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9)화 (179/385)
  • 179화. 의심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기 시작한 황제의 얼굴에 노화가 스며들었다.

    “이게 어찌 된 상황인가, 현비! 탕을 마셨는가, 안 마셨는가?!”

    현비의 목소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신첩은…… 신, 신첩…….”

    ‘마셨다 해야 하나? 아니지, 내가 미각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산사와 앵두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다른 이들이라고 어찌 된 상황인지 추측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입꼬리를 삐죽 올린 대장공주는 미소를 지은 듯, 안 지은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종일 이 난장을 쳤는데, 인제 보니 자네는 애초에 탕을 마시지도 않았구먼? 그러니까 지금 이 사달을 모두 자네가 냈다는 것인데, 제 아이를 잃은 일마저 이리 이용할 수 있다니, 자네가 본궁의 식견을 참으로 넓혀 주었네. 아, 혹시 아이를 잃었다는 건 확실한 게야? 설마 그것까지 거짓은 아니겠지?”

    대장공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태의에게 꽂히자 태의가 급히 입을 열었다.

    “회임하셨던 것은 사실이옵니다. 신이 여러 번 진맥하여 확인하였사옵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몸 밖으로 나온 용종이 아직 있사오니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태의의 말에 현비가 살아날 구멍을 찾은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폐하, 들으셨지요! 신첩이 얼마나 어렵게 회임한 용종이온데, 그런 용종을 두고 어찌 못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럼 왜 산사음을 마시고 문제가 생겼다 했는가?”

    “신첩…….”

    현비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루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그 질문은 신이 마마를 대신하여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자네가?”

    황제가 루안에게 시선을 돌리자 루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비마마와 현비마마를 측근에서 모시는 궁녀들 모두 산사음이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을 몰랐다는 것은, 모두 탕은 마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면, 그 앵두음은 어디로 사라졌겠습니까? 신이 조금 전 근처를 살피다 의심스러운 곳을 발견했사옵니다.”

    그리곤 안으로 들어간 루안이 뒤쪽에 있는 창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장공주가 퍼뜩 소리쳤다.

    “화단이로구먼!”

    황제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역시나 창 아래엔 화단이 조성되어있었다.

    창밖으로 손을 뻗은 루안이 화단에 핀 국화 한 송이를 거침없이 꺾어 올렸다.

    “보십시오, 폐하. 이 국화 위에는 아직 흩뿌리고 남은 탕의 잔여물이 남아있습니다. 호 공공.”

    종종걸음을 치고 달려온 호은이 자연스레 잔여물을 찍어 맛을 보았다.

    “어떻습니까?”

    “앵두음일세!”

    호은의 고개가 연신 위아래로 움직였다.

    “조금 전의 그 맛과 똑같구먼!”

    루안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호은이 멈칫했다.

    “루 대인…….”

    루안이 국화의 다른 한쪽에 묻어있는 혼탁한 색의 액체를 가리켰다.

    “이것을 맛봐주십시오.”

    호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루안을 쳐다보았다.

    ‘색깔이 딱 봐도 요상하구먼. 루안 이 자식이 설마 날 속이고 거름을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이게 거름이면……. 웩…….’

    호은의 눈빛을 읽은 루안은 그만 실소를 금치 못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맛을 봐주십시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 단언을 하고 나오자, 그제야 호은이 손가락을 가져갔다.

    회밤색의 액체가 입에 들어간 순간 호은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그어졌다.

    “약! 탕약일세!”

    황제의 얼굴색이 단숨에 변했다.

    “약이라니! 무슨 약인가?”

    그러나 호은이 약의 종류까지 알 수는 없는 법.

    루안이 입을 열었다.

    “바닥에 아직 탕약 찌꺼기가 남아있을 것입니다. 태의.”

    “예.”

    대답을 한 태의가 루안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뒤쪽 창가 아래에 있는 화단으로 나가 흙을 파내 다른 곳의 흙과 비교조사를 진행한 후 돌아왔다.

    “폐하.”

    태의가 보고를 위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타태약(*打胎藥: 아이를 지우는 약)이옵니다.”

    “타태약…….”

    황제의 시선이 맹렬하게 현비에게로 향했다.

    앵두음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거기에 타태약까지 나오다니…….

    온몸을 쉴 새 없이 떨고 있는 현비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이마를 부여잡은 황제의 머릿속은 그저 혼란하기만 했다.

    앵두음은 버리고 타태약을 마신 현비.

    그 말은 제 아이를 제 손으로 떨어뜨렸다는 말이 아닌가?

    ‘대체 왜? 용종을 회임해 놓고 왜 스스로 아이를 지운단 말인가?’

    만약 현비가 황제를 미워했었더라면, 그래서 황제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더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짐의 총애를 받고 싶어 그리 애를 쓰던 사람이…….’ 

    황제는 더는 현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귓가에 황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비, 이게 다 무슨 일들인가? 타태약(*打胎藥: 아이를 지우는 약)을 자네 스스로가 마셨단 말이야?”

    이제 현비는 흡사 키 위에 까부르는 곡식처럼 쉴 새 없이 떨고 있었다.

    분노에 찬 황후가 소리를 질렀다.

    “후궁에서 얼마나 학수고대했던 아이였는지 뻔히 아는 자네가 어찌 아이를 떨어뜨려!”

    “저, 저는…….”

    현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대장공주의 음성이 유유히 끼어들었다.

    “본궁은 이제껏 살면서 제 손으로 용종을 지우는 경우는 본 적이 없네. 그렇다면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게야. 하나는 애초에 떨어질 용종으로 누명을 씌우고자 한 것이지. 둘은 애초부터 용종이 아니거나. 현비, 자네는 둘 중 무엇인가?”

    태의가 곧장 입을 열었다.

    “현비마마의 맥은 무척 안정적이었고 태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사옵니다.”

    “첫 번째 이유가 아니라면, 두 번째가 답인가?”

    겁을 집어먹은 현비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현비는 끝내 아무런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조금 전 옥비가 처했던 상황과 같았다.

    그저 말만 할 뿐 내놓을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리한 이들은 제 발 저린 현비의 모습을 보며 내심, 열에 여덟아홉은 두 번째 이유가 맞을 것이라 직감했다.

    황제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오쟁이를 지는 것이 사내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던가?

    하물며 황제인 그에겐 더한 수치와 모욕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일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그의 체면이 뭐가 되었겠는가?

    그리 생각하니 황제는 현비에 대한 악감정이 더욱 거세게 치고 올라왔다.

    황제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대장공주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도 종일 피곤하셨을 텐데 이 일은 본궁에게 맡겨두세요. 한 시진정도 쉬시다 궁으로 돌아가시면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전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밖에서 대장공주가 명령을 내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금군의 입을 막은 그녀는 매고고에게 난택산방의 궁인들을 관리하게 하고는, 관리가 힘든 황궁에서 넘어온 궁인들만 따로 떼어냈다. 그리고 오늘 현비는 그저 몸이 조금 좋지 않았을 뿐, 다른 일은 없었던 것으로 모두 입을 맞췄다.

    ‘유산 같은 일은 궁에서 일어나는 게 더 낫지.’

    모든 일을 처리하고 돌아온 대장공주가 황제에게 당부하듯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행여나 완씨 가문에서 작은 눈치라도 채고 먼저 간부(間夫)를 찾아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돌아가셔서 다시 확실하지 않은 일이 생기거든 태후께 여쭈시면 되실 겁니다.”

    황제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중요한 순간은 역시나 고모님이 의지가 되는군.’

    이 일로 대장공주를 크게 신임하게 된 황제였다.

    * * *

    사건의 진실을 밝힌 루안은 금방 자리를 피해 나왔다.

    회임한 후궁의 용종이 의심스럽다니, 명백한 황궁의 추문이 아니던가. 신하 된 자로서 더 들어봐야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다.

    후원으로 향했던 지온은 국화를 구경하는 루안을 볼 수 있었다.

    “제가 빛날 수 있었는데. 루 대인께서 그 기회를 빼앗아가셨습니다.”

    지온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자, 뒤를 돌다 그녀를 발견한 루안의 눈가에도 미소가 굽이졌다.

    지온은 그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그의 웃음은 언제나 색이 옅었다.

    가늘게 말려 올라가는 입가, 유난히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그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지온은 삭풍(朔風) 속을 스치는 한 줄기 연녹(軟綠)색 봄바람을 만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루안은 마치 봄과 같은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웃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그는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했는데, 그 눈빛이 꼭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직접 밝히려 했던 것이오?”

    그가 물었다.

    “당신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러려고 했죠. 당신이 분명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경이로운 후각을 가진 개 코, 루 대인이 찾아내지 못하는 게 더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루안이 감탄했다.

    “당신이 산사음을 바꿔치기하지 않았다면, 오늘 일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지온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타태약(*打胎藥: 아이를 지우는 약)만 찾아냈으면 그쪽에서 뭘 하려 했어도 결국에는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다른 일로 또 힘을 빼야 했겠지. 이렇게 현장에서 바로 거짓말을 잡아내진 못했을 테니, 덕분에 수고를 덜었소.”

    ‘그건 당연하지! 그럴 작정이 아니었으면, 내가 왜 주방 어멈에게 재료 바꾼 것을 함구하라 했겠어?’

    지온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루안의 뒷말이 들려왔다.

    “……역시 당신이 현명하오.”

    그의 말에 지온의 웃음이 터졌다.

    ‘날 칭찬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낸 건가? 우리 루 대인께서 발전하셨네!’

    그녀가 웃음을 짓자 루안도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중양(重陽)이 지났으니, 이제 가을도 반이 지났군.”

    화단에 피어있는 국화를 바라보며 루안이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10월, 11월, 12월……. 앞으로 석 달 남았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지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지난번에 아직 북양에 계신 당신 어머니 때문에 저와의 혼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었잖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지온의 말에 멈칫한 루안이 입을 열었다.

    “서신을 보냈소.”

    루안의 대답에 이번엔 지온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어머니께서 허락하실까요?”

    그녀가 저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어 던진 질문만은 아니었다.

    루안이 왕부(王府) 출신인 것은 사실이 아니던가. 루안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지온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북양태비도 분명 명문가의 교양 있는 여식을 며느리로 맞고 싶을 터였다.

    ‘지씨 가문이 명문가가 아니긴 하지. 거기다 지금의 난 부모님 모두 안 계시기도 하고…….’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지온의 자신감 없는 모습에, 루안은 더욱 온기가 번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허락하실 것이오. 어머니는 좀…….”

    돌연 루안이 입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 역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눈치 빠른 지온이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멀지 않은 곳에 옥비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멀찍이 서서 예를 올렸다.

    그런데 그저 지나가는 듯했던 옥비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루 대인, 지온 소저.”

    만면에 웃음을 띤 옥비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크게 황망하여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네요.”

    루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신하 된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의 딱딱한 태도에 어색함을 느낀 옥비가 뒤에 있는 금벽에게 말했다.

    “본궁이 설렁하니, 가서 겉옷을 가져오거라.”

    “네, 마마.”

    그리곤 옥비가 이번엔 지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온 소저, 내 시녀는 이곳이 처음이라,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난택산방이라고 해봐야, 지금 있는 장소가 전부인 곳이었다. 화원을 나서면 바로 앞이 방인데 무슨 길 안내를 부탁한단 말인가?

    옥비가 자신을 피하고 싶어 한다 생각한 지온이 루안에게 슬쩍 시선을 던지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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