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6)화 (176/385)
  • 176화. 음모가 틀림없습니다!

    이윽고 현비의 궁인이 찾아왔다.

    “마마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던 여인이란 마음에 화난 기색이 다소 풀린 황제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데 다른 이들이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황후와 두 비 역시 따라나섰다.

    가장 뒤에 선 대장공주가 지온에게 작게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무슨 술수인 게야? 설마 본궁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대대로 후궁들은 후사를 두고 온갖 암투를 벌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멀쩡한 궁을 놔두고 굳이 조방궁에 찾아와 이 난리를 벌인단 말인가?

    가만히 수행하는 대장공주가 뭐가 그리 해가 된다고 이러는 것인지, 원!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온이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보니 그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궁에선 보는 눈이 많아 못하던 일을 조방궁에 왔을 때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대장공주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오늘은 현비 스스로 오고 싶다 한 것이야…….”

    지온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일단 저들이 무슨 연기를 어찌하나 보고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어머니.”

    그 말에 지온을 흘겨보던 대장공주가 그녀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엉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또 내게 숨기는 것이 있구먼!”

    지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작게 말했다.

    “제대로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 * *

    다들 현비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황제만 문안을 위해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방에 머무르며 기다렸다.

    지온이 슬며시 상황을 살펴보니, 주방에 산자음을 얻으러 찾아왔던 궁녀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과 황제가 위로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 *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이 난리의 한 막이 지나갔다.

    현비가 누워 쉬고 있을 때, 루안은 사람을 지목해 옆으로 데려가 심문을 시작했다.

    오늘 하루 현비의 행적은 아주 명확했다.

    난택산방에 들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함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오직 대장공주를 만난 이후 이곳에서 쉬던 그 짧은 시간이 해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심문이 이어지던 그때, 현비를 곁에서 모시던 큰궁녀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결사의 각오를 다진 듯 소리를 질렀다.

    “폐하,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황후와 두 비의 심장이 펄쩍 뛰더니, 숨이 가빠왔다.

    드디어 대망의 한 수가 시작되는 것인가!

    황제가 낮게 소리쳤다.

    “말하거라!”

    궁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 마마께서 이곳에 들어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방에서 특별히 마마님을 위해 끓인 것이라며 마실 것 한 그릇을 보내왔사옵니다. 노비가 침상을 정리하는 중이었던 지라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돌아보니 마마께서 이미 그 한 그릇을 모두 비우신 뒤였습니다.”

    궁녀가 고개를 떨궜다.

    “놀란 소인이 그릇의 남은 것을 찍어 맛을 보니 그것이, 그것이…….”

    조갈(燥渴)이 난 듯 황제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어!”

    이제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궁녀가 질끈 눈을 감고 소리쳤다.

    “산사음이었사옵니다!”

    그녀의 대답에 누군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지만, 누군가는 얼굴색이 바뀌었다.

    황제는 어리둥절한 쪽이었다.

    ‘산사음이 무엇이라고? 평소에 잘 마시던 것이 아닌가? 설마 그 안에 독이라도 든 것인가?’

    그를 대신하여 대장공주가 질문을 던졌다.

    “산사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야?”

    황후가 대답했다.

    “산사는 피를 돌게 하는 음식이라 임부에게 좋은 음식이 아닙니다. 아마 태의가 주의하라 일러 주었을 것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태의를 향하자 태의가 급히 입을 열었다.

    “신, 말씀을 올렸사옵니다. 마마께서 잠시 잊으셨던 모양이옵니다.”

    현비 곁에는 당연히 그녀의 식사를 전문적으로 챙기는 이가 따로 있기도 했고, 산사가 크게 중요한 금기 음식도 아니었으니, 현비가 소홀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럼 산사음을 마셔서 문제가 생긴 것이란 말이냐?”

    고민하던 태의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폐하, 산사가 피를 돌게 하는 것은 맞으나, 일반적으로 평소 섭취하는 양 정도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사옵니다. 단지 귀한 용종이시오니 아무리 작은 위험도 그저 지나치지 않기 위해 태의원에서 권하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대답에 짜증이 난 황제가 물었다.

    “약효고 뭐고, 짐에게 한 가지만 대답하거라! 산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냐?”

    태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알겠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문을 마친 루안이 현비의 행적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 바로 저 산사음이 아닌가!

    궁녀가 이마를 땅에 찢으며 읍소하기 시작했다.

    “모두 저의 잘못이옵니다! 소인이 신경을 못 써 마마님께서 산사음을 마신 것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궁녀의 이마에서 금방 피가 터져 흘러내렸다. 핏물에 눈물, 콧물까지 줄줄 흘리며 울부짖는 궁녀는 다들 지켜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리 큰 문제가 생겼으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황제의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얼굴에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것이 궁녀를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자신의 첫 번째 아이를 이리 잃었는데, 궁녀 하나에게 책임을 물어 처리하자니 도저히 성에 차질 않았던 것이다.

    그때, 궁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소인은 죽어 마땅하나 하나, 이 일은 절대 단순한 일이 아니옵니다! 가만히 있던 주방에서 왜 갑자기 산사음을 보낸단 말입니까!? 폐하! 제발 엄밀한 조사를 통해 마마의 원을 풀어주시옵소서!”

    그녀의 말을 들은 황후와 두 비의 신색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궁녀가 자신들을 직접 지목한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후비들 외에 또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들의 생각대로 후비들은 사건에 함께 휘말리게 되었다.

    황제도 궁녀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후비들을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루 통정.”

    “네, 폐하.”

    루안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조사하게!”

    “네, 폐하.”

    루안은 고찬을 불러 주방 사람들을 잡아 오라는 명을 내린 후, 다시 궁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산사음을 가져온 찬합은 어디 있는가?”

    궁녀가 손으로 가리키자 곧 시위가 찬합을 가지고 왔다.

    찬합은 확실히 난택산방의 것이었다. 안에는 빈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그릇 안엔 마시고 남은 탕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소매를 걷은 루안이 그릇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이내 미간을 좁혔다.

    지온은 내내 루안을 보고 있었다.

    붉은색 관복을 입은 그는, 왜 이리 보면 볼수록 준수하고 멋지기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걷어 올린 소매 밖으로 길게 뻗은 희고 깨끗한 팔과 그에 상반된 도드라진 골격이며 근육들이…….

    그러다 그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본 지온은 그제야 아름다운 그의 몸에서 눈을 떼고 정신을 차렸다.

    ‘개 코인 루 대인께서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으셨나?’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 *

    이윽고 주방에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루안이 던진 질문에 주방 어멈이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산사음은 쇠, 쇤네가 만들었습니다.”

    “산사음을 왜 만들었는가?”

    주방 어멈이 대답했다.

    “현비마마를 모시는 궁녀가 찾아와 산사음을 끓여 달라고 했습니다.”

    “거짓말!”

    궁녀가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마마께서 회임하신 뒤로 피해야 하는 음식들을 자다가 일어나도 줄줄 읊는 우리가 어떻게 산사음을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

    주방 어멈은 곧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이며 항변했다.

    “하지만 진짜 그랬습니다! 그때 저희 사방전주께서도 계셨으니 증명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지온에게 쏠렸다.

    대장공주가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지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인 게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매고고께서 제게 차탕을 만드는 것을 살피라 하셔서 보고 있었사온데, 궁녀 하나가 들어와 현비마마께서 산사음이 드시고 싶다 하셨다며 저희에게 끓여 가져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루안이 주방 어멈에게 물었다.

    “궁녀의 생김이 어떠했는가? 알아볼 수 있는가?”

    주방 어멈이 황급히 대답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루안이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신이 주방 어멈을 데리고 확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하여 난택산방에 온 일이 있던 궁녀들이 모두 불려왔고, 루안은 주방 어멈을 데리고 일일이 확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주방 어멈이 몇 번이나 확인했으나 그 안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소 장군께서 난택산방 밖으로 나갔는지 수색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도망이라도 쳤단 말인가?’

    현비의 궁녀가 울부짖었다.

    “폐하, 음모가 틀림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궁녀가 갑자기 나타나 마마를 모시는 궁녀라 거짓말까지 하고 산사음을 달라지 않았습니까! 분명 일부러 마마님의 아기씨를 떨어뜨리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옵니다! 폐하, 마마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아기씨를 이리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그 사이 안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현비가 밖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은 듯했다.

    황제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현비의 슬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폐하, 모든 것이 신첩의 잘못입니다. 순간의 탐식이 이리 틈을 주고 말았으니, 모두 신첩의 죄입니다…….”

    현비가 그럴수록 황제는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꾹꾹 화를 참으며 그녀를 위로하고 나온 황제의 얼굴엔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궁녀 하나가 그리 사라질 때까지 너희 금의위는 뭣들 한 것이냐? 소달!”

    밖을 지키고 있던 금군통령 소달이 곧장 달려 들어왔다.

    “신, 소달!”

    “찾아라! 조방궁을 거꾸로 뒤집어서라도 찾아내!”

    “명을 받드옵니다!”

    큰소리로 외친 소달이 금의위를 이끌고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 * *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모두의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

    지난 삼 년간 후궁에서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황제의 후사를 해치다니, 이는 목숨이 오가는 일이 아닌가!

    누가 이 독주를 마시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소달의 보고가 올라왔다.

    “폐하, 조금 전 한 궁녀가 조방궁을 빠져나갔사옵니다!”

    “어찌 된 것이냐!”

    “사건이 터졌을 때 수상한 여자가 조방궁을 빠져나갔다 합니다. 신이 확인한바, 생김새가 주방 어멈이 설명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미간을 좁힌 루안이 물었다.

    “소 장군, 폐하의 행차로 조방궁은 현재 계엄(戒嚴) 중이라 출입이 금지되었을 텐데, 그 여자가 어떻게 조방궁을 나갈 수 있었단 말이오?”

    “루 대인, 마침 잘 물어보셨소!”

    소달이 말했다.

    “그 여자가 요패(*腰牌: 과거 허리에 차던 출입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소!”

    깜짝 놀란 대장공주가 물었다.

    “요패라니!?”

    소달의 눈빛이 싸늘하게 후비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손수건을 찢어질 듯이 움켜쥔 후비들은, 자신이 혹시 약점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는지 머리가 터지도록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끝내 소달의 입이 열렸다.

    “신비마마의 요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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