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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63)화 (163/385)
  • 163화. 고자질의 기술

    일사불란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정국공부 덕에 궁은 그야말로 뒤집히고 말았다.

    황제는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온 내시가 뜬금없이 회영왕이 뵙기를 청한다는 보고를 전하는 게 아닌가?

    황제는 이상함을 느꼈다.

    ‘회영왕 숙부는 소심하지 않던가? 평소에도 음주가무만 즐길 줄 알지 찾아와 말 한마디 전하는 일이 없던 자가, 갑자기 뵙기를 청한다고?’

    황제가 그를 만날지 말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회영왕의 울음소리가 대전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폐하아아! 소신을 살려주셔야 합니다아아! 이대로 더 방관하시면 신은 진짜 괴롭힘 때문에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아아!”

    울음소리에 두통이 생길 것만 같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입실을 허락했다.

    “들어오라 해라.”

    “네, 폐하.”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진 회영왕이 읍소했다.

    “폐하아아, 신이 죽게 생겼습니다아아! 제발 살려주십시요오오!”

    이마를 부여잡은 황제가 말했다.

    “황숙, 할 말이 있으면 알아듣게 하세요. 그리고 자꾸 죽네 사네, 듣기 거북하지 않습니까?”

    울음소리를 뚝 그친 회영왕이 공손하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신이 마음이 급해 그만…….”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늘 고분고분 착한 회영왕을 떠올리며 황제가 부드럽게 물었다.

    “괴롭힘을 당했습니까? 누가 감히 황숙을 괴롭혔습니까?”

    눈물을 슥슥 닦으며 회영왕이 대답했다.

    “소달의 아들, 소염입니다.”

    “그자가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그, 그자가 마구를 하면서 일부러 날 밀고 압박했습니다!”

    황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요?”

    “당연히 아닙니다!”

    회영왕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몹쓸 놈이 신과의 마구 시합에서 이겨 상으로 신의 물건들을 싹 다 털어가 놓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간계를 부렸습니다! 간계를 부려 천자께 하사받은 용문패까지 빼내려던 놈입니다. 

    당시 분을 참지 못했던 신은, 그 녀석과 단판으로 승패를 결정 내는 시합을 벌이기로 약조하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까지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놈이 경기에서 신의 수하에게 흉수를 쓰지 않습니까! 그걸 보고 신이 어찌 가만히 맞고만 있으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다른 이를 시켜 가서 때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것이 별 건 아니고…….”

    회영왕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실수로 그놈의 머리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신의 사람도 다쳤습니다! 정국공부의 세자는 하마터면 말발굽에 밟힐 뻔했는데…….”

    황제는 상황을 파악했다.

    “보아하니 황숙은 실수로 다른 이의 머리를 다치게 하고, 그쪽 가문에서 발고라도 하러 올까 봐 먼저 짐에게 읍소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회영왕이 급하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신은 고자질하러 왔던 것인데…….”

    회영왕은 유신지가 하라고 했던 그대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황제는 회영왕의 대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고자질하러 온 사람이, 그걸 곧이곧대로 밝힌다니 어이가 없었다.

    ‘황숙도 참 순진한 사람이야!’

    황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짐이 알았으니, 됐습니다. 그래 봤자 머리 좀 다친 게 아닙니까? 짐이 볼 때, 소달은 그렇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짐에게 발고할 사람이 아니…….”

    황제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소 장군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

    하필 이때 찾아온 소달 때문에, 뺨 맞은 기분이 된 황제는 슬그머니 역정이 났다.

    ‘소달은 왜 또 이러나? 평소 멀쩡하게 굴던 사람이 갑자기 물정 파악 못 하고?’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들라.”

    바로 금군통령, 소달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신, 소달.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물었다.

    “소 장군, 무슨 일로 왔는가?”

    눈물로 얼굴이 얼룩덜룩한 회영왕을 빤히 보고도 소달은 신경 쓰지 않았다.

    회영왕이 바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일러바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보 놈이 뭘 할 수나 있었을까? 열에 팔 할은 고자질도 제대로 못 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해가며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용서하시옵소서. 평소라면 신 역시 이와 같은 사소한 일로 폐하를 번거롭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아들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 온지라 어쩔 수 없이…….”

    “됐네. 황숙이 자네 아들의 머리를 다치게 한 걸 알고 있네.”

    역시나 그 일이라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듣기 싫다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자네도 말했다시피, 그렇게 사소한 일로 어전까지 와서 고할 필요 있는가? 짐이 황숙에게 자네 아들의 약값을 물어주라 하겠네.”

    소달이 흠칫, 굳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게야? 회영왕, 저 바보 같은 놈이 선수를 치다니?’ 

    * * *

    태사부로 돌아가는 길에 유민이 제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큰오라버니, 회영왕 전하가 정말 성공하실까?”

    유신지가 접선을 흔들며 말했다.

    “당연히 실패하시겠지.”

    “뭐? 그럼 오라버니, 왜…….”

    유신지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소달은 금군을 손에 쥔, 폐하께서 신뢰하는 신하가 아니냐. 회영왕이 그런 신하의 아들을 고자질한다 생각해 봐라. 아무리 현란하게 말을 잘한다 해도 폐하의 심중엔 티끌만큼이라도 의심이 남을 수밖에 없지. 그 후에 소달이 입궁해 소염의 상처까지 보여주면 결국 질책은 회영왕이 받게 되는 것이지.”

    “그럼…….”

    “그래서 이번 고자질은 제대로, 잘해선 안 되는 고자질이 되어야 하지. 소염이 흉수를 써서 회영왕을 낙마시키려던 것도, 마구공이 아니라 사람을 치려고 했던 것도 말해선 안 되고, 심지어 소염이 말발굽으로 정국공 세자를 밟아 죽이려고 한 것 역시 말해선 안 돼.

    소염, 그자 뒤에 평왕세손 요심이 있단 말은 더더욱 해선 안 되지. 회영왕의 머리론 그런 것까지 알아낼 수 없기에 말을 꺼낸 순간 폐하는 아마 회영왕의 의도를 의심하실 것이다.”

    “그럼 뭘 말할 수 있단 거야?”

    유민이 말이 안 된다는 듯 묻자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회영왕의 입장에서, 그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을 해봐야지. 회영왕이라면 소염이 자신을 괴롭힌단 것은 느꼈겠지만 그렇다고 또 어떤 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을 거야. 그런데 소염이 머리를 다친 것은 확실하게 드러난, 눈에 보이는 사실이 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회영왕이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이 무엇일까? 바로 소씨 가문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오겠단 생각이겠지!

    회영왕처럼 소심한 사람이 소달 장군 같은 사람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어디 그 엄두가 났겠어? 생각할수록 겁은 나는데 또 속에선 울컥울컥, 화도 치미니 그나마 용기를 낸 회영왕이 입궁하게 된 것이지. 폐하를 향해 고자질로 보이는 구조요청을 보내면서 말이야.”

    유민은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회영왕의 이야기를 들으신 폐하께선 분명 별 것 아닌 사소한 일로 생각하실 것이다. 그리고 회영왕의 말에서 소염이 그를 괴롭혔단 사실도 추론해내실 수 있으실 거고. 그럼 그 후에 소달이 찾아와 제대로 고자질한다고 해도 그땐 소용이 없게 되는 거야.”

    “소용이 없는 건 아니지.”

    유민이 말했다.

    “소달이 발고하러 간다면 분명 소염의 상세를 크게 부풀릴 게 뻔하잖아. 그 후엔 정국공부에서 잘 해결하길 바라는 수밖에.”

    그때, 마차가 태사부에 도착했다.

    유민을 먼저 내려준 유신지는 내릴 뜻이 없는 듯했다.

    “오라버니는 집에 안 들어가?”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똑똑한 신하는 말이다, 상전이 부르기 전에 미리 대기하는 법이야. 알겠니?”

    “그럼 나는 어쩌고?”

    “넌 들어가서 어머니께 난 좀 늦게 돌아와 식사할 것 같다고 전해드려.”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마음이 놓인 유민이 착하게 대답했다.

    “그럴게.”

    * * *

    유신지만 태운 마차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차가 궁문 앞에 도착하자, 황제의 접견을 기다리고 있는 정국공 부부가 유신지의 시야에 보였다.

    그런데 아무런 표식 없는 마차 한 대도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차 앞자리엔 눈에 익은 시종 하나가 앉아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신지가 표식 없는 마차의 차막을 걷어 올렸다. 역시나, 루안이 앉아 서책을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자네가 올 줄 알았지.”

    유신지는 마치 제 마차처럼 스스럼없이 루안의 마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올 거, 아까 나랑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아!”

    부르지도 않은 유 추승이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며 루안이 한숨을 쉬었다.

    “자넨 굳이 올 필요 없는데.”

    이 일에 얽힌 것은 모두 셋이었다.

    하나는 회영왕이요, 둘은 소씨 가문이었고, 셋은 정국공부였다.

    정국공 내외는 잘해봐야 증인이나 될 뿐이었으나, 루안은 반드시 와야 했다.

    루안은 바로 얼마 전 영전하여 통정이 되었다. 황제가 루안 자신을 크게 신뢰하게 된 지금, 때마침 터진 사건을 어찌 보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하나, 루안은 훈귀가의 공자들과 본래 왕래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왕부에 찾아가 마구를 치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설명이 당연히 필요했다.

    그러나 유신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건과 무관한 듯했다. 가장 똑똑하게 처신하는 것은, 사실 처음부터 황궁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회영왕부, 정국공부, 소씨 가문. 만만찮은 세 가문 사이의 소송전에 휘말렸다간, 무조건 귀찮아질 것이 뻔했던 것이다.

    유신지가 방긋 웃었다.

    “나처럼 강직한 사람이 어디 가만히 모른 척할 수 있겠나?”

    그를 가만 지켜보던 루안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고맙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신지는 우정 때문에 온 것이다.

    * * *

    “폐하!”

    소달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뭔가? 이걸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짐에게, 황숙더러 자네에게 사죄라도 시키라는 건가?”

    황제는 화가 났고 소달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어디 회영왕을 발고하러 왔던가? 당연히 아니었다!

    ‘회영왕이 당최 뭐라고? 쓸모없는 한량인 군왕을 발고해서 이겨봤자, 아무런 재미도 못 보는 것을!’

    물론 발고하러 온 것이 맞긴 했다. 하지만 발고하러 온 대상은, 회영왕이 아니라 정국공부였다!

    ‘이대로 회영왕이 판 구덩이에 빠져 죽을 순 없지, 암!’

    결단을 내린 소달이 얼른 소리쳤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소장의 아들과 상을 걸고 마구 경기를 하신 분은 군왕 전하이십니다. 그러나 제 아들을 상처 입힌 자는 다른 자입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소달이 다소 여유를 찾은 듯 입을 열었다.

    “마구 경기 중, 소장의 아들과 정국공 세자 간에 충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한 충돌은 본래 피하기 어려운 일이온데, 정국공의 여식이 구장으로 제 아들의 머리를 가격하여 피를 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이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참기가 어려워 폐하께 이리 정의를 찾아 달라는 청을 드리러 찾아온 것입니다!”

    황제는 정신이 없었다.

    정국공 세자가 난데없이 소달의 입에서 튀어나오더니, 이젠 또 정국공의 여식이 연달아 얘기 중에 튀어나왔다. 게다가 방금 회영왕은, 또 소염을 자기가 사람을 시켜 때렸다 하지 않았던가?

    ‘대체 이 일은 누구끼리 충돌이 생긴 것이야? 또 누가, 누구를 때린 것이고?’

    회영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달,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건가! 구장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소염은 멀쩡하게 잘만 걸어갔네!”

    소달이 기를 바짝 세워 대답했다.

    “머리를 맞았는데 누가 안답니까? 떠날 땐 멀쩡했을지 몰라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를 해대더니 그대로 혼절했습니다. 지금은 침상에 드러누웠는데, 군왕 전하, 못 믿으시겠거든 신의 집에 가셔서 한 번 보시겠습니까?”

    회영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혼절한 척을 하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군왕 전하께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신도 방법이 없지요.”

    “자네…….”

    “됐으니, 모두 조용히 좀!”

    둘의 다툼에 머리가 아픈 황제가 말했다.

    “짐이 정리를 해봐야겠으니, 둘 다 아무 말 하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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