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80)화 (180/385)
  • 180화. 그럴듯한 그림자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본 옥비의 가슴은 더욱 갑갑해졌다.

    지온의 신형이 사라지자 옥비가 루안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히는 예를 올리더니, 작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공자님.”

    사공자.

    무애해각에 있을 때 부르던, 오래된 그의 호칭이었다.

    그녀는 지금 ‘옥비’가 아닌, 과거의 ‘금벽’으로서 루안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루안의 눈빛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감사라니요. 신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마마.”

    ‘마마’를 강조하여 지칭하는 루안을 보자, 옥비는 더욱 큰 슬픔을 느꼈다.

    “사공자께선 아직도 저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신 것인지요?”

    루안의 비웃음 소리가 울렸다.

    “제가 마마의 무엇이라고 마마를 용서할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그 말에 옥비가 주춤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 제게 입궁을 명하시어…… 저도 정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그만.”

    그녀의 말을 끊은 루안의 얼굴이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었다.

    “진정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지는,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겠지.”

    “사공자님…….”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내, 오늘 도운 것은 네가 아니라 옥종화였다. 이미 네 손에 충분히 망가지고 부서진 이름이다. 난 차마 옥종화가 황실의 후계자를 모함하여 해친 악독한 여인이 되는 것까지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의 일갈에 움찔, 한걸음 물러선 옥비가 도리질을 했다.

    ‘망가지고 부서지다니……. 어찌 그리 잔인하게…….’

    곧 울음을 터트릴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루안은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비수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옥종화가 되고 싶어 꽤 노력하더군. 글 연습이나, 차 우리는 연습 따위를 하면 진짜 옥종화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나? 한데, 언제부터 그녀가 이리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느냐? 오늘 네가 보인 모습 어디에서, 옥씨 집안사람의 풍모를 찾아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옥비의 입술이 파르라니 버르적거렸다.

    “저, 저는…….”

    아가씨처럼 능수능란, 태연자약하게 대처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어지럽게 꼬여버린 상황을 자신더러 대체 어떻게 풀어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와서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 사공자란 옛 이름 몇 번에, 옛정이라도 떠올려 나더러 널 도와 달라 할 작정이었느냐? 아, 다른 이들은 조정에 부모나 형제들이 있지만, 넌 아무도 없었지. 오늘 현비의 간계에 빠지고 보니, 스스로 도움 하나 받을 곳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지란 생각이 들더냐? 괜히 기운 뺄 것 없다. 난 널 도울 생각도, 그리고 너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

    제 말을 마친 루안이 그대로 가려는 듯 돌아서자 옥비가 소리를 질러 그를 불러 세웠다.

    “사공자!”

    “마마, 더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

    심호흡을 한 옥비가 입을 열었다.

    “내가 고립무원이면, 그러는 넌 고립무원이 아니더냐? 가문에서 쫓겨난 네가 나보다 나을 무엇이란 말이냐? 폐하께서 지금 널 사용하시는 것도, 그저 사냥개를 기르는 것과 같은 이치일 뿐이다. 설마 네놈, 진짜 폐하께 잘하면 북양왕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눈앞에 선 옥비를 바라보는 루안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온은 루안이 짓는 연녹색 봄바람을 닮은 웃음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토록 예리하고 날 선, 거칠고 모진 웃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미하게 내려오는 시선 속, 무관심으로 점철됐던 그의 얼굴 위로 멸시와 조롱이 가득 떠올랐다.

    “설마 제가 북양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돕기라도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루안이 눈빛에 수치심이 든 옥비의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감정에 휩싸였지만,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조정은 자네, 후궁은 내가. 주변 감시도 하고, 필요할 때 서로 도와줄 수도 있을 테니, 혼자인 것보다야 둘이 더 낫지 않겠나?”

    “하…….”

    루안이 물었다.

    “무엇을 감시하고 도와주실 수 있단 것입니까?”

    옥비는 그가 단박에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사품(四品)의 고위 관리이긴 하지만, 그것 외에 믿을 것은 폐하의 신임 하나뿐이니, 그 부분을 내가 도와줄 수 있네. 후궁(后宮) 중 폐하께서 믿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원하는 일이 있으면 내게 말을 해주게. 그럼 내가 폐하 앞에서 자네를 도와 말을 해주겠네.”

    “그렇습니까?”

    루안이 웃는 듯 아닌 듯, 기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니, 제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요?”

    “저들의 처가들을 눌러주게. 이런 흉사를 벌였으니, 현비의 처가인 완씨 집안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심씨(沈氏)와 대씨(戴氏) 집안은 여전히 세력이 강해. 그렇다 보니 저들이 아무리 폐하께 총애를 받지 못해도, 난 여전히 압박에 후궁 안에서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살고 있네.”

    그녀가 후궁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끼지 않았던 것은, 끼어들 필요가 없음을 드러내며 위세를 부리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다퉈봐야 이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제의 총애를 빼면,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영수궁에 숨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제 보니 옥비마마께선 이미 후궁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그의 말에 옥비는 갑갑해졌다.

    말투는 조롱하는 듯한데,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어 옥비는 그가 진지하게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속을 긁으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옥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 대인, 생각은 어떤가?”

    루안의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자네…….!”

    ‘좋은 말로 풀어보려 했더니만, 어찌 이리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질 않는단 말인가!’

    옥비는 뱃속에 꿈틀거리는 분노를 느꼈다.

    오만한 신색을 고고하게 드러낸 루안이 입을 열었다.

    “마마, 이러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사품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지난 수년간 누구에게도 의지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마마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계속 영전을 하겠지요. 하지만 마마는 어떨까요? 이번 현비의 모함으로 마마께선 하마터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실 뻔했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선 그 자리를 목숨과 맞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자네…….”

    똑같은 말을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에서 망설임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눈앞에 선 루안을 쳐다보았다.

    붉은색 관복을 입은 그는, 그녀가 처음 만났던 소년의 모습을 탈피하고 진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과 영준한 얼굴 위로 어딘지 어둡고 음울해 보이는 듯한 분위기가 더해져, 그는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슬그머니 겁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남아있던 자신감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과거 무애해각에 모였던 이들이 다들 어떤 이들이었던가. 천하에 둘이라면 서러울 총명한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들 중에서도 루안은 태야(太爺)께서 전례까지 깨며 문하에 들였던 학생이었으니 학문은 더 뛰어나겠지.’

    낭중지추(囊中之錐).

    제가 갖춘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가문이란 출신을 도려내고도 금방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그는…… 낭중지추야.’

    그녀는 루안의 도움이 필요할지 몰라도, 루안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옥비가 서늘해진 가슴께를 느끼고 있을 때, 그녀의 귓가에 루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그리고 마마께선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폐하께서 왜 마마를 궁에 들이셨는지, 폐하의 마음에 마마께서 어떤 존재로 살아계신 것인지 다시 한번 정확하게 직시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마마셨습니까? 

    아니지요. 그분이 사랑하는 분은 마음속의 그분이지, 마마가 아닙니다. 그럴듯한 그림자인 마마께서 정녕 베갯머리 송사를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어떤 이가 장난감의 말을 들어준단 말입니까?”

    옥비의 가슴이 수치심으로 불붙듯 뜨거워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간신히 감정을 다잡고 모욕을 감내한 옥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폐하께 내가 특별한 사람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 그림자든, 장난감이든, 뭐든 폐하께선 내가 필요하니까.”

    루안은 옥비를 몇 번 흘끔거리며 바라보긴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내심 안도한 옥비는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자네는 북양왕과 척을 지지 않았나. 조정에서 자네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빠져나갈 길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시간을 보는 듯 하늘을 본 루안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표정을 하더니, 대충 응대조로 대답했다.

    “제게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힘만 빼는 일은 사양하겠습니다.”

    말없이 망설이고 있던 옥비가 끝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증명해 보이겠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마께서 증명하시면, 저희는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이미 대화에 흥미를 잃은 루안이 대충 손을 모아 흔들고는 금방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사공자!”

    그러나 옥비가 다시 그를 불러 세우자 미간을 좁힌 루안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옥비가 망설이다 물었다.

    “조금 전에 지온 소저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그것이 마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루안의 차가운 말에 옥비는 다시 비수에 찔린 듯했다.

    루안과 다른 이가 서로 웃음을 짓든, 이야기하든, 그녀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하필 지온 소저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녀가 돌리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 그림자를 찾았다더니, 그러는 자네는 아니고?”

    루안이 웃었다.

    “지금 내게 묻는 것이 누구냐? 옥종화냐, 금벽이냐? 옥종화란 이름을 쓰니, 네가 진짜 옥종화 같으냐? 그래, 나도 폐하처럼 그녀를 마음 깊이 사모해. 하지만 내가 그것을 네게 알릴 이유는 없지.”

    루안이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옥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옥비마마,”

    루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신이 한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누구나 마마를 ‘옥종화’의 그림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경거망동을 삼가십시오. 모두가 마마께 마음을 넓게 쓰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자네…….”

    “그럼 신은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예를 갖춘 루안은 뒤돌아 가버렸다.

    옥비는 얼이 빠진 듯, 금벽이 겉옷을 가지고 올 때까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마.”

    뒤늦게 나타난 금벽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자 옥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지온 소저는?”

    “대장공주께서 부르셔서 가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옥비가 겉옷을 여미며 생각했다.

    ‘이제 막 계절이 중양을 지났거늘 왜 이리 날이 스산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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