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3)화 (183/385)
  • 183화. 같이 가보겠소?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놀잇배에 도착했다.

    “명주가 공자들을 뵙습니다.”

    류명주가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그녀는 아름다운 제 왼쪽 얼굴이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딱 적당한 만큼만 고개를 숙이는 기술을 선보였다.

    좌중에 앉아있던 공자들의 눈빛이 그녀를 향해 훨훨 날아들었다.

    공자 중 한 사람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류 낭자의 비파 연주가 뛰어난 줄은 알았소만, 외모도 이리 아름다울 줄이야! 가까이서 보니 더 눈부시구려!”

    감사를 표한 류명주가 대답했다.

    “명주가 자리하신 귀한 분들께 한 곡, 연주해 올리겠습니다.”

    곧이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뒤따라 시작된 류명주의 노래는 마치 귓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듯 아름다웠다.

    그녀의 노래에 흠뻑 취한 공자들은, 노래 한 곡이 모두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길게 느끼며 음미했다.

    류명주는 비파를 내려놓고 일어나 공자들의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외모와 기예가 뛰어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짓이나 하는 말 하나하나가 어찌나 예의가 바르고 마음에 쏙 드는 말만 골라 하는지, 류명주는 공자들을 매우 흡족하게 했다.

    그렇게 술자리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새로운 술로 술잔을 채운 류명주가 웃으며 한 공자에게 다가갔다.

    “공자…….”

    “꺼져라!”

    아무런 방비 없이 있던 류명주는 그대로 그에게 밀쳐 넘어져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본 다른 공자들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누군가 볼멘소리를 질렀다.

    “소염! 자네 속에 분노가 가득한 건 알겠지만, 엉뚱한 류 낭자에게 풀 일은 아니잖나! 같이 재미있게 놀자고 나와서 똥 씹은 얼굴로 뭐 하는 건가!”

    “그러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 경관걸도 이미 군영(軍營)으로 돌아갔는데, 이제 와 화내봐야 무슨 소용이야!”

    그때, 류명주가 얼른 끼어들었다.

    “명주가 공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이는 명주의 잘못이니, 명주가 벌주를 마시겠사옵니다.”

    곧 일꾼에게 술잔을 건네받은 그녀가 단숨에 술잔을 털어냈다.

    시원시원한 그녀의 행동에 공자들이 환호성과 함께 손뼉을 쳤고, 그렇게 소염의 일은 마무리되었다.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재개되었다.

    다시 시작된 술자리에 소염은 답답한 가슴을 누르며 연신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술을 아무리 잘 마셔도 이리 마셔대면 취기를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소염 역시 취기가 올랐다.

    고개를 든 소염의 눈에 류명주의 웃는 얼굴이 들어오자 소염은 제 머리통을 후려친 경소소가 떠올랐다.

    ‘얼굴형도 그렇고, 웃을 때 보조개가 보이는 것이, 두 사람이 닮은 것 같지 않은가?’

    류명주를 볼수록 분노가 차오르던 소염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앞에 있는 주안상을 들어 엎고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소염의 손에 붙들린 류명주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고, 공자…….”

    “이리 와!”

    소염이 그녀를 잡고 선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류명주만큼 놀라 벙벙해 있던 공자들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소리쳤다.

    “소염, 아까만 해도 아무 관심 없더니, 대뜸 사람을 끌고 가는가?”

    “왜 그리 급하게 굴어? 우린 아직 류 낭자와 대화가 안 끝났단 말이네!”

    류명주의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공자 하나는 그것이 그리 안타까웠는지 소리쳤다.

    “소염, 류 낭자는 청루(靑樓) 기녀(*청루 기녀: 춤이나 노래 따위의 기예만 보이는 가무기(歌舞妓), 잠자리 시중을 들지 않음)야! 억지로 강요하지 말란 말이네!”

    그 말에 소염이 류명주를 향해 눈을 홉떴다.

    “본 공자가 네게 억지로 강요하고 있느냐?”

    류명주는, 소염이 온통 새빨갛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감히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청루 기녀인 그녀는 소염 같은 손님과 만났을 때, 절대 그의 말을 거슬러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류명주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리 영민하고 용맹하신 공자님을 모실 수 있다면 명주의 영광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소염이 다른 공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들었나?”

    그리곤 다시 류명주를 끌고 선실로 향했다.

    “공자, 천천히 가시지요, 공자!”

    류명주는 휘청거리며 그의 손에 끌려갔다.

    선실의 문을 벌컥 연 소염은 그녀를 하찮게 취급하며 선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 * *

    옆 놀잇배 위에 있던 지온과 루안의 미간에 금이 갔다.

    “지금 뭘 어쩌려는 거죠? 강제로 취하려는 거예요?”

    지온이 루안을 툭툭 밀치며 말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술을 한 모금 머금은 루안이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온갖 모략이 넘치지 않소? 왜 나더러 방법을 물으시오?”

    지온이 벌컥 화를 냈다.

    “나한테는 당신이 있는데 내가 또 고민해야 해요? 그럼 당신이 있어 뭐해요!”

    불평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루안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루안은 두 놀잇배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는 입을 열었다.

    “같이 가보겠소? 갈 수는…… 있는 것이오?”

    자신의 하찮은 무공 실력을 떠올린 지온이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마…… 될걸요?”

    “그럼 가겠소.”

    말을 마친 루안은 곧바로 지온의 손을 붙잡고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지온은 깜짝 놀랐다.

    ‘말하고 바로 해버리는 저놈의 성격!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게 시간은 줘야지!’

    * * *

    두 사람은 무사히 옆 화방 위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소염이 들어간 옆 선실 문을 연 루안은 지온부터 선실 안으로 밀었다.

    두 선실 사이의 벽이라고는 널빤지 한 장이 전부라 옆방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벽을 만져본 루안이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벽에 조심스레 작은 구멍을 뚫었다. 그러자 금방 옆방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온이 자신도 보겠다며 루안에게 기대자 결국 옆으로 밀려난 그는 어쩔 수 없이 벽에 구멍을 하나 더 냈다.

    옆방의 상황은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한편, 류명주를 끌고 선실로 들어간 소염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 달려들었다. 류명주는 그런 소염을 밀어내면서 애원하듯이 입을 열었다.

    “공자! 공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명주가 오늘은 모시기가 불편한 날이 온지라…….”

    소염은 냉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핑계를 대는 것이냐?”

    “아닙니다, 정말 아니옵니다!”

    류명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저 같은 이가 공자님을 모실 수 있는 것이야말로 큰 영광이지요. 하오나 오늘은 정녕 공자를 모시기 어려운 날이라 드리는 말씀입니다. 심기가 편치 않으신 공자께서도 이대로는 제대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즐기시기가 어려우실 것이니, 너무도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지요?”

    너무도 부드러운 말로 살갑게 애원을 해오자, 소염의 급하고 거친 성미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류명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공자께선 혹, 마음에 짐이 있으신 것인지요? 여기 앉으셔서 차 한 잔 드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어쩌면 명주가 공자의 짐을 덜어드릴 수도 있겠지요.”

    소염이 원하던 것이 바로 저의 답답한 속내를 푸는 게 아니던가! 그런 그녀의 말에 소염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류명주는 웃으며 그를 데려와 침상에 앉힌 후, 선실에 있는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곁눈질로 찻잔을 힐긋거린 소염이 잔을 받아 들곤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제 얼굴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류명주가 소염에게 물었다.

    “명주를 그리 보시는 것은, 마음에 계신 이가 떠올라서는 아니시겠지요?”

    소염의 냉소가 흘러나왔다.

    “그 계집을 내가 마음에 둘리가 없지.”

    ‘원수라면 모를까.’

    류명주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명주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공자께서 여인을 떠올리시는 것 같기에, 마음에 두신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분께서 저와 많이 닮으셨는지요?”

    소염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전혀 안 닮았다!”

    류명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본 소염의 기분은 오히려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로 간 그가 차를 연거푸 마신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흉악한 계집이 너와 비교가 되겠느냐? 흥! 본 공자는 반드시 그날의 원한을 갚아주고 말 것이다!”

    그리곤 흉흉한 눈빛을 번들거리던 그가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자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그의 손안에서 부서졌다.

    한편, 옆 선실에서 그 소릴 듣고 있던 지온은 심상찮다는 생각에 구멍을 막고 루안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금 소염이 일컫는 사람이 소소에요?”

    가만히 생각하던 루안이 말했다.

    “경소소 소저를 말하는 것이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마구 경기에서 소염은 경소소의 구장에 머리를 맞아 피를 보았다. 소염의 아비인 소달은 그 일을 황제에게 발고했으나 결론적으로 도리어 그들의 함정에 빠져 제 발등만 찍고 말았다.

    그 일로 소달은 반년치 녹봉을 삭감당했고, 소염은 자택에서 한 달가량의 치료를 하고 나서야 최근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염은 원한을 절대 잊지 않지.”

    루안이 조용히 말했다.

    “정국공부에 조심하라고 전해주는 게 좋겠소.”

    지온이 그러겠다고 답한 후에 다시 말했다.

    “경 오라버니도 군영으로 돌아갔고, 이제 서교에 소소를 데려가 놀아줄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럼 앞으로 소염과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겠죠.”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오. 설령 그게 단 한 번일지라도 경 소저가 저자의 손에 떨어지면 문제가 될 수 있소. 류 낭자를 대하는 걸 보니 저자는 성정에 문제가 있소. 아마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겠지.”

    소염은 확실히 경솔하고 거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평왕세손인 요심도 자리에 없어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공자들은 애초에 소염의 성미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류명주가 자신의 두려움을 참아가며 소염의 화를 달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생목숨 하나 잡고도 남았을 터였다.

    “소염이 저러는 걸 보면 소달도 정국공부에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지온의 물음에 루안이 대답했다.

    “소달과 정국공부는 사이가 좋을 수 없소. 오랫동안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정국공부는 군 안에서 세력이 강력하지만, 소달은 강왕부에서 천거해 올린 인물이오. 그런 연유로 소달은 금군을 통솔해도 정국공부와 비교하면 근본에서 밀릴 수밖에 없소. 그러니 지난번 마구 사건이 있을 때도 소달이 곧장 입궁해 정국공부를 발고했던 거요. 정국공부를 망신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럼 두 집안은 처음부터 원수지간이었네요.”

    “그렇지.”

    루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소염이 경 소저를 건드리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정국공은 그저 최선을 다해 막는 수밖에 없소. 아무래도 여인의 손해가 더 크니까. 만약 일이 생기면 경 소저만 피해를 보게 될 거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서는 지온도 체험한 바가 많았다. 빠질 뻔했던 여러 위험천만한 함정과 들었던 모함만 몇 개를 꺼내도 작품 하나 쓸 수 있을 정도는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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