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5)화 (175/385)
  • 175화. 유산

    옥비가 떠오르자 루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조금 전엔 무슨 일이오?”

    지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라니요?”

    “방금 옥비마마께서 이곳에서 나가시던데, 그 전에 소란이 있지 않았소. 그래서 금군이 달려왔더니 또 내시가 아무 일 없다고 했소.”

    “아…….”

    지온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별 거 아니었어요. 지금처럼 내가 차를 우려 줬거든요.”

    루안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가 밖을 한 번 휙, 살피곤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미쳤소? 그녀는 이미 그때의 금벽이 아니오!”

    지온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금벽이 맞는지 아닌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루안이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알았소?”

    지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차를 마시는 지온의 목소리가 조금 슬픈 듯 느껴졌다.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몇 년인데…… 몰랐어요, 그런 아이인 줄…….”

    루안이 말했다.

    “당시엔 반쯤 주인과 시녀 관계로 당신에게 의지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오. 하지만 이제 옥종화는 죽었고, 자신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 귀비가 되었으니, 당연히 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때와 다르겠지. 사람은 환경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지기 마련이오. 나만 해도 예전의 동창들이 지금은 나와 인사조차 나누려 하지 않소.”

    순간 찌릿하게 가슴이 아파진 지온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달라요.”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당신은 변한 적이 없었어요.”

    “…….”

    통제를 벗어난 입꼬리가 스르륵 말려 올라가는 것을 느낀 루안은, 제 뺨을 짝하는 소리 나게 때리고 싶었다.

    분명 그녀에게 경고하던 중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한 마디에 기분이 이리 좋아지면 어쩌잔 말인가!

    ‘못난 놈!’

    그러나 이미 좋아진 기분을 어쩌겠는가? 달라진 분위기에 루안이 물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소?”

    “그냥 좀 놀라게 해 준 것뿐이에요.”

    지온이 가볍게 설명을 이었다.

    “죽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려주려고요.”

    루안은 말이 없었다.

    그녀의 성정은 늘 변함이 없었다.

    때론 호쾌하면서 대범했지만, 때론 작은 것 하나까지 물고 늘어져 절대 놓지 않았다.

    만약 금벽에게 다른 사정이 있었다면, 함께 지낸 정이 있었을 테니 ‘옥종화’란 이름 따위 주고 말았을 터였다.

    그러나 금벽은 단지 본인의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고, 거기에 옥씨 가문의 명성마저 연루가 되었으니, 적어도 이름값의 이자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하지 말아요, 감히 폐하 앞에선 말도 못 하고 계속 의심만 할 테니까. 아마 무섭고 놀라서 자다가도 흠칫흠칫할 거예요.”

    루안이 조용히 소리쳤다.

    “살인멸구라도 하려고 들면 어쩌려 그러시오? 두렵지 않소?”

    지온이 마치 옥비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비웃음을 지었다.

    “죽이고 싶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죽일 수 있겠어요? 걔가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해 봐야 폐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인물들일 거예요. 더구나 제 수양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암중호위들도 있잖아요.”

    실바람 같은 미소를 지으며 루안을 바라보는 지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당신도 있잖아요. 그 애가 당신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아요.”

    은근하게 다가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온의 목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진 루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람을 붙여놨긴 하오…….”

    말을 하던 루안은 문득 지온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내심 화가 났다.

    그녀를 상대할 땐 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연신 차만 들이키는 루안이었다.

    그런 루안을 바라보며 풋 하고 웃은 지온이, 이번엔 탁자 아래에서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루안의 반응이 너무도 빨랐다.

    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바로 자신의 손을 잡아채, 제 손안에 가둬버리곤 만지작거리는 게 아닌가!

    고개를 번쩍 든 지온이 그를 향해 눈을 홉떴지만, 돋보이는 관복을 입은 루 대인은 여전히 엄한 표정과 얌전해 보이는 눈빛을 한 채, 자연스러운 위엄을 마구 흘려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지온은 저도 모르게 상스러운 한마디를 던질 뻔했다.

    ‘점잖떠네.’

    아마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탓이리라.

    그저 손만 잡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루안은 시간을 계산해보고 있었다.

    ‘연말까지 앞으로 서너 달이나 남았다니, 속이 타는군. 날이 안 가도 너무 안 가는 게 아닌가?’

    지온은 또 지온대로 생각이 많았다.

    ‘지금은 시간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잖아. 그러니 선은 넘지 말자. 괜히 일을 만들지도 몰라.’

    서로 내면의 유혹을 이기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침묵하며 조용한 한때를 즐겼다.

    * * *

    그러나 좋았던 시간은 금세 깨져버렸다.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고찬이 낭랑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저희 대인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청옥이 고찬을 데리고 왔을 때, 루안과 지온은 이미 떨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대인!”

    초조해 보이는 고찬이 들어오자마자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현비마마께 일이 생겼습니다!”

    * * *

    두 사람은 연달아 난택산방에 도착했다.

    난택산방의 분위기는 지온이 떠날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오가는 궁녀들과 내시들 모두 초조한 얼굴이었고, 시위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여인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루안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들어갔고 지온은 낭하에 서서 미간을 좁힌 채 안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지온을 찾고 있던 서아였다.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지온이 그녀를 찰싹 때리고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서아가 대청을 흘끔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현비마마께서 복통을 호소하셔서 함께 온 태의를 불러 진찰을 했는데, 그게…… 아마 유산이 될 것 같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셨대?”

    평온한 지온의 목소리에 서아 역시 평정을 찾았다.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중에 현비마마께서 갑자기 그러셨대요…….”

    ‘역시나 그랬군.’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지온이 서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 그리고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말고.”

    서아는 영문을 몰랐다.

    “아가씨?”

    * * *

    그러나 지온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문 앞을 지키는 내시는 그녀를 보았지만 막지 않았다.

    곱게 시선을 내린 그녀가 황제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곤 대장공주의 뒤로 가서 섰다.

    엄한 표정의 대장공주가 그녀를 보곤 낮게 물었다.

    “어딜 다녀온 게야?”

    “옥비마마께서 화신점을 보고 싶다 하시어 함께 사방전에 갔다가, 잠시 다른 일을 보고 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는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황제와 대장공주를 제외하고, 황후와 비 두 사람 모두 자리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에 미간을 단단히 좁히고 있었다.

    지온을 본 옥비는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금방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상황은 아까처럼 웃음을 보일 수 없는 상황인지라, 지온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황제는 루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다 돌연 복통이라니, 거기다 원인도 모른다?”

    루안이 대답했다.

    “금일 조방궁엔 향객이 없었으니, 현비마마께서 내내 접촉하신 것들이 모두 남아있어 조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밀려오는 분노로 가슴을 들썩거리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걷더니 소리쳤다.

    “찾아라! 확실히 밝혀져야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루안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다.

    “네, 폐하.”

    조급증이 난 황제의 목소리가 훌쩍 올라갔다.

    “그런데 빨리 안 가고 뭐 하는 건가!”

    루안이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청렴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폐하. 태의로부터 현비마마의 복통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확인을 받은 후에, 다시 단서에 따라 조사를 하여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갈피없이 이대로 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은 도리어 시간만 잡아먹거나, 타초경사의 우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루안의 모습에 황제도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자네 말이 맞군.”

    직접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지온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역시 간신의 재목, 루 대인! 폐하의 기쁨과 분노를 말 몇 마디로 휘어잡는구나.’

    이 와중에도 현비의 신음이 들렸다가 멈추길 반복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이윽고 태의가 나타났다.

    황제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아이는 어찌 되었는가?”

    태의의 머리가 더욱 아래로 굽혀졌다.

    “신이 무능하나이다…….”

    동공이 바짝 좁아진 황제의 낯가죽이 불그죽죽하게 변했다. 마침내 황제가 노성을 토했다.

    “어찌하여 지키질 못한 것이냐? 부과(*婦科: 부인과)의 신의(神醫)라는 자네가, 어찌하여!”

    덜덜 떨던 태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폐, 폐하! 신이 도착했을 때, 현비마마께서 이미 유산의 징조를 보이고 계셨던지라 도저히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폐하,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황제가 성질을 못 이기는 것처럼 통제를 잃으려고 하자 대장공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원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 다른 곳에 화를 풀지 마세요!”

    대장공주의 말에 황제는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고모님 앞에서 화를 내선 안 돼. 난 선제께서 키운 사람이야, 강왕부 사람들과는 다른 인간이다.’

    화를 다스린 황제가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비는 지금 어떤가? 오늘 궁에서 나올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복통이 있단 말인가? 오는 길에 너무 요동이 심했던 것인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의가 대답했다.

    “마마의 아기씨는 이미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신이 처방을 내렸으니 출혈만 없으시다면 다른 문제는 없으실 것이옵니다. 복통의 원인이라면은…….”

    “어서 말하지 못할까!”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태의가 쩔쩔매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출궁하실 때 신이 맥을 봐 드렸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사옵니다. 그러나 신이 조금 전 진맥을 하니, 그것이, 그것이…… 무언가 좋지 않은 것을 드신 것 같았사옵니다.”

    난데없이 무거운 쇳덩이가 날아든 듯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얼굴이 일변한 황후와 두 비의 시선이 모두 황제에게 향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것을 드신 것 같다’는 말은 누군가 약을 탔단 의미였다.

    후궁의 암투 중 가장 치열한 것이 바로 후사를 두고 일어나는 암투가 아니던가! 모두 후비(*后妃: 황후와 비)인 이상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폐하…….”

    황후가 무어가 말을 하려 했으나, 손을 들어 제지한 황제가 태의에게 물었다.

    “확실한가?”

    태의가 대답했다.

    “현비마마의 용종을 이리 짧은 시간 안에 떨어뜨리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신은 그것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사옵니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던 황제의 입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

     황제는 현비가 회임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또, 꿈을 꾸는 것처럼 아직 이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그랬을지라도 아기를 잃은 후의 분노는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은 황제였으나, 삼 년이나 자식이 없었다.

    ‘드디어 어렵게 용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감히 그 아이에게 약을 썼다? 날 뭐라 생각하는 것인가?’

    “루안, 들었는가?”

    격노한 황제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네, 폐하.”

    루안의 목소리는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어서 가서 조사하지 않고 뭘 하는가?”

    “알겠사옵니다.”

    공수한 루안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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