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68)화 (168/385)
  • 168화. 향시

    대장공주의 기세에 얼굴 두꺼운 지온조차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반대는 안 하시는 것입니까?”

    “본궁이 반대할 것이 무엇이냐?”

    대장공주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좋다는데 다른 사람이 반대하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지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가문에서도 쫓겨난 사람이고, 평판도 그리 좋지는 않은 사람이라…….”

    대장공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운 하나 없는 목소리를 보니 될 것도 안 되겠구나.”

    그러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 녀석은 여강의 사제다. 만약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면 여강이 그 아이를 그리 싸고돌 리가 없다. 그리고 평판이란 것은 자주 사람을 속이기 마련이지. 너만 좋다면 내, 먼저 네 계모에게 사람을 보내 준비를 시키마.”

    그러다 대장공주는 가만히 생각하니 고민스러운지 말을 이었다.

    “루 통정이 가문에서 쫓겨난 건 문제가 되는구먼. 그 집안 어른으로 누굴 모시면 좋겠느냐? 북양의 친척들은 생각할 것도 없으니, 명성이 크고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을 찾는 수밖에 없겠다. 유 노태사? 아니지, 그 늙은이는 퇴임한 지 너무 오래돼서 대부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겠지. 평왕? 옳거니, 평왕이 좋겠구먼! 평왕숙(平王叔)은 북양왕가와도 연이 있으니 해주실 것이야. 물론 평왕부의 그 망나니들이 밉상이긴 한데…….”

    * * *

    서교에서 돌아온 지온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조방궁에만 머무르며 지냈다. 

    매일 서책을 읽고, 활을 쏘고, 대장공주와 함께 했다.

    능양진인은 강왕비와 조씨 부인을 부추겼다가 매고고에게 크게 당한 이후로 길이 든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폐관이란 이름으로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씨 가문의 큰소저가 된 이후, 지온의 날들이 이렇게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 * *

    연무장.

    청옥이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저!”

    지온은 활을 당기며 조준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숨을 돌린 청옥이 말했다.

    “화신점이요. 누가 화신첨을 뽑았어요!”

    매월 한 번 뽑는 화신첨은, 첫 달에는 원씨 가문의 며느리인 기문혜가 뽑았고, 둘째 달엔 상인이었던 유삼이, 그리고 셋째 달에는 천수서원의 서생인 공몽이 뽑아 모두 효험을 보았다.

    요즘 조방궁에 구름처럼 몰린 향객들 대다수가, 바로 화신첨을 뽑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월에는 아무도 뽑은 사람이 없어, 그저 지나갔다.

    칠월 역시 며칠이면 지나갈 것 같았던지라, 또 그저 한 달을 보내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첨을 뽑은 사람이 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시위를 당긴 손을 놓자, 바람 소리와 함께 화살이 홍심에 가서 박혔다.

    “뽑혔으면 이제 가서 점괘를 봐주세요.”

    지온의 말에 청옥이 당황했다.

    “제가요?”

    “당연히 사매죠.”

    의운에게 손을 내밀어 화살을 받은 지온이 다시 시위를 당겼다.

    “저는 언젠가 조방궁을 떠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사방전은 청옥사매와 함옥사매 것이 될 텐데, 청옥사매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하지만, 저는…….”

    청옥이 말을 더듬었다.

    “저는 못 하는걸요…….”

    “제가 어떻게 듣고 풀어가는지 모두 봤는데, 왜 못해요?”

    청옥은 그게 본다고 다 할 수 있는 일이냐며 속으로 반문했다.

    첫 번째 첨은 반드시 의술을 알아야 했고, 두 번째는 상행에 대해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수많은 잡다한 정보 속에서 유용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만 했는데…….

    사방전을 관리하며 지낸 몇 달간, 청옥 역시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일엔 능숙해졌다. 그러나 역시 지온만큼 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화살을 모두 쏜 지온이 의운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아 땀을 닦으며 말했다.

    “향객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그들의 신색과 언행에서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니 어렵지 않아요. 그 후에 그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소원을 이루는데 중요한 사람이나 물건을 찾아 그들을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니 훨씬 쉽죠?”

    지온이 말에 조금 안정을 찾은 청옥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사저 같은 능력이 없어서 중요한 사람이나 물건을 찾더라도 아마…….”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세 번째 첨을 뽑았던 공몽은 학업에서 성과를 보길 원했어요. 그럼 제가 그를 가르쳐야 했을까요? 따지고 보면 전 그냥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린 거예요. 청옥사매, 이제 사매는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선고가 아니에요. 사매 뒤엔 내가 있고 대장공주님도 있잖아요. 그러니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결되어 있겠어요? 사매가 원하면 힘을 빌려줄 수 있는 곳은 아주 많아요.”

    그 말을 들은 청옥은 지온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사저는 그러니까……. 인맥을 말하는 건가요?”

    지온이 웃음을 머금었다.

    “가보세요. 가서 사매의 능력을 시험해 봐요. 해보지도 않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힘을 얻은 청옥의 자신감이 크게 올라갔다.

    “그럼 다녀올게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사저가 많이 살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은, 의연하고 다부지게 걸어가는 청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으로 배웅했다.

    서아가 차를 건네며 물었다.

    “아가씨, 청옥 선고가 하실 수 있을까요?”

    차를 몇 모금 마신 지온이 대답했다.

    “한 번엔 안 되겠지만, 몇 번 해보면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번 화신점은 효험이 없다고 소문이 나면 명성이 떨어질 텐데요…….”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화신점은 이미 이름이 나서 한 번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사람들 스스로가 저 자신이 이해할 만한 말들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 뒤에 또다시 효험을 보는 사람이 나오면 그게 당연한 게 되는 거지.”

    “그렇구나…….”

    * * *

    그 후로, 청옥은 보란 듯이 화신첨을 뽑은 이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데 성공했다.

    화신첨을 뽑은 사람은 한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점포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들이 앞으로 잘 되길 바랐다.

    청옥은 유삼을 통해 그에게 거래 하나를 제안했고, 이에 크게 만족한 점포 주인은 부인의 아들을 총관으로 승진시켰다.

    이 일을 통해 청옥은 자신감이 크게 올라가게 되었고, 마침 능양진인의 폐관이 맞물려 조방궁의 궁무까지 조금씩 청옥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이제 조방궁은 엄연히 지온의 조방궁이라 할 수 있었다.

    * * *

    팔월에 접어들자, 그리 덥던 날씨도 한 풀 꺾었다.

    주루에서 만난 지온과 유민은 그 사이 말을 놓을 정도로 많이 친해졌다.

    “자, 네 몫이야.”

    지온이 그녀에게 돈통을 밀었다.

    “이제 막 소설이 시장에 풀려서 아직 이익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연지 살 정도는 될 거야.”

    삼십 냥을 손에 쥔 유민은 신이 났다.

    “이렇게 많아? 내가 한 달 용돈이 겨우 두 냥인데, 이 정도면 일 년도 버티겠어!”

    지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이 정도로? 아직 네 소설을 출간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어. 다음 달이면, 넌 소녀 갑부가 되어있을 거라고.”

    유민이 계산을 해보았다.

    ‘한 달은 삼일이니까, 적어도 대여섯 배쯤 될 테니…….’

    “소설이 이렇게 돈이 되는 거였다니!”

    유민의 감탄에 지온이 천천히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 평범한 소설은 이렇게 벌지 못해. 서책상들이 대부분 다 사들이고 작가들이 가져가는 돈은 열 냥에서 스무 냥쯤 되지. 네가 가져가는 돈이 많은 건, 하나는 네가 가져가는 비율이 높아서고, 둘은 네가 글을 잘 썼기 때문이야. 시장에 풀리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렸거든.”

    유민은 그 말에 한껏 들떴다.

    “내 소설이 진짜 그리 재밌어?”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대다수가 몰락한 문인들이라, 왕후세가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에 모르거든. 그런데 넌 다르잖아. 제대로 된 명문가의 천금 같은 규방 규수니, 평소 생활이나 명문세가의 비사들을 실감나게 쓸 수 있는 거지. 평범한 백성 중에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이들이 누가 있겠어? 그러니 당연히 빠져들 수밖에 없지.”

    유모지의 소설로 유삼은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이번에 유민이 또 새로운 분야의 소설을 내자, 그는 한탕 크게 벌겠다며 칼을 갈고 있었다.

    듣자하니 시장에서 돌풍 한 번 일으켜보겠다고, 유 남매의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을 쓸 작가를 많이 찾아놨단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은 이들 남매처럼 집안 사정이 좋지는 못할 터였다. 대부분은 원고를 죄다 팔 터이니, 유삼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 역시 적지 않을 터였다.

    유모지 생각이 나자, 지온이 물었다.

    “네 둘째 오라버니는? 곧 시험이지?”

    “응, 초아흐렛날 시험이야.”

    기분이 좋아진 유민은 과일을 먹으며 지온에게 제 둘째 오라버니의 못난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어제 둘째 오라버니가 몰래 놀러 나갔다가 백부님한테 걸려서 줄기차게 맞았어. 지금은 집에 갇혀 있는데, 시험 보기 전까진 외출금지야.”

    “이번에 잘못되면 삼 년을 기다려야 하잖아. 그러시는 것도 이해가 가지.”

    지온이 물었다.

    “모지 공자는 자신 있어 해?”

    “향시는 문제없을 것 같은데, 회시는 모르겠나 봐.”

    유민이 대답했다.

    회시는 전국에 있는 영재들이 모두 모여 치르는 시험이니 아무리 학문 실력이 뛰어나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지 공자께 그때 가서 여 대인의 문집을 많이 보라고 전해줘.”

    “왜?”

    “폐하께서 여 대인을 시험관으로 세우실 것 같거든.”

    유민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언니는? 춘시(*春試: 회시를 말함)에 관한 건 아직 안정해졌잖아. 설마 화신 마마가 그런 것도 알려주는 거야?”

    지온이 마치 신비로운 무언가라도 있는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맞아. 조방궁 점이 이렇게 영험하다니까?”

    “이 점쟁이 같으니!”

    꽥, 소리를 지른 유민이 지온에게 요즘 새로 들은 제 사주를 들려주었다.

    “있잖아, 언니. 내가 최근에…….”

    지온은 미소를 지으며 유민의 말을 들었다.

    사실 황제가 여강을 시험관으로 세우리란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황제와 강왕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황제는 분명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싶어 할 테고, 과거는 인재를 뽑는 가장 좋은 등용문이었다.

    여강은 무애해각 출신이니, 그는 황제의 동문이라 볼 수 있었다.

    황제가 그리 동문인 루안을 신뢰하는데 여강 역시 신뢰하지 않겠는가?

    그럼 황제가 여강을 춘시의 시험관으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 * *

    향시를 생각하니, 제 집안에도 향시를 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떠오른 지온은 지씨 가문에 들렸다.

    돌아와 보니 지씨 가문의 큰소저, 지온의 대우는 반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둘째 숙모인 장씨는 직접 나와 지온을 맞았고, 첫째 숙모인 위씨는 비록 직접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포 유모를 보내 비위를 맞출 정도였다.

    지난번 조방궁에 들러 집안 가산들을 넘긴 것으로, 이미 차남가는 자신들이 졌단 것을 인정하고 물러났었다.

    사실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삼남가는 사사건건 부딪쳐오고, 유씨 가문은 이제 차남가를 대할 때 찬바람만 쌩쌩 날리지, 거기다 대장공주까지 지온의 뒷배가 되었으니, 차남가는 가는 곳마다 비웃음을 사기 일쑤였다.

    그나마 가산을 돌려주고 받은 평안부를 위씨가 달고 다닌 이후로,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그녀가 유씨 가문에 인사를 갔을 땐, 심지어 유 대부인이 인자한 태도로 지서에게 어울리는 좋은 이가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제야 위씨는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고생하며 위씨는 이젠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유씨 가문의 방계라도 인품 좋고 앞날만 밝은 젊은이라면 딸의 배우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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