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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74)화 (174/385)
  • 174화. 죽도록 놀라게 만들어 주지!

    두 사람밖에 남지 않은 전에서 옥비는 지온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눈썹을 들썩인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마마, 자리에 앉으시지요. 신녀가 차를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만. 본궁이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여라.”

    말투가 달라졌다. 천천히 다가온 옥비가 탁자에 손을 올려 지온에게 몸을 기울이며 시선을 맞춰왔다.

    옥비의 눈동자가 공포와 살기로 가늘게 떨렸다.

    “넌, 누구지?”

    지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어찌 그리 물으십니까? 신녀의 차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요? 저는 마마께서 이 차 맛을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옥비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지온이 바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신녀는 어려서 스승님을 따라 세상 여러 곳을 떠돌았습니다. 그때 남쪽으로 내려가 상해에 갔던 적이 있었지요. 이 차 우리는 방법은 그때 배운 것입니다. 신녀는 마마께서 고향의 향취라면 더 좋아하시리라 생각하여 이리하였던 것인데, 신녀가 너무 멋대로 생각했나 봅니다. 용서를 바라옵니다, 마마.”

    변화무쌍한 표정의 갈래 끝에 옥비가 다시 물었다.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말했다.

    “신녀가 너무 어리기도 하였고, 너무 옛날 일이기도 하여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저보다 네댓 살 많았던 언니에게 배웠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신녀가 오랫동안 연습한 끝에 겨우 팔 할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마마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인지요?”

    옥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며 목소리마저 같이 떨려왔다.

    “자, 자네, 무애해각에 왔었나?”

    고개를 모로 틀고 생각을 하던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애해각이라면 마마님의 조부이신 옥형 선생께서 세우신 서원이 아닌지요? 신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마 가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당연히 도관이지요. 스승님과 저는 평소 도관에서 머무르곤 했습니다. 그날은 스승님의 오랜 친우께서 찾아오셨는데, 신녀의 기억으로 마치 신선처럼 보이는 노선생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곁엔 선녀 같은 언니가 함께 계셨습니다. 그 언니가 우리는 차를 제 스승님께서 무척 좋아하시기에 제가 언니에게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여 배웠습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옥비의 신색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 것이었나.’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노야와 아가씨가 출타하실 때마다 날 데려가셨던 건 아니었으니까.’

    말을 마친 지온은 마치 궁금하기라도 한 듯 거짓 호기심을 보였다.

    “마마, 그런데 왜 그리 놀라셨던 것인지요? 혹, 그분들을 아십니까?”

    상념에서 깨어난 옥비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애해각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인지라……. 익숙한 맛을 보니 옛 기억이 떠올랐어요. 내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놀라게 했습니다.”

    다시 전처럼 돌아온 옥비였다.

    “그러셨군요!”

    지온은 이제 알았다는 듯, 새로운 찻잔에 새로 차를 채우더니 그녀 앞으로 밀었다.

    “신녀와 마마 사이에 이런 연결점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인연이 아닌지요? 그럼 신녀, 과거를 추억하며, 마마께 차를 몇 잔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과거를 추억한다?’

    멈칫한 옥비는 더는 차도 생각이 없어졌고, 본래 묻고 싶었던 일조차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아졌다.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폐하께선 자신을 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지난 삼 년간, 폐하께서 다른 이의 침궁에 든 횟수를 모두 합해도 자신과 함께 한 날보다 많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나만 회임이 되지 않는 것일까?’

    황후와 현비, 신비 모두 회임이 되지 않았을 땐, 옥비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폐하께서도 선제와 비슷한, 후사를 보기 어려운 체질이실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현비가 회임을 하다니.’

    황제는 당연히 현비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옥비는 황제의 여인으로서 그를 위해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 첫 번째 아이는 어찌 되었건 남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황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현비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자, 옥비는 무언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화신점에 관한 소문은 이미 예전에 들었다.

    바로 원씨 집안의 며느리가 화신첨을 뽑아 회임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옥비는 당연히 그렇고 그런 바보들처럼, 진짜 화신마마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내심 지온 소저가 특이하다고 여기며, 아마 능운진인에게 현묘한 능력을 배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화신첨을 뽑지 못했을 때, 그녀에게 일부러 차 한잔하자고 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말없이 앉아있던 옥비가 이윽고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만 점심을 들어야 할 것 같아, 본궁은 먼저 돌아가야겠습니다.”

    지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제가 마마님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 봅니다. 더 늦으시면 폐하께서 걱정하시겠지요.”

    ‘지금도 내 걱정을 하시려나? 이제 폐하께서 가장 먼저 물으실 사람은 현비겠지?’

    옥비는 딴생각을 하며 전을 나섰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옥비는 황제와 현비를 떠올렸다가, 조금 전 차 때문에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가슴이 뜨끔뜨끔 아팠다.

    “마마!”

    옥비가 나오는 것을 본 금벽이 얼른 다가왔다.

    “얼굴이 왜 이리 안 좋으신 것입니까? 설마…….”

    옥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온 소저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만 돌아가세.”

    “네, 마마…….”

    사방전을 나서던 옥비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문 앞까지 나와 그녀를 배웅하던 지온은 그녀가 돌아보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옥비는 심장이 옥죄는 듯한 기분에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 급히 눈을 돌렸다.

    마음의 근심이 궁을 나설 때보다 더욱 깊어졌다.

    ‘폐하께서 혹시 나보다 더 아가씨와 비슷한 사람이 있단 걸 아신다면…… 설마?’

    옥비가 멀어지자, 청옥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사저, 옥비마마께서…….”

    “괜찮아요.”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레 놀라서 그래요.”

    “놀라다니요?”

    두 선고가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로 눈을 맞췄다.

    * * *

    사방전의 후전으로 돌아와 차를 천천히 흘려보내는 지온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어쩌면 그 아이에게 말하지 못한 사정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겨우 차 한 잔에 본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그래, 네가 보았던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 테니, 너도 모시던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겠지. 죽은 이로 제 배 불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제 것이 아닌 것으로 배를 채우면 결국 모두 뱉어내야 한다는 걸 몰라서 그랬을까?’

    전에 들어온 청옥과 함옥은 조용히 읊조리는 지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슬의 현은 까닭 없이 오십 현이라

    현 한 줄 기둥 한 주 꽃다운 시절을 그리네.

    장자는 훨훨 춤추며 꿈속 나비 되어 날았고

    망제(望帝)는 말 못 할 원망 두견에 담아 보냈네.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금슬(錦瑟) 중 일부

    그리고 이내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후후. 꿈이 길어지니 자신이 장자인지, 나비인지 잊어버린 것이야?”

    지온은 속으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 계속 일깨워 줄 테니. 죽도록 놀라게 해 주지!’

    * * *

    지온은 사방전을 나섰다.

    나가며 보니 붉은색 관복을 입은 관원 하나가 편전 앞에서 금군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제가 왕림한 날이다 보니 조방궁 여기저기서 군인들이며, 관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를 이리 만나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지온은 요즘 루안을 통 만나지 못했다.

    그가 통정사에 들어간 후로 전보다 더 바빠지기도 했고, 아무래도 서로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난번처럼 몰래 만나다가 다른 이의 눈에 걸리게 되면, 말이 날 구실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온은 새로운 관복을 입은 루안을 오늘 처음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체격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밝은 붉은색 관복은, 그의 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무척이나 멋스러웠다. 루안은 오늘따라 풍류 넘치는,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보였다.

    지온은 슬쩍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선 그의 엄격한 표정과 단정한 눈빛에서 위엄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지온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게 고관의 위엄이란 것이구나!’

    동시에 지온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평소엔 그 어떤 파랑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던 눈빛이, 그날은 꼭 만취한 사람의 눈빛처럼 흔들렸었다. 부서진 별처럼 흔들리던 그의 눈빛과,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던 그 날의 그가 떠올랐다.

    ‘실례했습니다, 화신마마.’

    지온은 자신도 모르게 사방전을 향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합장한 이유가 화신마마께 불경한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현명하고 모범적이며 차가운 고위 관리인 루 대인을 모욕하는 불경을 저질렀기 때문인지는, 오직 지온만이 알고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현명하고 모범적이며 나름 잘나가는 인물인데 모욕이랄 것까진 없잖아, 안 그래?’

    완벽한 자기합리화를 실천한 지온 소저는 그때부터 대놓고 루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루안의 대화가 끝난 듯, 장군이 그에게 포권을 하고는 그에게서 큰 걸음으로 멀어졌다. 이내 루안이 지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온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웃음으로 그를 맞아주었고, 루 대인은 성큼성큼 빠르게 지온을 향해 다가왔다.

    “폐하께서 행차하시어 무척 바쁘셨겠습니다, 대인.”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가 한마디를 던지면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금군이며, 감찰사며, 관아까지 혹시나 서로에게 약점 잡히지 않을까 줄줄이 돌아가며 난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루안은 통정사로 영전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들은 이제 루안의 관할이 아니었음에도 오늘 그가 황제를 수행하러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신임과 중용을 받고 있음을 뜻했다.

    딱 봐도 루 대인은 돌이킬 수 없는 ‘간신의 길’에 들어선 듯했다.

    “전례대로 하면 되니, 괜찮소.”

    지온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발이라도 쉬어가시겠습니까, 대인? 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픈 루 대인이었지만, 오늘은 관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터라, 그는 잠시 점잔을 빼며 생각하는 척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지은 지온이었지만 그녀는 루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루 대인.”

    그렇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전으로 들어갔다. 눈치가 있는 청옥과 함옥은 차와 주전부리를 들여 주곤 나와 문가에 섰다.

    그나마 황제의 행차로 향객이 없어 두 사람이 따로 만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들킬 일이 없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온은 다시 직접 우린 차를 그의 앞에 밀어주었다.

    루안은 조용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지온의 움직임은 언제 보아도 마음이 즐거웠다.

    루안이 듣기로 옥비가 입궁하여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던 두 가지가 바로 서예와 차 우리는 솜씨였다.

    루안은 옥비의 글이 어떠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입궁하여 황제를 뵈러 갔을 때 한 번, 그녀가 황제에게 차를 올리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옥비는 그 움직임과 습관까지 기억 속 그녀와 완전히 똑같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너무 조심스러운 느낌 때문에,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차를 우리던, 자유분방한 ‘진짜 그녀’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었다.

    루안은 황제가 그것을 어찌 계속 보고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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