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1)화 (181/385)
  • 181화. 왜 나만?

    황제의 행렬이 곧 떠날 시간이었다.

    어가가 떠나기 직전에 루안은 떠들썩한 모습을 보러 나온 지온을 찾았다.

    “루 대인, 대화는 즐거우셨는지요?”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그녀의 말속에 숨어있는 음흉한 속내를 느낀 루안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저 그랬소.”

    그리고 했던 대화를 간추려 그녀에게 들려주었는데, 지온은 이야기는 다 듣지도 않고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건 기만극(欺瞞劇)이잖아요! 진짜 매달려야 하는 건 사실 당신이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척, 원치 않는 척으로 그녀가 당신에게 매달리게 만드셨네요.”

    루안이 옥비의 도움이 필요 없을 리가 있겠는가? 거기에 옥비가 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다?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었다.

    옥비는 신분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계 경쟁에 뛰어들 수 없었다. 나아가 봉호(*封號: 황제로부터 받는 칭호. 중국 봉건사회의 경우 비빈은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봉호가 있었으며, 봉호가 없는 경우 제 성을 앞에 붙였음.)가 있는 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 역시 어려울 터라, 지금 앉은 옥비 자리가 그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이긴 할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그녀를 옥종화로 둔갑시키지 않았던가. 그녀가 조용히 제 역할만 잘한다면 황제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호하려 할 게 틀림없었다.

    그에 반해 루안은 그가 아무리 궁 안에 제 눈들을 심어 두었다 할지라도 황제의 측근에 사람을 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고양이 앞의 생선처럼 옥비가 날 잡아먹으라는 듯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루안이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처음부터 수작을 부릴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지. 제 무덤을 판 것이니 할 말이 없지 않겠소?”

    “네네, 그럼요. 우리 루 대인께서 너무 똑똑하셔서 그녀 정도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루안이 지온의 말을 정정했다.

    “똑똑으로 충분하오. 너무 똑똑까지는 됐군.”

    멈칫한 지온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잘생기고 고아하신 루 공자께서 너무 하시네.’

    * * *

    늦은 밤.

    청녕궁(*淸寧宮: 태후의 거처)은 평소와 달리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청녕궁으로 거처를 옮긴 태후는, 그동안 청녕궁 심처(深處)에 틀어박혀 외부 일엔 관심을 끄고 지냈다. 그래서 그녀가 이리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달각달각, 손에 들린 염주알을 굴리던 태후가 반쯤 시선을 내렸다.

    느릿한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현비 복중의 태아가 정녕 용종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황제의 고개가 아래로 깊이 떨어졌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어머니…….”

    수치스러운 얼굴로 황제가 입을 열었다.

    “현비가 여승(女僧)을 하나 천거 받았다는 소식은 짐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승이란 자가 알고 보니 사내가 여승의 모습으로 변장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현비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수차례 그자와 난잡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다 사생아가 생겼고, 들통날 것을 우려한 현비가 타태(*打胎: 유산, 낙태)를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다만, 그저 흘려보내기엔 기회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핑계를 찾아 조방궁을 찾았을 것이고, 외부로 나와 방비가 약해진 틈을 타 낯선 궁녀를 하나 데려와 일을 꾸몄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상?”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는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 손에 들린 염주알만이 달각달각, 좀 더 빠르게 돌아갈 뿐이었다.

    이윽고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현비는 죽음이 아깝지 않은 죄를 저질렀으니, 황상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하지만 완씨 집안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분노가 서린 황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완씨 집안의 선조가 내관총관을 지내, 그들은 지금도 궁 안의 많은 내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완씨 가문이 궁 안에서 은밀히 현비와 사내와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 전부 그들이 살펴주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짐은 이 모욕을 절대 모른 척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황상께선 완씨 집안을 벌하실 생각입니까?”

    황제의 분기탱천한 신색이 그의 답을 대신했다.

    작게 탄식을 뱉은 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완씨 일가는 후궁만이 아닌 황궁 도처에 있습니다.”

    속에서 노기가 들끓는지 황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작아졌다. 그의 목에서 화를 참는 것이 역력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짐은 하물며 그들조차 어찌할 수 없단 말입니까?”

    이런 치욕을 겪고도 그는 완씨 집안을 몰수하지 않고 놔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큰 아량을 보인 것이 아닌가!

    태후가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저들은 황상에게 심지어, 저들 가문의 다른 여인을 궁에 들이라고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황제는 울컥울컥 올라오는 폭력적인 충동을 연이은 냉소로 내리눌렀다.

    “실컷 꿈이나 꾸라 하지요, 일장춘몽이겠지만!”

    태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황제의 손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태후의 위로에 황제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곤경에 빠진 이의 본능적인 반응이 그러하듯, 황제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짐은 어찌해야 합니까?”

    한참을 말이 없던 태후의 입이 떨어졌다.

    “황상, 국장(*國丈: 황제의 장인어른의 호칭. 황후의 아버지만을 지칭함)을 뵌 지도 오래되셨지요?”

    황제가 멈칫했다.

    국장(國丈)이라면 황후, 심씨(沈氏)의 부친을 말함이었다.

    심씨가 황후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집안이 후궁 여인들의 집안 중 가장 좋았기 때문이었다.

    심씨 집안은 대대로 배출한 재상만 해도 여럿이었고, 지금도 출사하여 관직에 있는 이들 역시 많았다.

    황후의 아비 역시 조정의 중신이 아니던가!

    “황후는 육궁(六宮)의 주인입니다.”

    황제를 바라보는 태후의 눈빛이 깊고 무거웠다.

    “황상. 어떤 것들은 말이지요, 차근차근, 천천히 처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자 황제의 답답하게 묶여있던 가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곧이어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후의 시선이 다시 손에 든 염주로 향했다.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태후의 방에 들어온 늙은 유모가 조용히 말했다.

    “마마, 시간이 많이 늦었사옵니다.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그러나 그 후로도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태후가 입을 열었다.

    “내, 저 아이를 아껴야 하는지, 미워해야 하는 겐지……. 모르겠구먼.”

    태후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늙은 유모가 말했다.

    “마마, 왜 자신을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게 말일세. 지난 3년을 스스로 괴롭히고 살았어.”

    조용히 읊조리던 태후의 얼굴 위로 스산한 웃음이 천천히 떠올랐다.

    “하지만 말일세. 내가 기억 속에서 단 한순간도 지우지 않은 일도 있다네.”

    태후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를테면, 선제의 은혜를 입었던 완씨 일가가 제 부귀영화를 위해 주인을 배신했던 일 같은 것 말이야!’

    * * *

    그날 밤 황제는 화춘궁(*華春宮: 황후의 거처)에 머물렀다.

    황후는 당연히 온갖 좋은 말로 그를 위로하며 온 마음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던 황제는 얼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났다.

    가슴이 답답했던 황제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때, 황제의 귓가에 구석에서 누군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돌아가며 당직을 서고 있는 내시들인 듯했다.

    “……후궁에 간만에 경사가 났다 했더니, 일이 어쩌다 이리된 것인지.”

    “그러게나 말이야. 현미마마께서 가지신 용종이 가짜였다니.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후궁에서 후사를 하나도 못 봤다는 거잖아? 폐하께서도 아직 젊으시고 마마께서도 아직 다들 젊으신데 왜 소식이 없으신 것인지, 참.”

    “혹시 몸에 문제가 있으신 게 아닌지 모르겠어.”

    “누구? 마마들 중에 회임한 분은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내 생각엔 마마들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차라리 문제가 있으시다면…….”

    내시 두 사람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크게 분노한 뒤였다.

    ‘저놈들이 지금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내 몸의 문제 때문이라 지껄인 것인가?’

    황제가 막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선제께서도 어렵게 후사를 보셨다가, 결국 폐하를 입적(入籍)하여 황위를 이으셨잖아. 설마, 폐하께서도 양자를 들이셔야 하나?”

    “그러게.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강왕 전하는 자손도 많다잖아. 강왕세자께서도 이미 아들만 몇이라던데, 어찌 폐하께서만 하나도 못 보시는 거지?”

    “그러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그 꼴을 보다 못한 호은이 버럭 소리를 쳤다.

    “무엄한지고! 감히 어디서 망령된 혓바닥을 놀리느냐! 네 이놈들, 어느 궁의 것들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내시 둘은 곧바로 옆에 있는 정원 풀숲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은이 당장 시위를 불렀지만, 이미 두 내시는 종적을 감춰 찾을 수 없었다.

    호은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소인이 반드시 두 몹쓸 것들을 찾아내어 세 치 혀를 뽑아버리겠사옵니다!”

    예상 밖으로 황제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호은은 황제가 말조차 하지 못할 만큼 분노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황제의 입이 열렸다.

    “돌아가지.”

    “네, 폐하.”

    그늘이 진 얼굴을 한 황제의 걸음은 달리는 듯 빨랐다.

    그의 머릿속엔 조금 전 두 내시의 대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강왕 전하는 자손도 많다잖아. 어찌 폐하께서만 하나도 못 보시는 거지?’

    ‘설마, 폐하께서도 양자를 들이셔야 하나?’

    황제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폐하?”

    대답 없는 황제의 눈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 어찌하여 내게 아이가 안 생기는 것인가? 후궁에 있는 그리 많은 비빈이 적잖이 시침(侍寢)을 들었는데, 어찌 그중 하나도 회임이 안 될 수가 있어?’

    왕성히 자손을 보는 것으로 유명한 강왕부의 다른 형제들은 아이를 줄줄이 낳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황자를 낳지 못한다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을 것이 자명했고, 그렇다면 양자로 입적(入籍)시킬 이는 누가 되겠는가? 당연히 그와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강왕부의 후사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큰형님의 아들이 될지도 모르겠군. 한 번이 어려운 법이지, 이미 한 번 가본 길, 두 번이라고 못 갈까?’

    * * *

    이튿날 정무를 끝낸 루안은 궁 밖으로 걸음을 하고 있었다. 길잡이를 하던 어린 내시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에게 귤을 건넸다.

    “루 대인, 목이라도 축이시지요.”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한 루안이 제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른 루안은 이미 한쪽이 갈라진 귤을 완전히 가르더니 그 속에서 쪽지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한 그가 빙긋 웃음을 짓고는 쪽지를 한등에게 건네어 태우게 했다.

    무릇, 덩치가 큰 것을 처리해야 할 때는 그 팔다리부터 잘라내야 하는 법!

    ‘현비가 정신 나간 짓을 해줘서 고맙군. 완씨 집안을 처리할 기회가 생겼어.’

    그렇게 마차에 앉아 얼마를 갔을까, 장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루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 가는 거지? 제멋대로 구는 게, 네가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 것 같군.”

    한등이 고개를 돌려 루안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지금 절 꾸짖으셨습니까?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어휴, 그분과의 약속이었는데, 공자님이 못 가신다니 별수 없네요. 아가씨는 바람이나 맞으라고 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뭐.”

    “뭐?”

    루안이 한등을 다시 붙잡았다.

    “거기가 어디냐?”

    한등이 빙글빙글 웃었다.

    “다시 가시려고요, 공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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