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7)화 (187/385)
  • 187화. 목소리를 내야 하나

    한편, 장씨 부인을 보낸 지온은 바로 난택산방을 찾았다.

    그녀는 대장공주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전하며, 말미에 덧붙였다.

    “소씨 가문이 이렇게 나오는 건, 확실히 제 예상을 벗어나긴 했습니다. 전 저들의 머리가 좀 더 똑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 말투가 꼭 저들이 바보짓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이 들리는구나?”

    지온이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사실 소년들의 치기 어린 주먹다짐일 뿐, 별다른 일도 아니지요. 그랬던 사소한 일을 소씨 가문이 구태여 크게 만드는 것을 보니, 저들 스스로 사건을 크게 만들고 싶나 봅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본궁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겠구나.”

    지온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어머니께선 수행 중이시지 않으십니까? 이런 일엔 참여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황궁에서 눈물 바람으로 통곡하셔도 전만큼 효과를 못 보지 않으시겠는지요?”

    대장공주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뜻대로 하마!”

    황제가 대장공주에게 이토록 관용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정사(政事)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강왕부와 황제가 서로 충돌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결국은 권력다툼이었다.

    지금의 황제에겐 자신의 입장이란 것이 생겼다. 그 황제에게 적(敵)과 내 편인 관계가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3년 전과는 입장이 다르지 않겠는가?

    * * *

    소식을 접한 유신지가 발 벗고 나섰다.

    “아버지, 이 일은 제가 해결해보겠습니다.”

    유 태사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유신지를 쳐다보았다.

    “네가 무슨 수로? 소씨 가문은 지금 복수를 하는 것이다.”

    “방법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유신지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겨우 이깟 일에 아버지까지 얼굴을 비출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소씨 집안이 뭐라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때, 유모지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숟가락을 얹었다.

    “형, 나도 도울게.”

    그러자 돌연 웃음을 싹 지운 유신지가 유모지를 퍽 때렸다.

    “가서 할 공부나 하거라. 다섯 달만 있으면 회시다. 통과하지 못하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것이다. 알았느냐?”

    “…….”

    시든 배추처럼 늘어진 유모지는 감히 제 형에게 대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입만 삐죽이다 다시 서책을 외우기 위해 돌아갔다.

    * * *

    유신지는 바로 조방궁을 향해 나섰다.

    그가 조방궁 입구를 지나던 그때 익숙한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루안! 여긴 웬일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루안은 정말이지 한 대 치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참 무시할 때, 유신지는 친한 척을 하긴 했지만, 그나마 예의 있게 루 형이라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무시하질 않으니 이젠 대놓고 루안이라 불러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자넨?”

    유신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루안을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딱 보니까, 우리 둘 다 같은 일 때문에 온 것 같은데?”

    루안이 부정하지 않자 유신지가 그의 어깨에 팔을 척하고 걸치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한 방법은 있나?”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둔 게 있네.”

    “잘됐군. 나도 생각한 게 하나 있긴 한데…….”

    * * *

    두 사람이 사방전에 도착했을 때, 지온은 이미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지 두 분께서 봐주세요.”

    유신지가 반색했다.

    “지온 소저도 방법을 생각하셨습니까! 실은 저희도 각자 생각해온 것이 있어서 말이지요.”

    지온이 웃었다.

    “주유와 제갈량이 그랬듯이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내렸는지 시험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런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유신지가 환영하고 나섰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마땅히 따라야지요! 제갈량과 주유가 적벽대전 전에 그랬듯이 각자 생각한 방법을 손바닥에 쓰고, 동시에 펼쳐 봅니다! 모두의 생각이 같을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서아야, 붓과 먹을 가져와.”

    각자 종이 한 장씩을 가져간 세 사람은 제가 생각한 방법을 각자의 종이에 썼다.

    그리고 세 사람의 종이가 동시에 펼쳐졌을 때,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하늘의 뜻이었네요.”

    * * *

    분기탱천한 대희가 서원으로 들어섰다.

    성격이 시원시원한 대희는 언제나 인기가 많아, 금방 그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

    “대희! 네가 벌써 공부하러 서원엘 온 거냐? 과거 결과 방이 붙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부지런한 게 너답지가 않은데?”

    그러자 대희가 대답했다.

    “공부는 무슨 공부! 우리가 무슨 수치를 당했는지는 알고 있냐?”

    대희에게 말을 걸었던 이가 궁금증에 되물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그게?”

    대희가 손을 휘두르며 주변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다들 이리 좀 와봐! 와서 내 말 좀 들어봐! 이틀 전에, 우리가 장락지로 뱃놀이를 갔는데…….”

    대희가 장락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 지장이랑 공몽, 다른 아이들 전부 다 잡혀갔다니까!”

    대희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들 모두 경악했다.

    “뭐? 소씨 가문이 그렇게 횡포하게 나온다고? 공자를 너희가 민 것도 아니고, 너희는 물에 빠진 것을 찾는 것도 도와주기까지 했다며!”

    “내 말이! 지금 애들이 전부 부아(府衙)에 잡혀 있는데, 날만 잡히면 바로 판결이다. 이러다 진짜 유죄라도 받으면, 앞으로 무슨 앞날을 논할 수가 있겠냐?”

    사람의 목숨을 음모를 꾸며 해치려고 했으니, 거인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고, 심하면 앞으로 다시는 과거를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배움의 길을 가는 이에게 있어 과거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흥분한 소년들이 들고일어났다.

    “우리 천수서원을 물로 봤다 이거지, 지금?”

    “그러니까!”

    대희가 불난 소년들에게 기름을 끼얹었다.

    “소염, 그 거만하고 방탕한 공자 하나가 우리 동창 열댓 명의 앞길을 말아먹겠다는 거잖아, 지금! 소씨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네!”

    “부윤이 이걸 그냥 놔두고 있는 거냐?”

    “너 바보냐? 부아(府衙)에서 사람을 잡아간 걸 보면 모르겠어? 부윤도 이미 소씨 가문에 넘어간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공정하게 사건 판결도 못 할 거면서, 감히 부윤 자리에 있어?!”

    대희가 얼른 비뚤어지려는 주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부아(府衙)의 일은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아무튼 소씨 가문이 이렇게 사람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걸 우리가 어떻게 그냥 두고 보냐?”

    “그렇지! 동창끼리의 우의도 우의지만, 이렇게 법과 규율을 무시하고 횡포를 일삼는 소씨 가문을 절대 가만두고 봐선 안 돼!”

    “가자! 당장 선생님을 뵈러 가자!”

    “그래, 가자! 그리고 다른 동창들도 불러! 아직 서원으로 돌아오지 않은 동창들도 전부 오라고 해!”

    * * *

    국자감.

    한 무리의 유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들 그 이야기 들었나? 천수서원이 들고 일어났다더군.”

    “그게 무슨 소린가?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그 일이라면 내가 알고 있네.”

    대답한 이를 바라본 이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원겸, 자네 아주 소식에 밝구먼! 어서 말을 해보게!”

    원씨 가문의 공자이자, 유신지의 친척 형님인 원겸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집안에 친인척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한마디 들어 알게 됐네. 이리된 일이라더구먼…….”

    이야기를 듣고 난 다른 이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소씨 가문은 어찌 그런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본래 누가 맞고 틀린 것도 없는 일이 아닌가. 소 공자가 물에 빠진 것도 저들이 밀어 빠트린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대놓고 보복을 해?”

    “나도 그리 생각하네.”

    원겸이 탄식하며 덧붙였다.

    “진짜 유죄가 나오면 잡힌 아이들의 앞날은 끝이라고 봐야겠지. 십수 년을 그리 고생하며 학업에 매달렸는데, 이런 일에 걸려 모두 날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어.”

    “내 선생께 들으니 이번 향시에 천수서원에서 소년 거인 몇이 나왔는데 아주 훌륭했던 모양이네. 그래서 국자감으로 데려오려 하셨던 모양이더구먼.”

    원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잡혀간 이들 중에 지장이란 이가 벌써 축(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간 모양이더군. 그리 생각하니 우리 사제라 볼 수도 있겠구먼.”

    축(祝) 선생은 여강이 지장에게 새로 찾아 준 선생이었다. 그는 국자감에서 유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때 원겸과 다른 학생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었다.

    유생들은 모르고 있던 좀 더 심층적인 관계를 알고 나자, 마음이 더 쓰이기 시작했다.

    “그랬단 말인가? 축 선생의 눈에 들었을 정도라면 분명 나이는 어려도 영재가 분명할 텐데, 소씨 가문의 손에 끝장나게 생긴 것이 아닌가?”

    “누가 아니라던가?”

    잠시 뜸을 들인 원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사실 그 아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네. 소씨 가문이 이렇게 나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같은 배움의 길을 가는 우리 같은 유생들이 그걸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원겸의 말에 다른 이들이 이구동성, 따라나섰다.

    “고민할 게 뭐가 있나? 소씨 가문이 대체 뭐라고! 그래 봤자 소졸 출신 아닌가! 무슨 복을 어떻게 쥐고 흔들었나 모르겠지만, 갑자기 몇 급이나 연달아 영전하더니 돌연 금군을 손에 넣은 것 아닌가! 그래놓고 이젠 사림(*仕林: 학업에 종사하거나 벼슬길을 준비하는 이들, 문관 벼슬을 말함)으로 손을 뻗어? 이건 조정에서 인물을 선발하지 못하게 만드는 처사가 아닌가!”

    “맞네! 앞날이 창창한 소년 거인을 이대로 끝내버리려 하다니! 이게 조정을 망가뜨리려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런 풍조는 절대 길게 두고 봐선 안 되네! 우리가 반드시 목소리를 내야지!”

    목적을 이룬 원겸이 덧붙이듯 한 마디를 보탰다.

    “자네들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그럼 나도 넣어주게…….”

    * * *

    정오의 장락지엔 손님이 드물었다.

    비파를 끌어안은 류명주도 드문드문 현을 튕길 뿐이었다.

    뱃전에 있던 시비가 군것질거리를 사러 갔던 일꾼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그러자 일꾼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 짝에 무슨 말들이 도는지, 사람이 원체 많아야지…….”

    시비가 찬합 안에 있는 차가운 빙분(氷粉)을 꺼내어 류명주에게 건네며 일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거, 우리와도 아주 상관없는 건 아니고…….”

    일꾼이 대답했다.

    “왜, 이틀 전인가 화방 두 척이 서로 충돌했었잖아? 류 누님도 그 배에 계실 적에 말이야. 그 소 공자인가 하는 공자가 누구한테 맞아서 머리통이 깨져서 물에 빠졌었잖아. 지금 그 집에서 부아(府衙)에다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고 그 사람들을 고발한 모양이야.”

    일꾼의 말에 흠칫 놀란 류명주가 목소리를 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그거 왜 소 공자와 패싸움 난 서생들 있잖아요. 벌써 다 잡혀갔다던데, 듣자니 날만 잡히면 판결을 받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류명주는 매우 놀랐다.

    “누님도 너무하다 생각하시는 거죠? 전에도 배들끼리 부딪쳐서 싸움이 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일이 커진 적은 없었는데……. 제가 가서 들어보니까 소 공자 머리도 서생들이 때린 게 아니고, 그 난리통에 자기들끼리 맞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 맞다, 맞아! 그때, 서생들이 물에 빠진 공자를 구하겠다고 도와주기까지 했었어!”

    시비가 말을 보탰다.

    일꾼이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가 없는걸, 뭐. 소씨 집안에서 소 공자 머리를 그쪽에서 터트린 거라고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고 있어서, 아마 죄를 면하기가 어려울 거야.”

    시비가 말했다.

    “난리 났네. 이거 죄인으로 몰리면 나중에 과거도 못 보는 거 아냐?”

    “그러니까 서생들 쪽 가문에서 증인을 찾는 중인 거지.”

    일꾼의 대답에 류명주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을 냈다.

    그날 밤, 그녀는 보았다.

    소염이 선실을 나갔을 때, 그녀도 소염의 뒤를 따라 나갔다가 그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손에 노를 들고 있던 공자가 혼란한 와중에 누군가에게 떠밀리며 노가 그대로 소염의 머리를 때렸다.

    ‘하지만, 얼굴을 밝히고 증언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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