인이 없어도 난리는 피울 수 있어. 하지만 증인이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

    * * *

    그 사이 류명주는 머릿속이 복잡하여 한 곡을 채 완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호숫가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류 낭자께서 계시는지요?”

    고개를 든 류명주가 비파를 내려놓고 뱃전으로 나갔다.

    “당신은…….”

    그녀의 시선이 지온에게 닿자 지온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류 낭자, 또 뵙습니다.”

    류명주는 지온을 알아보았다.

    “아…….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 명주가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날 진짜 신분으로 류 낭자를 만나기가 곤란했던 것은 저였지요. 류 낭자가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곤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배에 올라 말을 나눠도 될까요?”

    류명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시지요.”

    * * *

    서아와 함께 배에 오른 지온은 류명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류 낭자, 거짓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날 저희가 만났던 배는 제 소유의 놀잇배입니다.”

    류명주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잡혀간 서생 중엔 제 오라버니도 계시지요.”

    지온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선 이제 막 향시에 급제하여 이름 있는 스승을 모시고 회시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아(府衙)에 잡혀 있지요. 이대로 무고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아마 거인으로서 공명을 세울 수 없을지도 모르고 앞으로는 과거조차 보실 수 없을 수도 있지요.”

    그 말에 류명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지온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말을 돌리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짚었다.

    “그날 그 배에 류 낭자가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 고개를 든 류명주였지만, 지온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소 공자가 억지로 류 낭자를 방으로 끌고 갔었지요. 낭자의 기지가 빛나지 않았다면 그날 밤에 무슨 참혹한 일이 벌어졌을지는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류명주가 경악이 떠오른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 그것을 어떻게 아시는 것입니까?”

    “제 놀잇배가 마침 류 낭자가 타고 있던 놀잇배 옆을 지나쳤습니다. 본래 낭자를 구해줄 생각이었는데 낭자께서 몇 마디 말로 위험에서 벗어나시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참으로 대단하셨습니다.”

    다시 고개를 떨군 류명주의 표정에는 곤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지온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류 낭자, 낭자를 그리 대한 소 공자를 혼내주고 싶지 않으신지요?”

    잠시 말이 없던 류명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농이 과하십니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자격이 있어 누군가를 혼내줄 수 있단 말씀입니까.”

    “낭자께서는 그리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요?”

    지온이 되묻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관직이 높든 낮든, 아무렴 관료 가문인 저희 같은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소씨 가문이니 의지할 곳 없는 류 낭자는 오죽할까요. 이해합니다.”

    류명주는 지온이 심문하듯 추궁해올 것을 각오하고 이제 어떻게 대답을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온이 제 사정을 너무도 잘 이해해주고 나서자 도리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 소저…….”

    “낭자께서 나선다 해도 소씨 가문이 당장 무너지진 않을 것입니다. 괜히 증언하셨다가 류 낭자께서 보복이라도 당하면 안 되겠지요. 혹 단번에 소씨 가문이 무너지게 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리된다면 류 낭자의 명성에 협의(俠義)란 두 글자를 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온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류명주에게 예를 갖췄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 실례했습니다.”

    류명주가 급히 지온을 따라 일어나며 마주 예를 갖췄다.

    “아닙니다…….”

    다시 허리를 곧게 편 지온이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곤 두말없이 깔끔하게 돌아서 서아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류명주는 돌아서는 지온을 잡을까 고민하여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언니, 저 분 정말 좋은 분 같지 않아요?”

    시비가 감동한 듯 말했다.

    “다른 사람이었어봐요. 우리 같은 사람들, 죽든 말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래, 맞아…….”

    류명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소염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저 혼자 화가 나 자신을 강제로 선실로 끌고 들어갔었다. 만약 자신이 제때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날 소염의 손에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기녀의 목숨 따위,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

    * * *

    한편, 배에서 내린 서아가 의아한 얼굴로 지온에게 물었다.

    “아가씨, 저희 그냥 이렇게 가는 건가요? 류 낭자라는 사람, 표정이 이상한 게 분명 뭔가 아는 것 같았는데요.”

    지온이 웃었다.

    “그냥 안 가면? 목이라도 졸라? 소용없어. 류 낭자 같은 화괴낭자(花魁娘子)는 아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자라왔을 거야. 그러니 소씨 가문이 무너지기 전엔 그녀는 절대 나서지 않겠지.”

    “그럼 저희는…….”

    “그래서 혹시 단번에 소씨 가문이 무너지게 된다면 모르겠다고 말했던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류 낭자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적절한 시기를 만들어 류 낭자 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녀는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 * *

    얼마 지나지 않아 류명주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락지로 모여드는 서생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천수서원뿐만이 아닌 국자감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외부에서 과거를 보러 온 이마저 나타났다.

    그들이 내는 소문에,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하나같이 그 일을 두고 입방아들을 찧었고, 심지어 이는 흥을 돋우려 그녀를 초대한 문회(文會) 자리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되어있었다.

    어느새 소씨 가문은 사림(仕林)의 공적(公敵)이 되어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