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8)화 (178/385)
  • 178화. 의문점

    현비의 입이 열렸다.

    “옥비, 자네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그것은 어째서인가?”

    마음을 추스른 옥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군자의 도를 준수해야 한다는 조부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 그런 일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거든, 지난 3년간 제가 다른 분들과 감정적인 일들로 다툼을 벌인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시지요.”

    현비가 조롱 섞인 비웃음을 지었다.

    “전에 자네가 그리하지 않았던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땐 폐하께서 자네를 가장 중히 보셨을 테니 말일세. 그러나 본궁이 용종을 회임한 후에 자네, 질투 한 번 한 적 없다 감히 말 할 수 있나?”

    “그것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옥비였다.

    현비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폐하의 눈을 보고 말해보란 말일세!”

    달싹, 고개를 든 옥비와 황제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녀의 입술이 흔들렸으나 끝내 망설임을 이기지 못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가? 제아무리 자네가 집착 없이 가볍게 사는 소탈한 사람인 양 속이고 싶었어도, 올라오는 본인의 질투심마저 속일 순 없었던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지온 소저가 있는 사방전에는 왜 갔던 것인가? 화신점이 영험하단 소문이 도니, 원씨 가문의 며느리가 그랬던 것처럼 자네도 아이를 얻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던 게야?”

    “저, 저는…….”

    “본궁이 회임한 후로 항상 이상하다 했지. 자네와 같은 장소에 있을 때마다 본궁을 보는 자네의 눈빛 때문에 본궁은 늘 가시방석이었단 말이야.”

    “그건 그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옥비가 항변했다.

    “궁에서 아이를 본 일이 없어 그랬던 것일 뿐…….”

    현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럼 자네의 궁녀가 거가 안에서 한 말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어찌 설명할 거야!”

    순간 벙벙해진 옥비가 딱딱하게 굳었다.

    냉소를 지은 현비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 궁을 나설 때 옥비를 측근에서 모시는 궁녀가 거가에서 이리 말했지요. 본궁이 겨우 뱃속에 용종을 가진 걸 가지고 위세를 부린다며, 이로 인해 옥비가 섭섭해 할 거라면서요. 저들끼리 워낙 크게 떠들어 의장 행렬을 서던 내시의 귀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으니 믿기 어려우시다면, 그 내시를 불러 물어보셔도 되옵니다.”

    현비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자 옥비는 대경실색했고 금벽은 대번에 풀썩,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추아가 나오는 대로 말을 하는 바람에 마마께서 이미 꾸짖은 일이었사옵니다! 이 일은 정말 저희 마마께서 하신 일이 아니옵니다! 마마께선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러나 그녀를 물고 놔줄 생각이 없는 현비가 차갑게 웃었다.

    “하찮은 궁녀가 어찌 감히 본궁의 뒷말을 할 수 있겠느냐? 다 제 주인의 방임 때문이 아니냐? 분명 옥비의 평소 언행을 보고 그 아이가 배운 것이 있으니 그리 행동할 수 있었던 게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수록 핏기가 사라져,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가던 옥비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폐하, 신첩이 거느리는 궁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첩은 절대…….”

    “증거가 이리 명확한데 계속 발뺌을 할 셈이야!”

    그녀의 말을 잘라먹은 현비가 울음을 터트렸다. 혈색 하나 없는 얼굴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이, 누가 보더라도 동정이 절로 이는 모습이었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죽였어! 사람이 어떻게 이리 잔인해! 내 자네의 성총을 가져간 것이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폐하와 황자가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내가 잘못한 건가? 자넨 겨우 며칠도 참을 수가 없던 것인가? 그럼 우린 어땠을 것 같은가? 나와 황후마마, 신비 말일세. 지난 3년간 폐하께서 단 하루라도 자네를 총애하지 않았던 날이 있었는가? 그럼 대체 우린 어쩌란 말인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처량하고 서글퍼, 황후와 신비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맞아. 옥비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워낙 노골적이긴 했어. 우리 셋을 합쳐도 옥비 하나를 당해낼 수가 없었지.’

    “폐하…….”

    저도 모르게 입을 연 신비의 눈이 황제를 향했다.

    황후는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후궁의 주인 자리에 앉아있는 황후로서, 당연히 그녀는 현비나 신비처럼 입을 벌려 간청을 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슬픈 기색을 드러낸 것은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처량함이 차오르며 전 안에 슬픔이 번져갔다. 순식간에 옥비는 여인 셋을 박해한 요비(妖妃)가 되어버렸다.

    옥비는 그저 부인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는 아닙니다! 폐하, 절 믿어주시옵소서!”

    “증거가 이리 명확한데, 그저 세 치 혀로 아니라 한다 한들 그것이 없어질 것 같으냐?”

    현비가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네 궁녀가 팔찌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나와 신비는 그저 이대로 자네 손에 당하고 말았겠지.”

    상황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현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계속해서 중요한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동기와 증거의 완벽함.

    그에 반해 옥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현비가 황제를 바라보더니 무릎을 꿇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급하게 그녀를 붙들었지만, 마음에 번민이 일어 크게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는 내심 옥비가 한 일이 아닐 것 같아서 의심을 품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자신이 옥비를 감싸고 든다면 현비와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당연했고, 그러다 저들의 외척들이 들고 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사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터였다.

    ‘차라리 도망친 궁녀부터 잡자. 궁녀를 잡아 제대로 심문을 하는 게야. 그리고 옥비가 한 일이 아닌 것이 밝혀지면, 그땐 옥비가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 마음을 정한 황제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폐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우뚝, 멈춰선 황제가 루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다가온 루안이 입을 열었다.

    “신, 조사 중 아직 풀지 못한 의문점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윤허해 주신다면, 신이 현비마마께 몇 가지를 여쭙고 싶사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었던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허락했다.

    “묻게.”

    루안이 공수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의 시선이 현비에게로 향했다.

    “마마께 감히 여쭙겠사옵니다. 마마께선 확실히 산사음을 마신 후에 유산하신 것이옵니까? 혹시 다른 가능성이 없는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주시길 바라옵니다.”

    현비가 불쾌한 듯 대꾸했다.

    “본궁은 다른 것을 먹은 일이 없네. 먹은 것은 그 산사음뿐일세.”

    “확실하시옵니까?”

    “당연하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옵니다.”

    루안이 손을 뻗어 빈 그릇을 집어 올렸다.

    “이 탕은 처음부터 산사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유산이 될 수 있단 말인지요?”

    ‘뭐라?’

    ‘지금 뭐라 한 것이야?’

    어리벙벙해진 이들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루안이 빈 그릇을 호은에게 건넸다.

    “호 공공, 맛을 한 번 보시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바로 황제를 쳐다본 호은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릇에 남은 잔여물을 손으로 긁어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무슨 맛인지요?”

    “달고, 조금 신 맛이 나네. 확실히 과실로 만든 탕은 맞으나…….”

    “산사의 맛은 아닐 것입니다. 맞는지요?”

    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산사의 맛은 아닐세. 이 맛은…….”

    “앵두.”

    루안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앵두!”

    호은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앵두일세!”

    루안이 다른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태의, 앵두는 먹어도 무방할 테지?”

    태의가 대답했다.

    “앵두는 기를 보하고 비장을 튼튼하게 하는 재료로 임산부에게 아주 좋습니다.”

    미소를 지은 루안이 다시 현비를 바라보았다.

    “마마 들으셨사옵니까? 그런데 어찌 앵두음이 분명한 것을, 산사음이라 착각하시어 용종까지 잃으셨사옵니까?”

    본래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현비는 루안의 말을 듣자마자 얼음이라도 된 듯 굳어버렸다.

    그녀의 귀에선 웅웅 이명이 울렸고, 머릿속에선 루안이 했던 말이 반복해서 메아리쳤다.

    앵두음이 분명한 것을…….

    앵두음……. 앵두음…….

    ‘어찌, 어찌 이럴 수가?’

    “뭐라? 앵두음?!”

    황제는 이에 놀라서 펄쩍 뛰었다.

    “호은, 정말 앵두음이었느냐?”

    “그렇사옵니다.”

    호은이 대답했다.

    “소신이 맛을 보니 산사의 맛이 아니었사옵니다.”

    “이게 어찌 된 것이냐?”

    황제의 머릿속엔 온통 의문이 가득했다.

    “산사음이 멀쩡히 있다가 왜 갑자기 앵두음이 됐다는 게야? 그럼 현비는 이것 때문에 아이를 잃은 것이 아니란 말이냐?”

    “좋은 질문이십니다, 폐하.”

    루안이 다시 몸을 돌리곤 주방 어멈에게 물었다.

    “자네가 대답해보게. 주방에서 만든 것은 앵두음이었는가, 산사음이었는가?”

    주방 어멈의 입이 파르르 떨리며 달싹이듯이 열렸다.

    “사실 쇤네가 만든 것은……. 앵두음입니다, 대인.”

    “그럼 조금 전엔 왜 말하지 않았지?”

    주방 어멈의 요동치는 시선이 지온을 향하자,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주방 어멈에게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음?”

    지온이 황제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히곤 입을 열었다.

    “폐하, 신녀는 의술에 조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궁녀가 찾아와 산사음을 요청하였을 때 이것이 마마께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나, 굳이 산사음을 콕 집어 찾으시는 터라 만들어 드리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때마침 신녀가 설탕에 절여 둔 앵두를 먹고 있었던지라, 주방 어멈에게 앵두를 주어 산사가 내는 새콤달콤한 맛을 내어 탕을 내라 했던 것입니다.”

    지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신녀는 어떤 이가 산사음을 요청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터라, 주방 어멈에게 산사 대신 앵두를 썼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우선 지켜보라 하였습니다. 만일 누군가 현비마마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 노림수를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지온이 한숨을 지었다.

    “현비마마께서 끝내 일을 당하시게 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거기다 산사음이 문제라 생각하시리라고는……. 신녀, 있지도 않은 산사음이었는데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참으로 의아하였으나,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기에 일단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일이 그리된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현비의 용종이 떨어진 원인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지만 현비가 유산을 했단 것은 확실한데 그럼 유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한 상황 속에 루안의 목소리가 황제의 귓가에 들려왔다.

    “신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사옵니다. 보내온 것이 앵두음이었다면 현비마마께선 어찌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셨던 것이옵니까? 혹, 마마께선 앵두음을 처음부터 입에도 대지 않으셨던 것이옵니까?”

    그 말에 현비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팔걸이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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