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2)화 (172/385)
  • 172화. 현비

    다행히 스스로 잘못을 먼저 털어놓자 대장공주의 얼굴이 풀어졌다.

    능양진인은 내심 안도하며 생각했다.

    ‘이제 갓 조방궁에 온 것이 감히 날 어찌 대체해!’

    솔직히 대장공주가 그 아이를 발탁한 것도 자신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양녀로 삼은 것은 강왕부의 체면을 상하게 하려 한 것이겠고.

    자신의 주지 자리를 빼앗지 않은 것만 봐도 여지를 남겨준 것이 분명했다.

    “알면 됐네.”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본궁이 크게 화가 났었던 것은 자네가 사태의 경중을 너무 몰랐기 때문이네. 조방궁에서 무속과 관련한 일이 벌어지면 자넨 누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비단 자네만 엮일 뿐 아니라, 본궁 역시 벗어날 수 없네! 나이가 그리 들었는데, 어찌 그 이치를 몰라!”

    “잘못했습니다, 마마.”

    능양진인이 고분고분하게 싹싹 빌었다.

    “마마에게까지 폐를 끼칠 줄 모르고 경거망동한 빈도가 정말 천 번 만 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천 번, 만 번까진 됐네. 어차피 그런 상황까진 안 갔으니.”

    대장공주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본궁은 그동안 자네가 제대로 반성하길 바랐는데, 자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니 폐관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네. 어린 것들은 철부지들이라 경험이 일천하지 않은가. 조방궁은 자네가 관리하는 것이 좋겠어.”

    능양진인은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연신 대장공주에게 허리를 굽혔다.

    “반드시 자중하며 조방궁을 제대로 관리하겠습니다. 마마, 실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신경 써야 할 큰 행사가 하나 있네. 며칠 있으면 폐하께서 후궁과 함께 조방궁에 복을 빌기 위해 행차하실 것이야…….”

    * * *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는 일이라면, 능양진인은 이미 해본 적이 있었다.

    청명절, 그날에도 황제의 행차를 맞아 준비를 했었으니, 그때처럼 준비하면 될 터였다.

    이번에 능양진인은 정말 다른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다.

    궁에선 이미 오랫동안 그녀를 부르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또 대장공주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한다면 그땐 진짜 주지 자리를 내놓아야 할 터였다.

    * * *

    빈틈없는 준비가 이루어져 가는 조방궁에 드디어 천자가 왕림하는 날이 밝았다.

    진시 정각, 단장을 끝낸 옥비가 승원궁(承元宮)으로 향했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신비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옥비가 예를 갖췄다.

    “신첩, 폐하와 황후마마, 신비마마를 뵙습니다.”

    황후가 웃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현비가 곧 도착할 테니, 자네도 조금만 기다리게.”

    “네.”

    미소 지으며 대답한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황후와 신비는 곧이어 국화주를 담그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옥비는 황제에게 시선을 보냈다.

    황제는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멀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옥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전엔 내가 당도하면 폐하께선 나를 가장 먼저 바라봐 주셨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비가 도착했다.

    아직 눈에 보일 만큼 배가 불러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나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이던지, 궁녀들은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신첩, 폐하와 황후마마…….”

    현비가 예를 말하기도 전에 황후가 먼저 나서 그녀를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시게.”

    황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그녀를 부축하려다 말고 그 자리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나마 사리에 밝은 황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폐하, 현비도 왔으니 이만 출발하심이 어떠합니까?”

    “오, 좋소.”

    천자의 출궁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나 있었다. 거가(*車駕: 왕, 황제가 타는 수레) 역시 황후와 삼비(三妃)를 위해 각각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옥비는 자신에게 배정된 거가에 올랐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선 언제나 예의 바른 모습을 유지하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본분에서 벗어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지금 이 상황처럼 말이다.

    “폐하, 신첩의 거가가 너무 협소하여 흔들림이 있을 것 같사온데…….”

    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비가 돌아본 곳엔 현비가 곧 눈물을 흘린 것 같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녀를 등지고 있는지라 그의 표정까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자네는 짐과 함께 타도록 하게.”

    현비가 기쁨의 미소와 함께 몸을 낮춰 감사 인사를 올리려고 하자, 황제가 먼저 그녀를 붙들어 말렸다. 그런 황제를 향해 현비가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와 현비가 옥로(*玉輅: 황제 행렬 시 황제가 타던 수레 중 하나)에 오르자 황제의 행차 행렬이 일제히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 신분이 가장 낮은 옥비는 당연히 가장 뒤쪽에 있었다.

    거가 안에서는 시중을 드는 궁녀인 추아가, 평소 옥비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황제만 보아온 탓인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저 정도가 뭐라고요! 뱃속에 용종을 가진 걸 가지고…….”

    “조용히 하지 못해!”

    이때, 궁녀 금벽이 추아를 호되게 나무라며 말했다.

    “마마님들을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돼.”

    추아가 입을 삐죽이며 작게 말했다.

    “그래도 금벽 언니, 우리 마마님께서 너무 서운하실 거 아냐…….”

    “섭섭할 게 뭐가 있단 말이냐?”

    옥비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폐하께서 누구를 총애하시든 이는 당연하니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옥비의 뒤를 이어 금벽이 더욱 강하게 경고했다.

    “마마께서 관대하게 대해주시니 네가 네 주제까지 잊은 게로구나. 궁 안에서야 모르겠지만, 나와서까지 함부로 입을 놀리면, 마마에게까지 해가 갈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말을 하며 금벽이 앞에 있는 거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황후와 두 비 사이에 벌어지는 각종 암투를 떠올린 추아는, 절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소인이 잠깐 정신이 나갔었어요! 언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금벽이 그제야 얼굴을 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께선 널 좋아하셔. 그러니 이렇게 전례도 깨고 널 뽑아주셨지. 너도 보은하려면, 행동할 때 늘 신중하게 해야 해, 알겠지?”

    “네,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 꼭 그렇게 할게요.”

    대답하며 추아는 또다시 앞에 가고 있는 황제의 옥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단지 이 상황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한 소리였을 뿐이었다.

    ‘완씨, 그 여우 짓거리나 하는 게 어쩌다 현비에 봉해진 거야! 우리 마마님이야말로 현명하지, 기품 있지, 덕 있으시지, 세상에 둘도 없는 여인 중의 여인인데 말이야!’

    * * *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러 가지 않은 지온은 난택산방에 남아 대장공주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가서 무릎 꿇고 엎드려가며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능양사숙더러 가라고 하는 거지. 일이 생겨도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말고, 사숙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요즘 국화가 철인데 내일 조금 따다가 떡이나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

    대장공주의 말에 매고고가 웃음을 지었다.

    “식탐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대장공주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인생은 두 단어일세. 먹고, 마시자! 그러니 식탐은 당연한 것이지.”

    지온이 대답했다.

    “국화로는 떡뿐 아니라 밥도 지을 수 있어요. 자경(*紫莖: 중국의 노각나무)과 황국(黃菊)을 넣고 거기에 감초탕과 소금을 써서 밥을 하면 금빛이 나는 황금밥을 지을 수 있거든요. 향이 맴돌며 퍼지는 것이, 먹기도 아주 좋아요.”

    대장공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것은 됐다. 국화로 밥을 하다니, 그저 생각해도 맛보다 흥이 더 앞선 것이 아니냐? 그런 것들은 너희 문사들이나 좋아하는 고매한 취미인 것이고, 본궁은 흰 쌀밥이 좋다.”

    매고고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마마께선 언제나 실리에 밝으시지요. 그럼 내일은 떡을 만들겠습니다. 지난번에 절여둔 앵두가 아직 남았으니 그것을 곁들이면 되겠습니다.”

    지온이 한숨을 폭하고 내쉬었다.

    “국화가 노랗게 물들면 딱 게가 제철이라 먹기 좋은 때가 아닙니까. 도성이 바다와 너무 먼 게 아쉬워요.”

    대장공주가 말했다.

    “누가 바닷게만 먹어야 한다더냐? 강과 호수에 사는 민물게들도 얼마나 맛있는데! 온이 네가 먹고 싶다면, 내일 사람을 시켜 두 광주리 가져오라 이르마!”

    지온은 단지 무애해각에서의 날들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서원이 바닷가 근처에 있었으니 당연히 바닷게를 더 많이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대장공주가 초대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소소도 게를 좋아하니 내일 같이 오라고 하면 되겠어. 온이, 너와 유씨 가문의 여아가 가까우니 그 아이도 부르고……. 아니다, 부르고 싶은 아이들은 다 부르거라. 온이 너도 친한 아이들이 있을 게 아니냐.”

    연이어 요리 방법에 대해 지온이 입을 열었다.

    “조미료 없이 맑은 물에 찌는 게 가장 좋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것이…… 아휴. 아니면 두부를 같이 끓여도 아주 맛있을 거예요. 어려서 남쪽에 갔었는데, 그때 두부게탕을 먹은 일이 있었거든요.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어머님. 도성에 온 후로 한 번도 먹지 못해 어찌나 아쉬운지…….”

    두 사람은 고이는 침을 삼켜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열정만 보면 당장이라도 게 연회를 열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 궁인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대장공주가 불진을 휙 휘두르더니 흥미가 뚝 떨어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때 한 번 잘도 고르시는구먼!”

    지온도 그만 기운이 쭉 빠졌다. 황제의 행차 대례는 피했으나 이리 얼굴을 마주치는 것만은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 * *

    두 사람이 의관을 정제하고 있자니 황제가 처첩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인사가 오가고 지온을 본 황제가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온 동생이 고모님과 함께 있었구먼. 자네가 고생이 많아.”

    지온이 공손하게 대꾸했다.

    “고생이라니, 당치않사옵니다. 어머님을 모시는 것은 신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은 황제가 대장공주와 대화를 시작하자, 황후는 그들과 함께 남았다. 현비는 쉬러 가고, 신비와 옥비는 함께 물러갔다.

    그들이 나누는 지루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고 싶지 않았던 지온은, 기회를 틈타 주방을 살피고 오겠단 말로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 * *

    주전부리 만드는 것을 살피던 매고고가 지온이 오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손님맞이가 싫으셔서 오셨습니까?”

    조금 부끄러운 얼굴이 된 지온이 대답했다.

    “제가 거기서 딱히 할 수 있는 말도 없는데 앉아만 있는 것도 어색해서요.”

    매고고도 지온이 빠져나온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아가씨, 저를 도와 차탕(*茶湯: 기장이나 수수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설탕을 탄 간식)을 끓여주시지요!”

    지온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그렇다고 지온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다일 터였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온은 달콤한 앵두절임을 먹어가며 차탕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앵두절임을 맛있게 먹고 있으려니, 밖에서 궁녀 하나가 들어와 주방을 살피다 지온을 발견하고는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지온 소저.”

    지온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궁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현비마마를 곁에서 모시고 있는 궁녀입니다. 마마께서 통 식욕이 없으시다 갑자기 산사음(*山楂飮: 산사 열매를 넣어 만든 음료)이 드시고 싶으시다, 저를 보내셨습니다. 혹, 주방에 있을까요?”

    용종을 회임한 현비가 마시고 싶다는데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방 어멈이 금방 대답했다.

    “산사 열매가 있긴 하네만, 지금 끓여야 하네. 마마께서 기다리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는가?”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다리면 되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