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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67)화 (167/385)
  • 167화. 충직한 시종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힘겹게 품에서 빠져나온 지온은 일어나 창을 열었다.

    얼굴은 뜨겁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제 얼굴이 꽤 두껍다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직접 겪으니 알겠어. 전혀 진정이 안 돼.’

    곧이어 평정을 찾은 루안 역시 일어나 창에 기대며 지온을 품에 안았다. 정녕 두꺼운 것은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얼굴이었던 것인지, 벌써 이러한 상황에 적응한 그였다.

    “미안하오.”

    루안이 진심이라곤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한 것 같군.”

    별다른 의미 없는 대답에, 지온이 입을 열었다.

    “연말이 되어야 해요.”

    고개를 숙인 지온을 보며 루안은 지온의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몰래 웃음을 지은 루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매번 자신을 그리 희롱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때마다 꼭 놀림 받는 어린 신부가 된 기분이었는데, 그것이 모두 연기였다니!

    급속도로 자신감이 차오른 루안은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도권을 쥐겠다고 결심했다.

    “당신은 언제부터 날 좋아했소?”

    자신감이 생기니 담도 커진 그였다.

    순간 지온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등을 밝히지 않은 서각 안에는 빛이라곤 장원에 걸어둔 등롱에서 나오는 빛뿐이라, 그녀가 돌아보는 순간에 마침 등롱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흔들리는 눈빛.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놀란 듯한 얼굴…….

    물끄러미, 넋을 놓은 바보처럼 지온을 바라보던 루안의 가슴 속엔 행복만이 온통 가득했다.

    ‘갈망했지만,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실은 나의 것이었구나.’

    “…왜 말이 없어요? 당신은 날 언제 좋아하게 된 건데요?”

    다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루안이 작은 기침과 함께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소.”

    그러고는 루안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요?”

    “난 그날이에요, 당신이 날 구해줬던 날.”

    루안이 멈칫했다.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같이 자랐다고도 볼 수 있는 사이잖아요. 나와 성격이 잘 맞았던 태자 전하와 가장 친했고, 의안왕은 어쩐지 그의 진짜 성격이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 다를 것 같아서 마음에 거리감이 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루안이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나는 어땠소?”

    지온이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사실 나도 계속 독신으로 지내는 게 너무 이례적일 것 같아 괜찮은 상대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을 두고 생각해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당신이 내가 생각했던 조건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었어요.”

    “그랬소?”

    루안은 매우 놀랐다. 자신이 그녀에게 그토록 가깝게 느껴졌었다니 말이다.

    “당연히 그냥 생각만 했던 거죠. 어차피 당신은 북양왕부의 공자였으니 언제 다시 북양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고, 난 계속 무애해각에 남아 있고픈 생각뿐이었으니까요.”

    루안이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시 무애해각에 남아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었소?”

    지온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했죠. 그런데 그렇게 오래 버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처음의 그 다짐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선제께서 혼담을 위해 보낸 사람이 도착했고, 할아버지께서 생각해보겠냐고 물어보셨죠. 할아버지께선 제가 황가로 시집을 가는 것은 원치 않으셨지만, 태자께선 믿을 만한 분이라 보셨거든요.”

    “그럼 당신은…….”

    “내가 말했잖아요, 난 태자비가 되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지온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게 혼담을 꺼내지 않았어도, 난 태자 전하께 시집가지 않았어요.”

    루안은 온갖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자신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혔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혼담은 처음부터 될 혼담이 아니었던 거예요.”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난 처음부터 마음에 둔 적도 없었는데, 그게 의안왕을 자극하게 될 줄은 몰랐죠.”

    혼담이 들어온 후 그녀는 의안왕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루안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실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온의 할아버지는 혼담을 거절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먼저 루안에게 청혼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바로 루안에 대한 마음을 말씀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고생 많았어요.”

    지온이 진심으로 말했다.

    “당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그러나 루안의 마음에는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다.

    영원히 그녀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다시 그녀를 되찾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품에 있는 지온을 다시 꽉 안는 루안이었다.

    “당신…….”

    지온의 숨이 그의 귓가에 뿜어졌다.

    “……놔줘요, 덥다고요!”

    루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덥게 있으시오!”

    루안의 대꾸에, 지온은 정말 답도 없다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다고 얼굴이 이렇게 두꺼워진단 말인가? 자신이 놀릴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던 그 루 대인은 어디로 가고?

    서아가 우려하던 바로 그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다.

    청춘남녀 단둘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할 짓이 또 뭐가 있겠는가?

    이미 초경(*初更: 오후 7시~9시)도 울린 터라, 지금 떠나야 했던 지온이 억지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돌아가야 해요.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결국, 이 시간까지 꾸물거리고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쉬움이 가득한 루안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등에 불을 밝혔다.

    거울을 꺼내 제 모습을 비춰본 지온은 머리가 이미 헝클어진 것을 발견했다. 서아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할 게 걱정된 지온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머리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루안이 지온에게로 다가왔다.

    “도와주겠소.”

    지온이 눈을 홉떴다.

    “또 건드리면 안 돼요!”

    지온의 말에 얼굴이 다시 붉어지긴 했지만, 억지로 평정을 유지한 루안이 말했다.

    “맹세하겠소.”

    그렇게 어렵사리 옷매무새와 얼굴까지 정리를 마친 후, 루안이 그녀를 아래까지 바래다주었다.

    좌불안석이던 서아는, 위에서 소리가 들리자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아가씨!”

    지온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가자.”

    한편, 루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멀어지는 지온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이제 보이지 않음에도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흠흠! 흠흠!”

    한등이 기침을 하며 루안의 정신을 일깨우자, 루안이 그를 흘끔 보곤 말했다. 

    “목이 아프면 의원을 만나 보아라.”

    실실 웃은 한등이 후다닥 루안에게로 달려와 물었다.

    “공자님, 성공하신 것입니까?”

    “뭘 성공하지?”

    루안이 몸을 돌려 후문을 향해 걸어가자 한등이 가까이 따라붙었다.

    “늦게까지 불도 안 켜시던걸요! 제가 다 봤습니다.”

    “…….”

    “공자님, 야우 형님께 북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드릴까요?”

    “아니.”

    “왜요?”

    한등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공자님 마음이 변하신 겁니까? 그래서 이제 저는 버리시고 야우 형님을 들이시려는 거예요?”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루안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대답했다.

    “큰형님이 알게 되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아라.”

    한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양왕 전하께선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시니…….’

    아무래도 공자님의 행복을 위해 당분간 야우 형님을 좀 더 참고 견뎌야 할 것 같았다.

    ‘나처럼 충직한 시종이 세상에 또 어디 있나, 그래! 봉급을 안 올려주면 이건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

    * * *

    한편, 별원을 나선 지온과 서아는 마차에 올랐다.

    넋을 놓은 서아의 모습에 지온이 슬쩍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지금 네 상태를 보면 하로와 의운이 이상하단 생각을 안 하겠어?”

    그러자 서아가 얼른 사죄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저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이 돼서…….”

    “뭐가 걱정되는데?”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으니, 서아도 알 수 있었다.

    아가씨와 루 대인 사이에 열에 여덟은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시녀가 되어 주인의 일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루 대인은……. 진심인 건가요?”

    서아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진심이시라면 아가씨 생각도 해주셔야죠.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아가씨의 평판은 어떡하고요?”

    지온이 그녀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 한 번만 이랬던 거고, 혼담을 넣는다고 해도 연말에나 넣으실 거야.”

    서아가 얼른 물었다.

    “그럼 루 대인도 아씨께 혼담을 넣기로 약조하신 거예요?”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안 넣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 어머니가 계시니, 괜찮은 집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래도…….”

    “됐어.”

    지온이 서아의 이마를 콩, 때렸다.

    “앞으로 조방궁 밖으로 나가지 않을게. 이러면 안심할 수 있겠지?”

    그러자 멈칫한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왜 안 나가시려고요?”

    “요즘 너무 드러내고 다녔잖아. 좀 숨어있을 때가 됐어.”

    지온이 대답했다.

    지온은 대장공주로부터 수안군주가 강왕부에 갔단 소식을 들었다. 아마 강왕부의 부탁으로 수안군주가 앞으로 지온을 살필 터였다.

    그 말은 끝내 지온이 강왕부의 주의를 끌었다는 뜻이 된다.

    하필이면 별장에서 완 소저와의 일이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소염의 말을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세간의 시선이 소씨 가문과 정국공부 간에 벌어진 다툼에만 몰려 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예민한 누군가가 지온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될 수도 있었다.

    그 혼란한 상황에, 미친 듯 질주하는 말을 단번에 쏘아 죽이는 일은 평범한 이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 아닌가?

    ‘당분간은 얌전하게 조용히 있자!’

    * * *

    다음 날.

    지온은 난택산방에 문안을 드리러 갔다.

    “본궁의 오랜 친우인데, 여씨 성에 이름이 강인이가 있어. 경원년 정묘과(丁卯科)의 장원(壯元)이야.”

    이야기하며 대장공주가 그녀를 훑어보자, 지온이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네, 어머니?”

    “네가 서교에 가 있는 며칠간, 본궁을 찾아와 네가 천수서원에 갔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어…….”

    지온은 그제야 대장공주의 눈초리가 이해되었다.

    대장공주가 말했다.

    “본궁이 생각해보니, 지난번 사방전이 무속의 죄에 몰렸을 때 말이다, 루 통정이 너무 딱 맞춰 나타나던 것 같더구나…….”

    “제가 우연이라 말씀드리면, 어머니께선 믿으실까요?”

    대장공주의 표정엔 이미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칠월칠석 그날에도, 다른 신하들은 다들 후궁의 비사에 괜히 끼어들고 싶지 않아 피하는데 루 통정만 달려왔었지.”

    지온이 대충 둘러댔다.

    “다들 루 대인께서 폐하의 환심을 살 줄 안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이번에도…….”

    “유 추승께서 청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혀를 끌끌 찼다.

    “말 꾸며내는 것도 선수구먼. 그럼 어제 간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야?”

    지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니, 설마 사람을 시켜 제 뒤를 밟으신 것입니까?!”

    “밟기는 뭘 밟아!”

    대장공주가 손을 흔들었다.

    “네가 하도 사고를 잘 치니, 본궁이 이미 한참 전부터 암중호위 둘을 네게 붙여 널 보호하고 있었던 게지! 그런데 잡히라는 못된 놈들은 안 잡히고, 네가 몰래 사내를 만난다는 것부터 알게 됐지 뭐냐? 어서 말해 보아라. 그 별원에 들어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한 것은 아닌 게지?”

    “…….”

    “어서 말을 하래도! 아직 연말이 되려면 멀었잖느냐. 별일이 없으면, 이 어미가 온이 널 도와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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