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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66)화 (166/385)
  • 166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날

    궁 밖을 나선 루안이 피곤한 듯 제 이마 언저리를 문질렀다.

    마구 경기를 치르고, 황제 앞에서 보고까지 하느라 온종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마차에 오른 그가 눈을 감자, 루안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던 한등이 눈치 좋게 마차 밖으로 나갔다.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잠시 후 루안이 돌연 눈을 떴다.

    ‘왜 이렇게 도착을 안 하는 거지?’

    창에 쳐진 막을 열어 본 루안은 바깥 풍경이 제 장원으로 향하는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등,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머리를 들이민 한등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묻지 마십시오, 공자님. 조금 있으면 알게 되실 겁니다.”

    루안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한등이 언제부터 이리 제멋대로…….’

    다행인 것은 그가 루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차가 멈추고 루안이 밖을 살피니, 이곳은 성 밖에 있는 별원이 아닌가?

    한등이 별원 안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공자님, 가시지요.”

    그의 뒤를 따라 루안이 도착한 곳은 서각 앞이었다.

    서각 앞에 도착한 한등이 더는 움직이지 않자, 그를 슬쩍 바라본 루안이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게슴츠레 웃음을 흘린 한등이 근처에 앉아있는 서아를 발견하곤 능글맞은 얼굴로 다가갔다.

    “누님, 누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왔습니다, 누님! 이제 상으로 제게 차 한 잔 내주시는 겁니까?”

    * * *

    루안이 서각의 문을 열자 겹겹이 둘러싼 책장이 보였다.

    책장 사이를 따라 들어간 길 끝에는, 창가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윳빛 옥 같은 뺨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눈매의 소녀가 말이다.

    그가 오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잠시 멈칫하던 루안이 소녀 앞에 가서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소?”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요?”

    지온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루안은 차를 따라주는 지온의 손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분명 옥종화와 외양이 전혀 다른데, 여전히 내 눈엔 한 사람으로 겹쳐 보이니…….’

    그가 차를 마시는 사이, 지온이 갑자기 다탁을 돌아 루안 옆에 섰다.

    “뭐, 뭐 하는……?!”

    당황한 루안이 손을 떠는 바람에 그가 들고 있던 찻물이 넘쳤다. 그는 급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제 허리에 올라온 지온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허리띠를 푸는 거죠?”

    지온이 당연한 소릴 왜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루안의 얼굴이 천천히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뭐 하는 거지? 갑자기 허리띠를 왜 풀어!’

    “어서요.”

    심지어 재촉까지 하는 지온이었다.

    “빨리 보여 달라니까요?”

    “뭐, 뭘 보여 달라는 거요……?”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마저 흐릿하게 나오는 루안이었다.

    “상처요!”

    흠칫 놀랐던 루안은 그제야 두뇌가 평소처럼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소염이 당신부터 먼저 때렸던 거 아니었어요? 보니까 약하게 때린 것도 아닌 거 같던데. 어서 풀어 봐요. 다쳤는지 보게.”

    “…….”

    잠시 침묵하던 루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괜찮소. 며칠이면 나을 거요.”

    “안 돼요. 내가 당신을 몰라요?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할 거잖아요. 빨리 풀어요. 안 그러면 내가 직접 풀 테니까!”

    지온이 채근했다.

    “빨리요, 금방 어두워질 거예요.”

    ‘어두워지면 둘만의 시간을 갖기 더 좋겠지…….’

    루안은 제 머릿속 사고가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급히 원래대로 돌려 세웠다.

    “정말 괜찮소. 이것 보시오, 이렇게 앉아도 멀쩡하지 않소.”

    그가 하는 말 같은 건 듣지도 않고, 지온이 다시 한번 그의 허리로 손을 뻗으려 하자 결국 루안은 두 손을 들었다.

    “아, 알겠소! 내가 직접 하겠소.”

    머뭇머뭇, 허리띠를 푼 그가 옷을 풀어 허리를 조금 드러냈다.

    “보시오, 괜찮지 않소?”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온의 손이 매섭게 날아들어 찰싹, 루안을 때렸다.

    지온은 화를 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멍이 이렇게 시퍼렇게 들었는데!”

    당황한 루안은 고개를 돌려 제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부위가 허리 뒤쪽인지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약을 준비해서 다행이에요.”

    지온이 약술을 꺼내며 말했다.

    “몸 돌려요, 안마하면서 문질러줄게요.”

    루안의 시선이 또다시 지온의 손에 머물렀다. 지온의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갑자기 몸이 불붙은 듯 후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필요 없소. 한등에게 하라고 시키겠소.”

    “내 기술이 부족할 것 같아 그래요?”

    ‘기술이라니…….’

    루안은 더 있다간 곤혹스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될 것 같았다.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인 게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빨리 돌아요. 시간 없어요.”

    지온이 손에 약술을 쏟더니 양손을 비볐다.

    “나도 돌아가야 하고 조금 있으면 날도 어두워질 거예요. 그럼 돌아가는 길이 더 힘들다고요.”

    그리고 루안은 강제로 자리에 앉혀졌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앉혀지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원한 약술이 발린 부드러운 손바닥이 루안의 허리에 닿았다. 손이 부드럽게 멍이 든 자리를 누르고 지나갈 때마다 살갗에서 천천히 열기가 일었다.

    루안의 이마에서 조금씩 땀이 배어 나왔다.

    루안은 지금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허리에서 움직이는 두 손에 가 있었다.

    지온에게 다른 뜻이 없단 것을, 그저 새파란 멍을 지우기 위해 이러는 것임을 루안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허리에서 느껴지는 손힘은 이제 약해져 안마라고 느껴지던 게 이젠 숫제 만지작거리는 손놀림으로 변해있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말자. 그저 좋은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 뿐이다.’

    루안은 딴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온이 갑자기 말을 붙였다. 

    “당신 허리도 근육질일 줄은 몰랐네요!”

    돌연 들려온 지온의 음성엔 흥분마저 가득했다.

    “군살이 전혀 없는 걸 보니, 평소 연공을 아주 성실하게 하나 봐요?”

    당황하던 루안은 빛과 같은 속도로 지온의 손을 붙잡아 옷 속에서 빼내었다.

    “겨우 두어 번 밖에 안 만졌는데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예요?”

    지온이 이런 말을 하며 다시 옷 사이로 손을 넣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허리띠를 꽉 조인 루안은 정색까지 하고 나섰다.

    “그만하시오! 다 끝나지 않았소?”

    전혀 봐줄 것 같지 않은 루안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지온이었다.

    “치사해.”

    그 모습에 루안은 호흡마저 흔들릴 뻔했다.

    간신히 고르게 숨을 돌린 루안이 물었다.

    “다 한 것이오? 그럼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요?”

    “지금 저를 내쫓는 건가요?”

    지온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아니라…….”

    “근데 날 왜 내쫓아요?”

    루안의 얼굴이 또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지온에게 몹쓸 짓을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온은 그의 걱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히려 더욱 그에게 밀착하듯 다가갔다.

    “사내란 정말이지, 그리 듣기 좋은 말을 한 지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요!”

    “난 달라진 게 아니오…….”

    “그럼 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온의 몸이 갑자기 휙 돌려 세워졌다. 지온은 이내 자신이 그에게 붙잡혔단 것을 깨달았다.

    루안의 숨결이 지온의 귓가에서 느껴졌다.

    “보내줄 때 가지 않았으니, 후회하지 마시오!”

    * * *

    위에서 들려오는 작은 비명에 서아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 아가씨 목소린데?”

    그러자 한등이 얼른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희 공자님이 계신데 뭐가 걱정이에요? 별일 없을 겁니다, 누님.”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것을, 한등의 말에 더욱 걱정스러워진 서아였다.

    ‘위에 단 둘뿐이잖아? 청춘남녀가 단둘이서 있으면…….’

    “안 되겠어,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봐야지!”

    “누님, 누님! 가지 마세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제가 보증한다니까요…….”

    한등은 당황해서 서둘러 말렸다. 

    서아 누님이 끼어들면 큰일이었다. 공자님께 얼마나 어렵게 찾아온 봄바람인데, 그걸 어떻게 망치게 둔단 말인가?

    “갑자기 놀랄 만한 일이 생겼었나 보죠. 봐요, 다시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죠? 진짜 무슨 일이 생겼으면 누가 비명을 한 번만 질러요, 누님?”

    서아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흐음…….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더구나 아가씨가 법도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 약조하기도 했었고…….’

    서아의 흔들리는 모습을 포착한 한등이 놓치지 않고 다시 그녀를 끌며 말했다.

    “누님, 지난번에 드셨던 간식은 입에 맞으셨어요? 제가 가서 사오라고 할까요?”

    서아를 붙잡아 놓으며 한등은 거의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공자님, 힘내셔야 합니다! 힘!’

    * * *

    서각 안.

    루안은 이미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만 찻잔을 든 그의 손이 조금 떨렸고, 얼굴엔 홍조가 올라 있을 뿐이었다.

    지온은 거울을 꺼내 입술연지를 다시 바르고 있었다.

    ‘사실 입술연지를 바르지 않아도 아주 예쁜데…….’

    루안은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졌다.

    “…지난번에 주었던 사건문서에는 소달이 삼 년 전에 돌아왔다고 되어있었어요.”

    지온의 말에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린 루안이 대답했다.

    “맞소.”

    지온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거렸다.

    “당시 있었던 숙청 사건에서 소달이 아주 의심스럽던데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론이라 보오. 강왕은 도성을 떠나면서, 지금의 황위를 공고히 하고자 많은 인원을 남겨두고 수많은 관원을 숙청했는데, 그중 일부는 누명을 씌웠고, 누군가는 암살했소. 당시 소달이 금군통령으로서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으니 그 일에 그가 연관되지 않았을 리 없소.”

    “그럼 그가 제 부친을 죽인 원수일 가능성이 크네요.”

    “그가 손을 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부 연관되어 있을 것이오.”

    지온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번 기회에 소달을 처리할 생각인 거죠?”

    루안은 작은 헛기침만 할 뿐, 지온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루안이 대답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소. 그러나 소염의 성정을 보아 한 번 당해서는 정신을 못 차릴 것이오.”

    지온의 질문이 이어졌다.

    “평왕세손은 또 어떻게 된 건가요? 왜 소염이 그자와 같이 어울리게 된 거예요? 평왕은 아주 공명정대한 분이 아니셨나요?”

    루안이 조용히 말했다.

    “평왕도 나이가 드신 것이지. 지금 평왕부는 평왕세자가 좌지우지하고 있소. 당시 의안왕을 양자로 입적할 때 종실에서 허락한 것도…….”

    지온이 이해했다.

    “평왕세자와 강왕부가 같은 편이로군요.”

    “그렇소.” 

    대답한 루안은 탁자 위에 있는 지온의 손을 보며 또다시 딴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할 날이 아닌 것 같은데…….’

    루안이 딴생각에 빠진 것을 본 지온이, 그의 손을 톡톡 쳤다.

    그러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뒤로 손을 움츠렸던 그가, 저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대범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천천히,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온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웃자 그만 부끄러워진 루안이 고개를 돌렸다.

    “왜 웃는 것이오?”

    “알면서 왜 물어요!”

    “…….”

    귓불이 분홍으로 물들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여인의 손은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작디작은, 제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손이다. 작은 손가락 끝엔 활쏘기를 연습한 흔적을 보여주는 굳은살이 있는데도, 여전히 너무도 부드러운 손이었다.

    루안은 그만 참지 못하고 지온의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가 입맞춤을 하고 말았다.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무언가에 놀란 것처럼 지온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루안에게 커다란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온은 이 상황에 긴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연기를 잘했던 것뿐이었다!

    비밀을 알아버린 루안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저기…….”

    지온이 그를 막았다.

    “머리 엉클어지면 안 돼요, 서아가 보기라도 하면…….”

    루안이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하겠소.”

    루안은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입술연지는 다시 발라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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