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7)화 (177/385)
  • 177화. 폐하가 날 의심하신다고?

    자리한 이들의 시선이 분분히 날아들었다.

    열린 신비의 입에선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 독주를 내가 받게 되다니!’

    “폐하!”

    신비가 무릎을 꿇었다.

    “신첩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비는 그의 눈빛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흉수의 손에 자네의 요패가 있었던 것은 어찌 설명하겠는가?”

    신비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알 리가 있겠는가? 결국, 신비는 자신을 가장 가깝게 모시는 궁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신비의 최측근인 궁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마마님의 요패는 소인이 관리하고 있사옵니다. 폐하, 소인에게 잠시 시간을 주시면 지금 바로 찾아보겠사옵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인인 신비의 결백을 증명하는 일이었으니, 신비를 모시는 궁녀들도 대충 찾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궁녀들이 챙겨온 행장들을 모두 뒤지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신비의 궁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마마님의 요패가 사라졌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신비는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한 듯이 휘청거렸다.

    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어찌 증명한단 말인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요패를 훔치고, 현비의 용종을 떨어뜨림으로써 단박에 두 사람에게 독주를 들게 한 이가…… 설마, 황후?’

    “더 할 말이 있는가?”

    황제가 물었다.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떠는 신비의 얼굴이 애달팠다.

    “폐하, 신첩이 한 일이 아니옵니다. 하늘에 맹세코 신첩은 그런 마음을 먹은 일이 없사옵니다. 폐하, 신첩을 믿어주시어요.”

    그때, 원한에 찬 현비의 궁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비마마께서는 평소에도 저희 마마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지요.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좋겠습니까! 하늘에 맹세한다는 말 한마디면, 나온 증거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으니, 신비가 어떤 말을 늘어놓는다 해도 소달이 조사해온 증거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의심스러운 궁녀가 신비의 요패로 조방궁을 빠져나간 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던가.

    신비가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그 의심스러운 궁녀를 잡아다가 그녀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혀야만 했다.

    그러나 그 궁녀는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조방궁을 빠져나갔으니, 빨리 잡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전까지는 신비가 혐의가 가장 큰 용의자가 되는 것이다.

    어두운 얼굴의 황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루안이 입을 열었다.

    “폐하,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 일을 신비마마께서 계획하셨다면, 요패를 이리 가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이목을 끄는 행동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조사 한 번이면 바로 밝혀질 일입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이 사건이 신비마마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신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폐하, 신첩이 비록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곤 하나, 이렇게까지 우매한 짓은 하지 않사옵니다!”

    ‘그도 그렇군…….’

    황제의 시름은 깊어졌다. 

    ‘하지만 신비가 아니라면, 또 누구란 말인가? 신비의 요패를 훔칠 수 있을 정도라면 분명 이번 행차에 함께한 사람이 아닌가. 설마, 한 사람씩 모두 심문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현비를 모시는 궁인이 내실에서 나와 황제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마마께서 전하시길 신비마마께선 억울하게 누명을 쓰신 것일 뿐, 일을 계획하신 분이 아닐 것이라 전하셨사옵니다. 저희 마마를 해치고 죄를 신비마마께 뒤집어씌우면, 일거양득이란 말씀도 함께 전하시었사옵니다.”

    현비가 신비를 위해 입을 여는 날이 올 줄이야!

    신비나 황제나 너나 할 것 없이 감동한 얼굴들이었다.

    신비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폐하, 저와 현비마마가 가끔 말다툼을 벌인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수단까지는, 신첩, 절대 쓰지 못하옵니다! 이는 현비마마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일 것이옵니다!”

    현비가 보인 대인군자다운 풍모는 접어두더라도, 그녀가 궁녀를 통해 전한 일거양득이란 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현비가 아이를 잃고, 신비가 용의자가 되면 가장 이득을 보는 이는…….’

    이제 모두의 시선이 황후와 옥비에게 향했다.

    특히 황후에게로 말이다.

    출궁하는 궁인 모두를 그녀가 골랐으니, 제 사람 하나 심어두는 것 정도는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명문가 출신인 황후는 명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당장 의심을 받아 용의자가 되게 생겼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황후는 당장 입을 열었다.

    “폐하, 이 일은 신첩과 무관합니다. 신첩은 현비에게 손을 쓴 일이 없고, 신비를 모함한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거든, 얼마든지 조사하셔도 좋습니다.”

    황후가 그리 말하는데, 옥비라고 가만있을 수가 있겠는가.

    “신첩 역시 그러하옵니다.”

    말은 그리했으나, 조사를 어찌해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고즈넉한 것을 좋아하는 대장공주의 성정 덕분에 난택산방의 경계는 삼엄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후비들이 오가며 서로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금군이 문제의 궁녀를 잡아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듯 보였지만, 그러자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신비의 궁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폐하, 조금 전 소인이 요패를 찾을 때 없어진 물건이 하나 더 있었사옵니다.”

    “무엇이냐?”

    “마마의 팔찌이옵니다!”

    황제가 소달에게 바로 물었다.

    “소달, 그 궁녀가 떠날 때 팔찌를 하고 있었는가?”

    소달이 뒤에 있는 시위에게 몇 가지를 묻더니 다시 황제에게 대답했다.

    “그 궁녀가 하고 있던 팔찌가 평범한 은팔찌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마마의 팔찌는 아닐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오늘 조방궁을 나가려면 절차에 따라 몸수색을 하게 되어있었다. 신비의 팔찌는 내궁에서 만든 물건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수색을 할 때 걸렸을 것이었다.

    한 마디로, 없어진 팔찌는 아직 조방궁에 남아있으리란 뜻이었다.

    “찾아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전 밖에 있던 시위들이 고함지르는 소리가 왕왕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미간을 좁힌 대장공주가 지온에게 슬그머니 불평을 토로했다.

    “누군지 괘씸한지고. 궁에서 난리를 치는 게 모자라 조방궁까지 찾아와 이 난장을 피우는 게야? 난택산방이 이게 다 무슨 꼴이냐?”

    지온이 그녀를 다독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어머니. 이제 곧 진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냥 하는 말 같지가 않구먼? 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이야? 무엇이기에 아직 함구하고 있는 게야?”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 괘씸한 이가 아직 모든 수를 다 쓴 게 아니라 그런 게지요. 현행범을 딱, 잡아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대장공주는 떽, 욕을 하면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말썽꾸러기를 어쩌면 좋아!”

    지온에게 이야기를 들은 대장공주는 여유롭게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기다렸다.

    그때, 밖에서 들리던 웅성거림이 갑자기 커지더니 시위 하나가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폐하, 찾았사옵니다!”

    황제에게 올린 상자 안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물건들은 출타를 위한 물건들이었는데, 그중 옷가지 사이에 끼어있는 금팔찌가 유독 눈에 띄었다.

    신비의 궁녀가 그 팔찌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저것입니다, 바로 저 팔찌이옵니다!”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행장이냐?”

    어린 궁녀 하나가 등 떠밀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본 옥비가 경악성을 토했다.

    “추아야?!”

    놀라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어린 궁녀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외쳤다.

    “마마, 소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왜 팔찌가 제 짐 속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러나 물증이 있는 이상, 어린 궁녀가 아무리 억울하다 외쳐본들 얼마나 믿음이 가겠는가?

    “너였다니…….”

    현비의 궁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옥비마마, 어찌하여 저희 마마님께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아무리 저희 마마께서 먼저 용종을 회임하시어 폐하의 관심을 조금 나누어 가지셨다 한들, 씨까지 말릴 필욘 없지 않으셨습니까!”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얼굴의 옥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내가 한 일이 아니야!”

    궁에 든 이래 그녀는 언제나 황제의 보호 아래 있었다. 본인은 마치 다른 황제의 여인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후궁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에는 발을 담그지 않았던지라 지금과 같은 일은 처음 겪는 것이었다.

    “폐하!”

    옥비는 본능적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의심이 실려 있음을 발견했다.

    ‘폐하가 날 의심하신다고?’

    옥비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현비가 회임을 한 이후로 무언가 달라져 버렸다.

    ‘오직 내게만 나눠주던 관심과 애정도 더는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지금, 폐하께선 믿음마저 거두시려는 것인가. 폐하, 옥종화를 가장 사랑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를 사랑하기에, 당신의 마음엔 오직 그녀뿐일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어찌하여 그녀를 믿지 않으시는 것인지요…….’

    옥비는 속으로 외쳤다. 

    ‘옥종화는 참으로 고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가 진정, 총애 따위를 위해 다른 이를 모함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했으리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폐하?’

    ‘역시.’

    지온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주도한 주모자의 목적은 이미 적나라했다.

    다만 주모자의 공격 대상이 옥비인 것이 지온을 망설이게끔 했다.

    ‘옥비를 도와주는 건 너무 싫은데!’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황제의 입이 열렸다.

    “정말 자네가 한 일이 아니야?”

    죄를 확정 짓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황제의 말은 비수가 되어 옥비의 가슴에 날카롭게 꽂혔다.

    ‘역시 날 믿지 않으시는구나.’

    “아닙니다.”

    옥비가 애처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첩이 아닙니다. 신첩이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녀가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황제의 마음이 흔들렸다.

    황제는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다른 의미를 알아들었다.

    ‘옥종화’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옥종화’가 된 자신도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옥비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망설이고 있을 때, 내실의 문이 열리더니 현비가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매우 놀란 황후가 입을 열었다.

    “현비! 어찌 가만 누워있지 않고 나온 것인가!”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창백한 얼굴의 현비는 바람에 이는 버들잎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거렸다.

    “왜 나온 것인가? 어서 돌아가 다시 눕게. 지금은 잘 쉬어야 할 때야.”

    황제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간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관심이었고, 배려였다.

    현비가 그런 황제를 향해 쓰러질 듯, 나약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신첩의 고집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신첩, 이리 나와 확실하게 묻지 않고는 도무지 마음이 편하여질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몸이 크게 상한 자네가 어찌 버티려고!”

    현비가 절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옵니다, 폐하. 신첩이 옥비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러니 제발 그리하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까지 부탁을 해오는 현비를, 황제가 어떻게 거절을 한단 말인가?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럼 앉아라.”

    “감사합니다, 폐하.”

    병색이 완연한 현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옥비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발 물러섰다.

    분명 아픈 사람은 현비고 자신은 건강함에도, 그녀는 어쩐지 자신이 약자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기울어져 버린 황제의 마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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