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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69)화 (169/385)
  • 169화. 향시예상 문제집

    지온은 우선 희화원부터 들러 새어머니인 정씨에게 인사했다.

    정씨 부인은 여전히 여리여리한 체구에 연약해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는데, 다만 지온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소 복잡해 보였다.

    사실 그녀가 당시 대장공주의 덕을 볼 수 있을 거라며 지온을 조방궁으로 보냈던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씨 가문의 알력 다툼에서 지온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정씨는 조방궁 내부의 알력 다툼이 지씨 가문 못지않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보낸 지온이 조방궁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도 모자라 대장공주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이야.

    둘은 서로 말도 며칠 나누지 않았던 계모와 딸 사이가 아니던가. 어차피 서로 정이랄 것도 없는 사이인지라, 예의만 차리고 지온은 떠날 생각이었다.

    그만 일어서려던 지온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씨에게 물었다.

    “어머니, 혹시 재가를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찻잔을 들고 있던 정씨의 손이 크게 떨렸다. 고개를 든 그녀가 지온을 쳐다보았다.

    지온은 평온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탐색하거나 질책하는 것도 아닌, 그저 평온한 눈빛이었다.

    정씨가 물었다.

    “어찌 그런 것을 묻는 것인가?”

    지온이 대답했다.

    “그저 어머니께서 여생을 이곳에 붙잡혀 계셔야 하실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렇습니다. 혹, 재가에 뜻이 있으시거든 제가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혼수로 챙겨드리겠습니다.”

    정씨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난 자네가 이름뿐인 이 어미를 원치 않을 거라 생각했네.”

    지온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 조방궁에 살고 있고, 연말이 되어 돌아오더라도 곧 혼인하여 이 가문을 나가게 되겠지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이 집안에 계시든 아니 계시든, 제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내게 장원 하나만 남겨주게.”

    정씨가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크다 한들, 내가 원하는 것은 몸 하나 누일 곳이네. 그런 곳이 있다면 재가를 하든, 안 하든 모두 똑같은 게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어요.”

    * * *

    둘째 숙모인 장씨는 잔뜩 준비하고 지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온이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얼른 안으로 모시듯 들인 장씨는, 각양각색의 과일이 가득한 과반(果盤)을 지온 앞에 줄줄이 늘어놓았다.

    지온은 눈 앞에 펼쳐진 온갖 먹을 것들을 살펴보았다. 심지어 번호까지 매겨진 찬합들과 과반들을 보며 지온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융숭한 것이 아닙니까, 숙모님? 여기 주전부리들은 절계루(折桂樓)에서 사 오신 것이지요?”

    장씨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온이 네 덕분에 그래도 우리가 주전부리 몇 접시 정도는 먹을 만해.”

    지온이 소나 양젖을 끓이고 굳히면서 만든 유지를 소라 모양으로 만들어 먹는 소유포라(酥油鮑螺)를 맛보았다.

    “맛이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도성에 이 집보다 더 제대로 만드는 집이 있어요. 다음번엔 숙모님도 그 집에서 한 번 사보세요.”

    “그래?”

    장씨가 물었다.

    “어느 집이니?”

    지온은 루안의 그 간식 점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며 앉아있으려니, 지씨 가문의 넷째 아가씨인 지선이 뛰어 들어왔다.

    “둘째 오라버니가 왔어요!”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오던 지장이 지온을 보곤 미소를 보였다.

    “지온이 왔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지온이 예를 갖췄다.

    “며칠 있으면 곧 시험이지요? 잘 쉬셔야 합니다, 둘째 오라버니. 다 아시는 건데 시험 날 기운이 없어 답을 못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온이 네 말이 옳다. 서원도 쉬겠다, 남은 며칠은 푹 쉬면서 몸과 정신을 완벽하게 갈고 닦아 놓는 것이 좋겠어.”

    지온은 공몽은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고는 책자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다른 이에게 얻어온 향시예상 문제집이에요. 한 번 보세요, 오라버니. 도움이 되실 수도 있어요.”

    고맙다며 책자를 받은 지장이 물었다.

    “공몽이랑 대희에게 보여줘도 돼?”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께서 동창들과 함께 나누고 싶으시다면, 저도 당연히 반대하지 않지요.”

    그 책자는 유신지가 제 동생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대공자는 시험에 강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정보에 빠른 유씨 가문이었으니, 설사 예상이 틀리더라도 과거에 어떤 문제가 출제될 것인지, 대략적인 방향은 알 수 있을 터였다.

    웃느라 실눈이 된 장씨는 연신 고맙다며 그녀를 직접 집 밖까지 배웅했다.

    돌아온 장씨가 지장에게 말했다.

    “온이가 아는 이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 책자도 어느 대유학자의 손에서 얻어 온 것인지 모르니, 열심히 봐야 할 것이야!”

    지장 역시 터럭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공몽이 여 선생과 함께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지온 덕분이 아니던가!

    여 선생을 따라 수학한 지 한 달이 좀 지나자,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제 서원의 선생들 모두 두 사람이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정도였다.

    * * *

    다음 날, 지장은 공몽과 대희를 불렀다.

    그리고 고민을 하긴 했지만, 지염도 데려오라 일렀다.

    이때 눈 밑이 까맣게 어두운 지염은 책론(策論)을 쓰고 있었다.

    “날 왜 부른다더냐?”

    시종이 대답했다.

    “둘째 공자님께서 예상 문제집을 얻으셨다고, 대공자님과 같이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붓을 멈춘 지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디서 난 것이라더냐? 여 선생이 준 것이라더냐?”

    “그것이, 둘째 공자께서도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지염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마음은 고마우나 내 여기 아직 완성하지 못한 글이 있으니 가지 않겠다.”

    “대공자님…….”

    지염은 이미 그를 무시하고 있었고, 지염의 서동(書童)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며칠 있으면 곧 시험인데, 우리 공자님께선 서책 볼 시간도 부족하시오. 부인께서 누구도 귀찮게 하지 말라 명하셨소.”

    ‘지금 그러니까 대공자의 공부를 방해하려고 일부러 찾아왔냐는 뜻인가?’

    시종이 씩씩거리며 차갑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소인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시종이 떠나고 서동이 불평을 털어놨다.

    “둘째 공자님은 정말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분이십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예상 문제집을 공자님께 들이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생각? 당연히 내가 시험에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겠지.”

    지염이 차게 웃었다.

    “그놈의 학업은 언제나 나보다 못했다. 그런데 여 선생을 따라 한 달 좀 넘게 수학했다고 날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허허, 기다려 보아라. 시험 성적이 나온 후에, 나는 붙고 녀석이 떨어지면 그때 누가 더 뛰어난지 알게 되겠지.”

    * * *

    시종의 보고를 받은 지장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였다.

    “형님은 안 오시겠다고?”

    시종의 얼굴엔 여전히 분기가 가득했다.

    “그냥 안 오시겠단 것도 아니고 절 쫓아냈습니다. 꼭 소인이 일부러 대공자님의 공부를 방해라도 하러 간 사람처럼 말입니다.”

    옆에 있던 대희가 끼어들었다.

    “오기 싫으면, 안 오는 거지! 지익, 너도 네 형님 성격이 어떤지, 아직도 몰라? 소인배도 그런 소인배가 없는데, 뭘 그렇게 챙겨?”

    “아무리 그래도 내 형님이다.”

    지장이 말했다.

    “어른들의 앙금도 다 풀렸는데, 같이 시험에 붙으면 더 좋잖냐.”

    “그런데 굳이 말을 안 듣고 벌주를 마시겠다는데, 어쩌겠냐?”

    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보자.”

    세 사람은 종일 토론을 하며 예상 문제집을 보았고, 공몽과 대희는 문제를 베낀 후에 가지고 돌아가 계속 보기로 했다.

    * * *

    그날 밤, 지장은 고민 끝에 다시 지염을 위해 노력해보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 문제를 베낀 지장은 본책자를 지염에게 보냈다.

    책자를 받고 내용을 살펴보던 지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그가 다른 얇은 책자를 한 권 꺼냈다.

    그것은 집안에서 큰돈을 들여 서원의 선생으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너무 아까워서 숨겨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편향되게 문제가 출제될 거라 생각한 거지? 선생께서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다르잖아. 안 보겠다는 사람에게 굳이 들이미는 게 좋은 마음일 리가 없지. 분명 내가 잘되는 게 싫은 거야.”

    차가운 미소를 지은 지염은 받은 책자를 버려버리곤, 책론을 마저 써 내려갔다.

    * * *

    향시 날.

    과거 시험장은 떼로 몰린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은 고람(*考籃: 수험생이 시험장에 식사와 기타 필요한 물건을 담아 들어가던 대바구니) 검사에 바빴고, 가족들은 시험을 보는 수험생에게 무언가를 연신 이르고 있었다.

    장씨가 제 아들에게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라. 열심히 보면 되는 게야. 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니, 떨어지더라도 삼 년 뒤에 다시 보면 돼.”

    지장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어머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붙으라고 난리인데 그리 기운 빠지는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장씨는 기세 좋게 대꾸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네 나이 또래는 다들 그저 맛만 보는 게야.”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는 이는 어디에 놔두어도 특출한 면모를 드러내는 이들이었다. 장씨는 제 아들이 천재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꿈은 애초에 꾸지 않았다.

    지익 역시 말했다.

    “문제를 잘 보고, 성실히 답을 쓰면서, 시험의 분위기를 익히거라. 며칠씩 시험을 보다 보면, 먹는 것도 더부룩하고 잠도 잘 안 올 것이야. 견디기 어렵더라도 너를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지장은 다시 한번 제 고람 속 물건들을 점검했다.

    한편, 위씨 역시 지염을 향해 무언가를 단단히 이르고 있었는데, 내용이 삼남가와는 좀 달랐다.

    “시험을 제대로 봐야 할 것이야. 지난 반년 간, 집안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너도 알고 있지? 밖에서 우리 집을 다들 무시하지 않니! 네가 시험에 붙고 나면 우리 집안의 체면이 설 것이야.”

    지염은 울컥, 짜증이 났다.

    “알겠어요! 어머니, 조용히 좀 하세요. 지금 외우고 있던 것도 어머니 때문에 다 까먹겠습니다.”

    “그래그래.”

    위씨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하마, 조용히 해야지.”

    그때 서아가 나타났다.

    웃으며 두 집안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서아가 집안마다 하나씩 향낭을 건넸다.

    “아가씨께서 두 분 공자님을 생각하시어, 제게 여의향낭(如意香囊)을 보내셨습니다. 가지고 들어가시면 분명 정신을 더욱 맑게 깨워 좋은 성적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장씨는 기쁜 마음으로 향낭을 받았다.

    “아이고! 여기까지 특별히 보내오다니, 고생이 많았네.”

    지장 역시 감사를 표했다.

    “나 대신 지온에게 고맙다 전해줘.”

    그리곤 제 어미에게 향낭을 받아 몸에 걸었다.

    위씨 역시 미소를 보이며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하고는 향낭을 지염에게 밀어주었다.

    시간이 되어 지장과 지염 모두 고람을 들고 과거 시험장 안으로 향했다.

    쉽게 검사를 통과한 지장은 제 번호를 찾아 들어갔다.

    지염은 고람을 검사받는 동안 잠시 고민을 하다 향낭을 검사하는 곳에 버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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