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3)화 (173/385)
  • 173화. 드리지요, 차 한 잔

    전달을 마친 궁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께 다른 일도 있으니 혹시 제가 다시 오지 않더라도 그쪽으로 가져다주시지요.”

    주방 어멈이 그리하겠다고 하자 지온에게 다시 예를 올린 궁녀가 총총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지온은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한참을 지켜보았다.

    * * *

    주방에서 나온 지온은 능양진인이 낭하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온이 나오는 것을 본 능양진인이 금방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질!”

    그리고 이야기하고 있던 이를 향해 말했다.

    “빈도의 사질이네. 사방전의 관주지.”

    스무 살가량으로 보이는 상대는 온화한 표정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궁녀였다.

    궁녀가 몸을 돌리며 지온을 향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금벽이 지온 소저를 뵙습니다.”

    금벽이란 이름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지온은 곧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금벽 낭자.”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마마께서 사방전의 화신점이 무척 영험하단 소문을 들으시고 견식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소저, 혹 그것이 가능할지……?”

    지온이 자연스레 대답했다.

    “금벽 낭자께서 모시고 계신 마마님이 어떤 분이신가?”

    “옥비마마이시네.”

    능양진인이 부지런히 대꾸했다.

    “사질, 자네가 도성에 없어 모를 수 있겠네만, 옥비마마께선 옥형 선생의 후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끊은 지온이 금벽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마마께선 언제 사방전에 가실 예정이신가? 식사 후이신가? 아니면…….”

    “아직 식사 하실 때가 되지 않아 차라리 지금 바로 움직이셨으면 합니다. 지온 소저께선 괜찮으실지요?”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한 사람이 괜찮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그 말에 금벽이 금방 대답했다.

    “지온 소저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말을 마친 금벽이 옥비를 데려오기 위해 들어가자 낭하엔 능양진인과 지온 둘만 남게 되었다.

    슬쩍 지온의 눈치를 살핀 능양진인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질, 옥비마마께선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분일세.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자네에게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네.”

    지온의 표정 역시 웃는 듯 아닌 듯 은근하게 변했다.

    “어떤 좋은 일 말이지요?”

    갑자기 지온이 왜 이리 나오는지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던 능양진인이, 다소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만약 옥비마마께서 자네를 중히 보시게 된다면 자넬 자주 궁으로 불러 대화하게 될 것이네. 그럼 주변 사람들이 자네를 더욱 높이 보게 되겠지.”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높게 보는 것이 뭐가 좋은 것이지요?”

    능양진인은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굳이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만 해도 그랬다. 궁을 들락거리던 전만 해도 집안을 가리지 않고 어느 부인이든 자신을 깍듯하게 주지라 부르며 체면치레를 해주지 않았던가? 그것이 좋은 점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능양진인은 답을 알려주었다.

    “스승의 복상 기간이 끝나면 사질도 혼담이 오가지 않겠는가. 그때 옥비마마가 자네를 중히 본다 생각해보게…….”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제게 양모님으로 충분하지 않단 말씀이십니까?”

    “…….”

    능양진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대장공주가 예전의 그 대장공주가 아닌데,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안단 말이냐?’

    그러나 바로 얼마 전에 큰일을 치르며 얻은 교훈이 있지 않은가? 지금 지온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진짜 지온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굳이 사실을 알려줄 까닭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지온이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궁녀에게 빼곡하게 둘러싸인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온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췄다.

    “신녀, 옥비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옥비가 미소를 지었다.

    “지온 소저를 귀찮게 했습니다.”

    “아니옵니다, 마마.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방전에 도착한 옥비는 다른 궁인들은 모두 사방전 밖에 머무르라 명한 후 금벽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사방전 안에서 모시고 있는 신상을 바라보며 부들방석에 무릎을 꿇고 경건한 얼굴로 절을 올렸다.

    참배를 끝낸 옥비가 물었다.

    “화신점은…….”

    지온의 지시에 청옥이 첨통을 꺼내 금벽에게 건넸고, 금벽은 제가 먼저 확인을 한 후에야 옥비에게 다시 건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온의 눈빛이 차가웠다.

    옥비는 가볍게 첨통을 흔들었고, 이윽고 첨 하나가 떨어졌다.

    첨을 받아 본 청옥이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 백첨이옵니다.”

    첨통을 받아 든 금벽이 입을 열었다.

    “마마, 다시 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화신마마께서 아직 준비가 덜 되셨을지 모르지 않사옵니까.”

    그런데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손에 들었던 첨통을 가져가 버리는 게 아닌가?

    옅은 미소와 함께 지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화신마마의 원력(願力)은 한계가 있어 첨을 많이 뽑을수록 그 영험함이 떨어집니다.”

    금벽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예외를 한 번 두실 수는 없는 것인지요?”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사방전은 예외를 둘 수 있으나, 화신마마께선 예외를 두려 하실지 모르네.”

    “그래도…….”

    “금벽아.”

    옥비가 그녀를 제지했다.

    “화신마마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만 되었네.”

    “마마…….”

    금벽은 이게 어떻게 화신마마의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저 저 지온 소저의 한 마디에 결정된 게 아니냔 말이다!

    ‘다 쓰러진 집안의 부모 잃은 고아 주제에 대장공주마마를 양모로 모시더니 진짜 본인이 공자왕손(公子王孫)이라도 된 줄 아나? 마마님은 마음도 좋으시지, 그런 사람 체면도 챙겨주시네.’

    화신첨이 뽑히지 않아 흥미가 많이 식어버린 옥비가 물었다.

    “소저의 차 맛이 아주 훌륭하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궁이 한 잔 마셔볼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사방전 뒤에 있는 전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지요, 마마.”

    전으로 들어간 옥비가 코끝을 맴도는 향에 멈칫하여 물었다.

    “지온 소저, 조향을 하십니까?”

    지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방궁의 제자 중에 조향을 하지 못하는 이는 없습니다.”

    ‘하긴, 그도 그렇겠지.’

    옥비가 자리에 앉자 함옥이 다구를 내왔다.

    지온이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옥비는 차를 우리는 지온의 모습을 보며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처음엔 옥비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던 금벽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온 소저라는 이의 동작들은 너무도 익숙했다.

    심지어 찻잔을 헹궈낼 때 물을 많이 넣어 헹구는 것 하나까지 옥비마마와 똑같지 않은가!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일부러 마마를 따라 하는 건가? 무슨 생각으로?’

    금벽은 잔뜩 경계하며 지온을 쳐다보았다.

    지난 수년간 옥비가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을 알게 된 많은 이들이, 일부러 마마를 따라 하며 폐하의 주변을 맴돌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마마께서 들려주신 과거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어. 속에 시커먼 흑심을 품은 여인이 공주의 연줄로 후궁에 들어오잖아. 조비연(*趙飛燕: 중국의 4대 미인 중 하나)도 그렇고…….’

    금벽은 지온을 유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외모를 따지자면 눈앞의 지온 소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삼비(三妃)와 비교해도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할 정도가 아니던가.

    스승의 복상을 하기 위해 조방궁에서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소박한 옷차림에 옅은 분칠만 한 겹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빛나는 외모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뭐가 뛰니, 뭐도 함께 뛴다고, 제 주제를 잊고 무작정 옥비를 따라 하던 궁의 그들과 비교하면 지온은 기색부터가 자연스러운 것이, 심지어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모습마저 느껴졌다. 보고 있으면 제 마마인 옥비보다 소탈한 매력까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금벽의 가슴이 아래로 쿵 하고 떨어졌다.

    ‘지온 소저가 진짜 그런 마음을 품었다면, 폐하께서 과연 넘어가지 않고 버티실 수 있으실까? 아니야! 어쩌면 폐하께선 마마의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을 좋아하시는 걸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유순한 게 여인의 미덕이니까.’

    옥비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탁자 아래에 두 손은 손수건을 얼마나 말아 쥐었는지, 거의 서로 맞닿을 참이었다.

    “마마, 드시지요.”

    지온의 음성이 굳은 그녀를 깨웠다.

    고개를 든 옥비가 미소를 짓고 있는 지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띤 옅은 미소와 시선이 흐르는 눈가의 동작 하나하나, 우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마, 드시지요.”

    대답 없는 옥비에게 지온이 다시 한번 권했다.

    끝내 옥비가 손을 뻗어 그녀가 권하는 찻잔을 쥐었다.

    그러나 최대한 애를 써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금벽은 이상하다 생각했다.

    ‘설마, 마마께서도 눈치를 채셨단 말인가?’

    그러나 폐하와 마마께선 서로 깊이 마음이 통하신 분이신데 지온 소저가 아무리 비슷하게 따라 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전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는데…….’

    찻잔이 옥비의 입술에 닿았다.

    차가 천천히 입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얼굴색이 급변한 옥비가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얼굴 가득 고통을 담은 채, 제 가슴을 쥔 옥비를 본 금벽이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마마! 마마께 무슨 짓을 했느냐! 독을 탄 것이냐!?”

    “마마! 마마!”

    사방전 밖에 있던 궁인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고, 내시들은 지온을 붙잡으려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나 이를 놔둘 청옥과 함옥이 아니었으니, 지온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곧바로 그들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대장공주마마의 양녀이신 사저에게 어딜 감히 손을 대려 하시오!”

    그런 난리가 벌어진 와중에 오직 지온만이 막 우린 차를 음미하듯 마시며 유유자적이었다.

    그제야 숨이 돌아온 옥비가 소릴 냈다.

    “본궁은 괜찮으니 물러가라!”

    궁녀와 내시들이 당황한 얼굴로 옥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정을 찾은 옥비가 귀비의 위엄을 드러냈다.

    “듣지 못한 것이냐? 모두 물러가래도!”

    “네, 마마…….”

    궁인들이 들어올 때 마냥 우르르 물러가자 옥비가 청옥과 함옥, 그리고 금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나가 있거라.”

    금벽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마, 어찌 옆에 아무도 없이 계시려고 하십니까!”

    “본궁이 어린애도 아니고, 차 한잔하는 것일 뿐이다. 밖에 이리 많은 이들이 있는데 또 무슨 일이 있으려고? 정말 지온 소저가 독이라도 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아, 하긴 그렇겠네.’

    금벽은 문득 무척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엔 너무 급해 그리 말이 나왔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지온 소저가 독을 쓰지 않을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마마께 일이 생기면 절대 도망칠 수 없겠지.’

    “나가 있겠습니다, 마마.”

    청옥과 함옥은 지온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엔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지만, 옥비란 사람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두 사람도 사저인 지온의 말이 떨어지기 전엔 지온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청옥과 함옥, 두 사람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있는 향로를 끌 때가 된 것 같던데요?”

    그제야 두 사람이 대답하며 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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