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뱃놀이
마차는 장락지(長樂池)란 호수 앞에 도착했다.
한등은 마차에서 여벌로 준비한 평상복을 꺼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공자님.”
관복을 입고 이런 곳을 돌아다니다간 다음 날 어사(*御史: 관직명 주로 탄핵의 일을 처리함)들이 당장 상소를 올릴 것이 분명했다.
루안은 ‘루 대인’에서 ‘루 공자’로 모습을 달리한 후에 마차에서 내렸다.
야간의 통행을 따로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락지의 밤은 유난히 흥겹고 떠들썩했다.
호숫가 주변으로 줄지어 선 놀잇배 안에선 간드러진 여인들의 목소리와 향내가 곰살맞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안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한등을 바라보며 눈을 치떴다.
“제대로 찾아온 거야?”
“당연히 제대로 찾아왔죠!”
한등은 자신만만했다.
“공자님의 인륜지대사가 걸린 일인데, 제가 감히 실수하겠어요?!”
루안은 어째 들을수록 뭔가 찝찝한 느낌이었다.
홍낭(紅娘)이 앵앵(鶯鶯)이 데리고 장생(張生)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드는 건 무엇인가?
(*중국 고전 서상기에 나오는 인물. 한국 고전 춘향전과 비슷한 내용으로, 앵앵의 시녀였던 홍낭은 앵앵 낭자와 장생 공자를 연결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함.)
‘한등이 홍낭이면, 내가 앵…….’
계속 생각하다가는 처소로 돌아가 버리게 될 것 같아서 루안은 바로 생각을 접었다.
두 사람은 호숫가에 정박된 놀잇배들을 지나쳐 걷다가 드디어 한 척의 화방(*畫舫: 용이나 봉황 따위의 모양으로 꾸미고 그림을 그려 곱게 단청을 한 놀잇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화방에 있던 뱃사공이 뱃전에서 사다리를 내려주었다.
한등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공자님, 가시지요.”
놀잇배에 오른 루안의 귀로 배 위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일꾼이 주렴을 걷자, 이번엔 그의 눈으로 남장을 한 지온과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기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밝은 미소하며,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아하니 기녀가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제 주머니를 못 털어줘서 안달이 난 사람 같지 않은가!
루안이 헛기침을 하자 그를 발견한 지온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일찍 퇴근한 것인가?”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기녀는 아주 예뻤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녀가 그를 향해 인사했다.
“명주가 공자님을 뵙습니다.”
“…….”
한참이 지나도록 루안이 대답을 하지 않자, 결국 지온이 상황을 수습했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니 크게 마음 쓰지 마시오, 류 낭자.”
그 말에 류 낭자라 불린 기녀, 류명주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공자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어요!”
루안에게 앉으라 손짓한 지온은, 다시 류명주와 무슨 곡을 연주할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하는 대화를 들었다.
류명주가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지온은 루안의 기분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온이 그를 톡, 건드렸지만 루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지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상 아래로 손을 뻗은 지온은 계속해서 그를 못살게 건드려댔다.
그러자 마침내 루안이 반응을 보였다. 루안은 제 손으로 지온의 손을 와락 잡더니 깍지를 끼고는, 제 손아귀에 사로잡힌 그녀의 손가락을 천천히 붙들어 비틀며 문질러 쓸어내렸다.
지온의 얼굴이 귓불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왜 이러는 거야, 정말! 그냥 손이나 잡으면 되지, 꼭……. 대체 이런 것을 어디서 배운 거야!’
지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한 곡이 끝났다. 지온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류명주에게 말했다.
“오늘 이 친구가 기분이 안 좋은가 보오. 이 친구가 아무래도 놀 기분이 아닌듯하니 낭자와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울 듯싶소.”
류명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명주,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명주는 아쉬운 듯 걸음걸음마다 연신 뒤를 돌아보더니 방에서 나갔다.
놀잇배에 두 사람만 남자 재빨리 손부터 뺀 지온이 불평을 쏟았다.
“당신 생각해서 편히 나와 놀라고 불렀더니, 이게 뭐예요! 아주 호수가 다 꽝꽝 얼 것 같은 얼굴로!”
입꼬리를 삐죽 말아 올린 루안이 상에 있는 술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복상한다는 사람이 아주 제멋대로군. 마음대로 놀러 나온 것은 그렇다 치고, 술까지 마셨다?”
지온이 마주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핑계였을 뿐이에요. 저는 그 스승이라는 분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고요.”
“핑계 한 번 제대로 찾았군. 저는 마음껏 놀고 나만 목이 빠지게 기다려야 하니 말이야.”
루안의 목소리에 원성이 가득했다.
삽시간에 반달눈이 된 지온이 빙글빙글 웃으며 루안에게 물었다.
“지금 그거 앙탈 부리는 건가요?”
금세 얼굴을 굳힌 루안이 휙 고개를 돌리고는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렇소!”
이에 지온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직 식사 안 했죠? 빈속에 술 마시지 말아요.”
이내 일꾼을 부른 그녀가 파와 마늘을 뺀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그러자 루안의 눈빛이 금방 부드럽게 풀어졌다.
지온이 자신의 국수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온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진 루 대인은 드디어 평온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잘 지내더니 뜬금없이 여긴 왜 온 것이오?”
“놀러 왔죠!”
지온이 장난치듯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화려한 꽃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절경을 이루는 불야성이라니. 전에는 그저 서책에서나 보았던 거잖아요.”
루안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자 지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에 화괴(*花魁: 꽃 중의 꽃, 가장 뛰어난 기녀를 말함)를 뽑기 시작하면 더 재밌을 거예요.”
어차피 이제 다른 사람도 없었으니, 루안은 지온과 놀잇배를 탔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었다.
국수를 먹은 후, 두 사람은 창가에 기대어 술을 곁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배는 당신이 전세를 낸 것이오? 손도 크군.”
술이 다소 오른 지온이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턱을 괸 채 웃었다.
“당신의 웃음을 한 번 보려고 천금을 털었는데, 어때요? 만족스러웠나요?”
루안은 그런 지온의 모습에 기가 막히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몹쓸 말투는 어디서 배운 것이오?”
돌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지온이 정색하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배를 전세 냈어도 당신은 내가 먹여 살릴 수 있다고요. 유(劉)씨 가문의 공자님이 낸 소설이 꽤 잘 팔리거든요. 그리고 나와 향료 점포를 낼 생각도 하고 있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니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루안은 맥이 탁 풀렸다.
“취했구려.”
“설마요! 겨우 몇 잔 밖에 안 마셨는데요?”
“누가 들으면 본인이 주당인 줄 알겠군. 전에 술에 취해, 달을 건져 올리겠다며 물에 뛰어들었던 일을 잊었소?”
지온의 눈이 빠질 듯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느 해, 중추절(中秋節)이었다.
과실주 몇 잔을 마시고 제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연못에 비친 크고 둥근 달을 보고는 갑자기 달을 건지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제가 물을 많이 먹었다는 것만 기억했을 뿐, 깨어보니 다음날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던 지온을 향해 루안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물에서 구했소.”
지온이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미 옛날에 부끄러운 모습을 다 보여줬었구나.’
“왜 아무도 내게 말을 안 해줬던 거죠?”
지온이 원망을 쏟았다.
‘전날 내게 엉망으로 취한 모습을 보여 놓고, 다음날 또 선녀처럼 고고한 척을 하고 나타나다니, 정말이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은 루안이 입을 열었다.
“말하면 당신이 숨어서 더는 내게 얼굴을 비추지 않을 것 같아 그랬소.”
두 사람이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밖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어? 시작한다!”
지온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이 소리쳤다.
“드디어 화괴낭자(花魁娘子)를 뽑나 봐요!”
화괴(花魁) 자리를 두고 장락지에서 벌어지는 화괴 대회는 고상하고 높은 품격으로 도성 전체에 이름이 높았다.
화괴 대회에서는 유명한 기녀들이 저마다 가진 온갖 방법으로 제 기예를 선보였다. 그리고 문인(文人)들과 관직에 있는 인사들이 감상평을 투표하면 등수가 정해졌다.
그렇게 가장 높은 등수를 차지한 기녀가 그달의 화괴낭자가 되는 것이었다.
도성에서 풍류를 좀 아는 이들은 일 년 열두 달마다 꽃을 정하곤 했는데 그 꽃 이름을 따 화괴낭자를 부르곤 했다.
이번 달은 9월이라 ‘국화 선녀’가 선택되었다.
호수에 떠 있는 놀잇배 중 가장 커다란 화방(畫舫)에 무대가 만들어지고 방심을 흔드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한 사람씩 무대에 올랐다.
여인들은 제각기 춤이나 노래로 무대를 빛냈다. 기예가 훌륭하면 호숫가에서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백성들은 동전을 던졌고, 부유한 상인들은 거금을 쾌척했으며, 문인들은 시사(詩詞)를 써 내렸다. 가히 모든 이들이 즐거운, 떠들썩한 시간이었다.
창가에 기댄 지온도 무대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평가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람은 노래가 훌륭하네요. 저 이는 춤이 맵시 있어요. 어라? 저 사람 류 낭자 아니에요?”
류명주도 화괴 대회에 나왔다.
그녀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고와 무대를 펼치고 평가가 이루어진 후, 놀랍게도 화괴에 뽑혔다.
그것을 본 지온이 루안을 놀렸다.
“아까 당신이 화괴낭자를 쫓아낸 거라고요! 이젠 다시 모시지도 못하겠네.”
루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국화 선녀가 아무리. 예뻐도 여기엔 이미 화신(花神)이 계셔서 말이오.”
그리곤 흘깃, 자신을 향한 그의 눈길 한 번에 지온은 그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온통 붉어지고 말았다.
“루 대인께서 오늘 어디서 꿀이라도 드셨나 봅니다. 어찌 이리 달콤한 말씀을 하시는지!”
그녀의 말에 루안은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가만히 웃고 있던 루안의 눈에 류명주가 화려한 놀잇배로 불려가는 것이 들어왔다. 그 화려한 놀잇배가 루안과 지온이 있는 놀잇배 앞을 스치던 찰나, 루안의 시야에 무엇이 들어온 것인지 그가 웃음을 지웠다.
“……소염?”
루안의 시선이 지온을 향했다.
“갑자기 나를 불러내어 배를 탄 것이 이것 때문이었소?”
지온이 하품하더니 대답했다.
“소씨 집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했잖아요? 요즘 소씨 가문의 공자가 장락지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 * *
류명주는 비파를 안고 화방(畫舫)에 올랐다.
그녀도 이 화려한 놀잇배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이 놀잇배는 평왕부 소유로, 배를 오가는 이들 모두가 귀한 출신의 왕손들이라고 들었었다.
류명주가 오늘 화괴가 되어 몸값이 몇 배나 뛰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 배에 오르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류 낭자, 이쪽입니다.”
제대로 훈련이 된 듯 보이는 시위가 예를 갖춰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나타났다.
미소를 보인 류명주는 진중하면서도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그녀에게 아주 커다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화괴가 되었고, 거기다 귀한 이들이 있는 놀잇배에 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만약 오늘 제대로 시중을 들 수 있다면, 앞으로 장락지에서 제 이름을 크게 날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다 조금 전 본 공자 두 사람을 떠올린 류명주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는 이 안 붙잡고, 오는 이 말리지 않는 게 기녀야. 취향 따라 손님을 골라 받는 기녀가 어디 있겠어?’
충분한 재산을 모으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제 이름을 알려야 했다. 그래야 늙고 병들기 전에 기적(*妓籍: 기녀로 등록된 대장)에 올라간 이름을 지우고 평범한 사내와 혼인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