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1)화 (171/385)

171화. 잘못했습니다!

장씨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씨 가문에서 은혜를 갚기 위해 지온을 찾아왔다.

공몽 역시 이번 향시에 급제했던 것이다.

기초가 탄탄했던 그는 예상 문제집을 얻은 후 처음부터 끝까지 촘촘하게 풀었다. 그리고 과거장에 도착해 문제를 확인하다가 그는 하마터면 기쁨의 함성을 지를 뻔했다.

공몽은 이미 완성되어있던 문장을 조금 수정하거나 다채롭게 바꾸기만 하여 그대로 써서 제출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운까지 따라준 덕분에 합격까지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화신첨의 주인공이 효험을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조방궁은 또 한 번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유모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합격했다.

본래 그는 학문 수준이 지장이나 다른 누구보다 높기도 했고, 시험 전에 동생이 합격하도록 총력을 다하는 형님도 있었기에, 유모지는 떨어질 걱정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유모지는 등수도 꽤 높았다.

만약 내년에 있을 회시마저 합격한다면 유씨 가문의 이름은 또 한 번 그 명성을 떨치게 될 터였다.

* * *

합격방이 붙은 후, 유 대부인이 조방궁을 찾아왔다. 대장공주에게 안부 인사를 여쭌 유 대부인은 지온과 따로 대화를 나누길 원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 두 사람의 코끝으로 계화꽃의 향기가 맴돌았다.

“자네가 혼사를 무르겠다고 했을 때 이유를 무엇으로 들었는지 기억하는가? 자네는 스승님을 위해 복상을 해야 하니, 우리 둘째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혼약을 물렀네. 이제 곧 일 년이 다 지나가는데, 우리 둘째 역시 누구와도 혼약을 맺지 않았으니, 아무도 피해 보는 이가 없을 것 같구먼.”

빙긋 웃은 유 대부인이 자리에서 멈춰서 지온에게 물었다.

“지난번 혼사를 물린 것은 내 아들을 위해서였네. 이번에도 나는 낯두껍지만, 내 아들을 위해 자네를 만나기로 했네. 지온 소저, 정말 혼인의 연이 다시 이어질 순 없겠는가?”

지온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 대부인…….”

“기다리시게.”

유 대부인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먼저 내 말부터 들어 주시게나.”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유 대부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둘째는 아이 같아서 자네와 맞지 않아. 그러나 열아홉에 탐화가 된 큰아이는 다르지. 우리 첫째는 똑똑하지만,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아이라네. 그리고 지온 소저, 자네와 대화도 잘 통하는 것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집안에 대해서야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나야, 대하기 어렵지 않은 시어미가 될 것이고, 집안에 있는 동서들도 다들 제 본분을 벗어나지 않는 이들이네. 또 자네와 민이는 친우이니 자네가 시집만 와준다면 분명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네.”

말없이 침묵하던 지온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부인 말씀이 모두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안 되겠나? 한 번 고려해볼 수도 없는 것인가?”

유 대부인이 절박하게 물었으나 지온의 대답은 올곧았다.

“부인의 따뜻하고 자애로운 마음에 소녀, 크게 감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녀, 이미 달리 사모하는 이가 있습니다.”

“…….”

그녀를 바라보는 유 대부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어찌 그리 이기적이지 못한 게야?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것인데.”

지온이 웃었다.

“제가 그리 이득을 좇는 이였다면, 대공자님께서 저를 눈에 담으셨겠는지요?”

‘하긴 그도 그랬겠지.’

유 대부인은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냉정함을 찾은 유 대부인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온에게 말했다.

“자네가 사모한다는 이는, 북양왕의 동생을 말함이겠지? 그에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자네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야.”

지온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부인.”

* * *

중양(重陽).

입궁하여 태후를 보러 갔던 대장공주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이 소식을 지온에게 전했다.

“현비마마께서 회임하셨단 말씀이세요?”

지온이 의아해하며 묻자 그런 지온을 대장공주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인 게야? 현비가 회임을 한 것이 이상한 일이냐?”

물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이제 스물이 막 넘어 젊고 힘이 넘치는 황제가 아니던가? 오히려 여태껏 아이가 없었던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삼 년간 없던 아이가 갑자기 들어섰단 게 이상하네.’

머릿속에 수많은 권모술수를 떠올리던 지온은 끝내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마도 유민의 소설을 많이 본 탓이리라.

궁에서 떠도는 말에 의하면, 황제가 워낙 옥비를 총애하여 다른 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황제와 옥비의 금실이 좋지 않아 회임이 어려웠다면, 그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궁에 근래 없던 희소식이라 현비가 조방궁에 들러 복을 빌고 싶다는구나.”

지온이 멈칫했다.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 현비께선 태중의 아기씨를 위해 몸을 중히 보하셔야 하실 텐데요.”

얼마나 어렵게 얻은 용종(龍種)인데,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그 말에 대장공주가 대답했다.

“본궁 역시 그리 말을 하긴 했다만, 현비가 꿈에서 화신마마를 뵌 후에 찾아온 희소식이라고, 반드시 찾아오겠다는구나.”

잠시 말이 없던 지온이 물었다.

“회임하신 지 몇 달이나 되셨습니까? 안정은 되신 것인지요?”

대장공주가 웃음을 지었다.

“꼭 경험이 있거나, 본 사람 같이 물어보는구먼?”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였다.

“석 달이 지났고 전엔 함부로 말을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낸 게야.”

지온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워낙 아는 것이 많아 탈이지 않습니까, 제가.”

지온의 농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 대장공주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이미 허락하셨으니, 아마 며칠 있으면 곧 성지가 내려 올 게다.”

지온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그리 결정을 내리셨다면 저희가 또 무슨 할 말이 있겠는지요.”

지온의 마음이야, 웬만하면 현비가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 괜히 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조방궁까지 연루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미 황제가 허락까지 한 마당이니, 두 사람에겐 반대할 여지조차 없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조방궁의 궁 일은 누가 보고 있는 것이야? 온이 네 사매가 보고 있던가? 황제를 영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아이가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느냐?”

지온이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능양사숙께서 맡아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님.”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 교활한 것이 조방궁을 십수 년간 운영하며 쌓은 경험이 풍부하긴 하지. 당장 다른 이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야.”

지온이 고개를 주억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저를 무속과 엮으려다 실패로 돌아갔으니, 사숙도 불안하게 지내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 기회를 드려 안심할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대장공주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고것처럼 외부와 내통한 놈은 때려죽이고 손 터는 것이 내 성격인 것을……. 그러나 매가 분명 뒤에서 시킨 자가 있을 거라고,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를 해선 안 된다고 말려 내 참은 게야.”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고고의 말이 옳지요. 사숙은 다른 이들이 심어둔 자니, 사숙을 곁에 두시면 어머님께선 돌아가는 상황을 제 손금 보듯 훤하게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사숙을 쳐낸다 해도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메울 테고, 그리되면 오히려 방어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고요.”

향환을 이용해 대장공주에게 독을 쓴 것만 봐도 상대는 이미 살심을 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지온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저는 어쩐지 화옥의 죽음이 미심쩍습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능양이 그 아이가 사고를 치고 싫으니 죽여서 버린 게 아니겠느냐?”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졌다고 죽여서 버릴 정도로 살심이 깊으면, 다른 이들에게 쉽게 약점이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해온 능양사숙께서 그렇게나 큰 위험부담을 지려고 하셨을까요?”

“그리 생각하니 또 그런 것도 같구나.”

“그래도 화옥은 사숙이 곁에서 십여 년을 데리고 있던 제자였어요. 당시 화옥은 제게 결국 꼬리를 잡혀 조방궁에서 쫓겨나게 됐지요. 하지만 사숙이 그러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어도, 화옥을 조방궁 밖에서 일이 년만 기다리게 했다가, 제가 조방궁을 떠나면 다시 조방궁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을 거예요.”

지온이 손에 든 향환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숙은 그리하지 않고 독을 써서 화옥을 죽였지요.”

대장공주 역시 나름의 생각이 있는 듯했다.

“그 아이가 조방궁을 떠나면 통제하기 어려워 살인멸구한 게야? 설마 화옥이 무언가 중요한 비밀이라도 알고 있었던 게야?”

“그러니 저희가 능양사숙을 보호해야지요.”

지온이 방긋 웃었다.

“어쩌면 사숙께서 저희에게 깜짝 선물을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 *

난택산방으로 향하는 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능양진인은 궁인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대장공주께서 빈도를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 고고께선 아십니까?”

교육을 잘 받은 궁인은 빠르게 걸어가며, 미소로 대답했다.

“소인은 알지 못하나, 도착하면 진인께서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궁녀는 그녀를 난택산방 안, 대장공주가 수행하는 공당(*供堂: 공양드리는 방)에 데려다주고 물러났다.

* * *

눈을 감은 채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대장공주를 본 능양진인이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빈도가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대장공주는 외고 있던 경을 마저 외운 후에야 눈을 뜨며 목탁을 내려놓았다.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마마.”

능양진인은 손을 조금 떨며 다소 불안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이었으면 그녀에게 이리와 앉으라 했을 대장공주였겠지만, 이번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능양진인의 불안이 커지자 몸의 떨림이 더욱 거세졌다.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대장공주의 입이 열렸다.

“자네의 죄를 알겠는가?”

능양진인은 당장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마마, 빈도가 잘못했습니다! 빈도는 개인의 은원을 조방궁의 명성과 영광 앞에 놓아서는 안 됐고, 어린 후배와 평판을 겨루어서도, 후배를 질투해서도 안 됐습니다. 모든 행동이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한 못난 행동들뿐인지라, 오랜 시간 해온 수행이 참으로 아까울 뿐입니다. 그동안 빈도가 폐관하고 반성하며 저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론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마, 빈도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너무도 어렵게 사저를 이기고 조방궁의 주지가 된 자신이었다. 그리고 다시 힘겹게 귀인들의 환심을 사 드디어 높은 이들과 왕래를 하게 된 참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질투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생긴 것이다.

지난번엔 자신이 잘못했다.

강왕비가 어떤 사람인데! 전혀 기댈만한 사람도 아니었던 사람을! 그 계집을 쓰러뜨리려면, 반드시 단번에,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죽여야만 했던 것을!

지난 몇 년이 너무 뜻대로 풀리다 보니 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은인자중(隱忍自重)을 잊고 경거망동하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