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4)화 (184/385)
  • 184화. 옷장 속에서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밖에서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있는 선실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이런 놀잇배들은 선실의 구조가 단순하여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없었다.

    긴박한 순간, 루안이 옷장을 열어 그녀를 밀어 넣고 자신도 들어갔다. 그리고 옷장의 문을 닫는 순간, 선실의 문이 열렸다.

    옷장 문에 투각(*透刻: 구멍이 나도록 뚫어 조각하는 기법)된 꽃무늬 너머로 술이 잔뜩 오른 공자와 기녀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틀비틀 들어온 공자가 농을 지껄였다.

    “이리, 이리와 보아라. 요 예쁜 것아! 본 공자 가까이 와 보래도!”

    기녀가 교태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 부끄럽게!”

    몇 마디 말이 오가자 곧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온의 눈이 빠질 듯이 커졌다.

    ‘공자란 이들은 다들 이렇게 노골적인가?’

    열심히 보고 있는 지온의 눈앞이 갑자기 깜깜해졌다. 루안이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이다.

    루안은 이 곤란하고 난처하면서도 답이 없는 상황에 한숨만 나왔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그는, 좁은 옷장 안에서 다른 곳으로 몸을 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녀와 서로 몸을 맞댄 채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흡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 그렇게 그녀를 의지한 자신 앞에 저런 장면이라니.

    ‘이건 너무 잔인한 거지…….’

    그 와중에 지온을 보니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잔뜩 놀란 게 분명한데, 그에 못지않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이라니!

    ‘이런 모습을 보고도 나더러 태평하게 행동하길 바란단 말인가!’

    한편, 지온은 불만이 가득해 루안의 손을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런 상황을 접할 일이 살면서 얼마나 되겠는가? 끝까지 보지 않으면 당연히 아쉬울 게 분명했다.

    평소 규방의 규수로 살아온 그녀는, 화첩은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라 볼 수 없지 않던가! 당연히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가만, 가만히 있으시오.”

    루안은 결국 작게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러면 얼마 안 가서 들킬 거요.”

    그를 향해 돌아선 지온이 역시나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못 보게 하고 당신은 보고 있잖아요! 덕이 부족한 사람이나 혼자만 즐기는 거 몰라요?”

    루안은 지온의 머리를 열어서라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평소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갑자기 바보가 됐단 말인가? 이게 어딜 봐서 혼자 즐기는 거란 말이야! 위기의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하지만 루안은 그녀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안 보겠소.”

    지온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진짜요?”

    “진짜요.”

    루안은 속이 탔다. 제 몸에 어떻게 불이 붙을 줄 알고 자신이 저 광경을 본단 말인가!

    “그럼 내 눈도 가리지 말아요. 나도 안 볼게요.”

    루안이 천천히 손을 뗐다.

    지온은 루안이 진짜 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옷장에 기댄 채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무료하게 있던 지온이 손으로 제 목 주변 옷을 잡아 늘였다.

    남장을 위해 가슴에 두꺼운 천을 동여맸던 탓에 너무 답답했다.

    “저기, 너무 덥죠?”

    심심하던 차에 지온이 아무 말이나 걸었다.

    “음…….”

    루안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언제쯤 가려는 걸까요? 여기 너무 좁은데.”

    “음…….”

    지온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할 줄 아는 말이 ‘음’ 밖에 없어요?”

    옷장 안은 밖에서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등불 빛밖에 없어 어두웠다. 옷장의 어둠 속에 숨은 루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게 갈라졌다.

    지온이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갑자기 찬바람을 맞아 열이라도 나는 거예요?”

    지온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가자 루안이 그녀의 손을 치우며 고개를 돌렸다.

    “피할 건 없잖아요.”

    “난 괜찮으니, 움직이지 마시오.”

    지온은 루안도 무척 더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좁은 곳에 같이 있으니 확실히 덥긴 무척 더웠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고서야 밖이 조용해졌다.

    선실에 들어왔던 공자가 잠시 쉬고 난 후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공자…….”

    기녀가 그에게 달라붙어 왔다.

    “됐다. 나가서 네 것을 챙겨 가거라.”

    공자가 그녀를 밀어내며 말하자 눈치가 좋은 기녀는 교태를 부리던 모습을 단번에 바꾸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선실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이윽고 구석에 있던 옷장 문이 열렸다.

    지온은 기듯이 밖으로 나왔고 루안도 금방 빠져나왔다.

    그가 조금 젖어 있는 옷섶을 정리하며 물었다.

    “괜찮소?”

    네, 하고 대답한 지온이 말을 이었다.

    “더워 죽을 뻔했어요.”

    루안은 그녀의 머리칼이 좁은 곳에 끼어 헝클어진 것을 보고는, 구멍을 뚫어 놓은 곳으로 이동해 옆 선실을 살폈다.

    그가 옆 선실을 살피는 동안 지온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소염은요?”

    “옆방에 아무도 없소. 이미 간 것 같군.”

    지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디 있는지 찾아봐요.”

    “먼저 손을 쓸 생각이오?”

    지온이 이를 갈았다.

    “그자가 소소에게 복수하겠다잖아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기 전에 먼저 당신을 당신이 있던 놀잇배로 돌려보내겠소.”

    어느새 두 사람이 원래 탔던 놀잇배와 지금 타고 있는 놀잇배 사이가 꽤 멀어져 있었다. 선실에서 나온 루안이 휘파람을 불자 금방 원래 탔던 놀잇배가 가까워졌다.

    지온이 부러운 듯 말했다.

    “한등은 정말 능력이 좋네요.”

    “당신이 원하면 내가 괜찮은 이를 찾아서 보내겠소.”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양어머니께서 이미 암행 호위도 두 사람이나 붙여주셨어요. 그리고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잖아요. 인재는 데리고 있다가 당신이 필요할 때 써요.”

    루안은 더 말하지 않고 그녀를 놀잇배로 돌려보냈다. 그런 후에 그는 소염이 아직도 이 놀잇배에 있는지 확인한 후, 다시 지온과 있던 놀잇배로 돌아왔다.

    * * *

    장락지의 밤은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놀잇배 사이로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놀잇배들 사이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화방 한 척이 있었다.

    다소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그 화려한 화방은 돌연, 마주 오던 다른 한 척의 놀잇배에 쿵, 하고 부딪쳤다.

    때마침 화방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소염의 몸이 앞으로 쑥 쏠리고 말았다. 그가 든 술잔에 담긴 술이 소염의 몸으로 모두 쏟아졌다.

    불같이 화가 난 그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배도 몰 줄 모르는 것이냐?”

    부딪친 화방 위에 있던 총관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관여하려고 나섰다. 그런데 상대방이 아주 거만하게 나오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쪽이 운행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소. 우리가 오는 것을 봤으면 알아서 피했어야 하는 게 아니오?”

    평왕부 사람이었던 총관은 어디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일이 없었던지라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감히 우리 주인더러 길을 비키라는 것이야?!”

    그러나 상대방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못할 건 또 뭐요? 그래 봤자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공자님들 아니오? 해충이지, 해충!”

    * * *

    이 사건으로부터 이각(二刻) 전.

    지온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론 연신 탁자를 두드리며 어떻게 하면 소염을 혼내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서아? 서아 아니냐?”

    “둘째 공자님!”

    지온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른 놀잇배에 타고 있던 지장이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오…… 아니, 셋째야! 너도 놀러 온 것이냐?”

    “둘째 형님.”

    지온이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 지장은 동창들과 함께 뱃놀이를 나온 참이었다.

    향시 결과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원생들은 다들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시회(詩會)에 작문회(作文會)에, 이들은 매일 놀기 바빴다.

    지장이 타고 있던 배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공자 몇 명이 밖으로 나왔다.

    “아! 저분은 지장의…….”

    “셋째 동생이지!”

    하마터면 지온의 진짜 신분을 노출할 뻔한 그는, 과거 공몽과 함께 조방궁에 화신점을 보러왔던 소년 중 하나였다. 그때 그는 지온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중간에 끊은 이는 지장의 가장 친한 친우 대희였다.

    대희가 환봉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눈치 없는 놈. 지온 소저가 저렇게 입고 있는 게 무슨 뜻이겠냐? 제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거 아냐!’

    어느새 뱃전을 둘러싼 소년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혼자 있는 것이냐?”

    “우리와 같이 놀면 어떠냐?”

    “그러자! 배에 혼자 있으니 얼마나 외로우냐? 자고로 뱃놀이는 사람이 많아야 재밌다!”

    “주령(*酒令: 과거 술자리에서 즐기던 놀이의 일종)은 우리가 전문이니, 네가 와서 주령관(*酒令官: 주령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이)을 맡아주면 어떠냐?”

    막 거절하려던 지온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순간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소년들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들, 차라리 제가 있는 화방으로 건너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잖아도 제가 전세를 낸 배가 너무 커 낭비했단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소년들이 돌아보니, 평범한 놀잇배에 불과한 자신들의 배는 열 명이 넘는 소년들이 놀기엔 좁았다. 그런데 지온의 화방은 넓고 쾌적한 데다, 장식도 번쩍번쩍 화려하지 않은가!

    그녀가 돈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장은 이미 유혹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우리가 곤란하게 하는 거 아니냐?”

    지온이 손을 내저었다.

    “형님도 뱃놀이는 사람이 많아야 재밌다고 하셨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희희낙락한 소년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넓고, 쾌적한 놀잇배를 놔두고 비좁은 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소년들은 지온의 놀잇배로 옮겨가기 위해 사공에게 배를 대라고 지시했다. 소년들이 지온의 배로 다 넘어오기 전, 선실에 들어온 지온이 루안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뒤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돼요.”

    루안이 인상을 썼다.

    “난 사람들 앞에 보이면 안 되는 사람이오?”

    지온이 그를 달랬다.

    “지금은 둘째 오라버니도 있고, 어쩔 수 없어요. 지장 오라버니가 집에 돌아가 어른들께 말이라도 전하길 바라는 거예요?”

    루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소염 쪽에 당신이 해줘야 하는 일도 있거든요.”

    루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방법이 떠올랐소?”

    지온이 빙긋 웃었다.

    “젊은이들이야 다들 성정이 불같지 않겠어요? 그런데 저쪽은 방탕한 공자들이 모여 계시고, 여긴 묵향(墨香) 나는 서생들이 가득하네요. 이러다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 * *

    지장의 일행들을 제 놀잇배로 들인 지온은, 자신의 놀잇배를 관리하는 총관에게 새로운 주안상을 올리라 전하며 가기(歌妓)도 몇 명 불렀다.

    흥이 크게 오른 소년들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신나게 주령(酒令)을 하며 놀았다. 거기다 지온을 아는 이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더욱 열심히 놀이에 임하는 바람에, 주령은 전보다 더 시끌벅적하고 재밌게 이어졌다.

    한편, 선실 밖에 있던 한등은 루안에게 다가가 때를 알렸다.

    “공자님.”

    평안부의 놀잇배를 본 루안이 턱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쳐라.”

    “네.”

    지온의 놀잇배가 옆으로 돌자, 곧장 정면으로 소염이 타고 있는 놀잇배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럴 리 없었지만, 한등은 마치 피할 여유가 없다는 듯 그대로 배를 몰아 소염이 탄 놀잇배를 강하게 들이박았다.

    “으헉!”

    선실 안에서 놀던 소년들은 난데없는 충격에 여기저기 사방으로 넘어졌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배가 넘어졌나?”

    “사공!”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