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62)화 (162/385)
  • 162화. 제대로 혼내줘야 해!

    “지온 언니.”

    유민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제 어떡해요?”

    “괜찮아요.”

    다시 차양 아래로 돌아간 지온이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말했다.

    “유신지 오라버니도 계시잖아요.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그 말에 유민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맞아, 오라버니가 있잖아! 우리 오라버니는 똑똑하니까, 분명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가문의 아가씨들은 갑작스러운 난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구를 본 적은 있지만, 이런 패싸움은 본 적 없는 그녀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온과 유민의 차분한 모습이 그녀들을 안심시킨 덕분인지, 마구장에 온 규수들은 다들 두 사람에게 다가와 재잘재잘, 한 마디씩 입들을 놀려댔다.

    “지온 언니, 저렇게 싸우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소 공자 머리가 다 터졌던데…….”

    “소소도 아직 저 안에 있잖아! 다치면 안 될 텐데.”

    그나마 장기가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의견을 냈다.

    “아니면 자리를 피해있는 건 어때? 저렇게 난리가 났는데, 잘못해서 여기까지 번지면 큰일이잖아.”

    그러자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금 관전하는 분들 모두가 명문세가의 왕후들이신데,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군왕 전하께서 저희를 보호하고 계시는 것을요!”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시선이 회영왕에게로 향했다.

    사실 회영왕은 마구장에서 말이 죽고 양쪽이 서로 충돌했을 때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었다. 소염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주먹다짐을 하겠다고 달려나가는 회영왕을, 그의 성정을 잘 아는 회영왕부의 시위가 늦지 않게 붙들어 두었던 것이다!

    지금 회영왕은 마장 옆에서 방방 뛰고 발길질을 해가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는데, 시위들이 주변을 둘러서서 그를 보호하고 있는 곳 바로 뒤에, 마침 마구를 구경하려고 온 규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여러 명문세가의 시위들이 올라와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다.

    장원의 주인인 평왕부의 요심 역시 마찬가지로 시위들을 보냈다. 사태를 진정시키는 일에 태만했다는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데다가, 소염을 내버려 두어 얻을 이익도 없어 보이자, 요심은 시위들에게 바로 사태를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소염 측과 경관걸 측 모두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있진 않았던지라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수준의 상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제 머리를 감싼 소염이 차갑게 경관걸 측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모두 두고 보자!”

    그리곤 제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회영왕이 물러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자신 있으면 다시 와서 싸워보던지! 지고 나서 꽁무니 빼는 게 사내자식이 할 짓이냐!”

    그리고 루안이 자신을 쳐다보자 회영왕은 금세 움츠러들었다.

    ‘왜, 왜,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루안이 입을 열었다.

    “군왕 전하, 제가 전하라면 지금 바로 입궁하여 폐하께 모든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회영왕은 눈만 끔벅거렸다.

    “맞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유신지도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경 형, 지금 바로 정국공부의 어른 한 분께 연락을 취하세요. 그리고 궁문 앞에 가셔서 죄를 빌라고 부탁하십시오.”

    경관걸은 시위들에게 이미 실려 나온 상태였다.

    말발굽에 밟히지는 않았지만, 소염의 구장에 맞아 낙마까지 했기에 경관걸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유신지의 말에 경관걸이 흠칫하며 당황하더니 물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상황입니까?”

    “작은 불씨가 큰 산맥 전부를 태우지요. 별 것 아닌 작은 일도 제대로 처리해놓지 않으면, 큰일이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유신지가 입을 말아 올렸다.

    “소염이 두고 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작자가 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거짓 발고라도 하려는 게 아니겠는가?”

    “맞습니다. 그러니 먼저 가서 선수를 치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회영왕이 발발 떨며 말했다.

    “허, 허나 난……난 자신이 없는데…….”

    칠월칠석날 그가 사고를 친 덕에 이미 황제는 회영왕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으셔도 하셔야 합니다.”

    루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군왕께서 가시지 않으면 추후에 폐하께서 군왕 전하를 불러 심문하실 것입니다. 원고가 되실지, 피고가 되실지 군왕께서 선택하십시오.”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마음의 결정은 빨랐다. 회영왕은 이를 악물며 결정했다.

    ‘루 통정은 폐하의 심복이니 이자가 말하는 게 틀림없겠지!’

    “알겠네! 본왕이 당장 입궁하도록 하지!”

    “폐하께 어찌 말씀을 올려야 하는지는 아십니까?”

    유신지가 회영왕에게 물었다.

    “그건…….”

    “이렇게 말씀을 올리십시오…….”

    유신지는 회영왕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인지 등등 구체적인 사항들을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유신지가 알려준 말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외운 회영왕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외쳤다.

    “본왕, 다녀오겠네!”

    경관걸 쪽은 가르칠 필요도 없었다.

    “저희는 조금 늦게 입궁해도 되지만, 군왕 전하께서 말씀을 끝내셨을 때 폐하께 고하는 게 가장 좋겠지요.”

    경관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신지는 차양을 향해 걸어갔다.

    마구를 보러 온 규수들을 향해 예를 갖춘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불미스러운 일로 놀라게 하여 송구합니다. 지금 바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드리겠습니다.”

    유신지는 사람을 부려 옆에 있는 서정후부의 장원으로 규수들이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다.

    온화하고 예의까지 갖춘 사내가 태도도 어찌나 상냥하고 부드러운지, 유신지의 배려 덕에 규수들은 놀란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심 규수들은 비슷한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 추승은 소문만큼이나 멋진 분이시구나. 아직 부인을 맞지 않으셨다던데, 혹시…….’

    * * *

    지온은 경소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탔다.

    “지온 언니.”

    지온이 자신을 부르는 경소소의 손을 잡아 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경소소의 입술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내, 내가 사고를 친 거지?”

    소염의 아버지는 금군통령인 소달(蕭達)이었다.

    금군통령은 필연적으로 황제의 심복이 앉을 수밖에 없는 자리가 아니던가?

    ‘내게 맞아 머리가 터졌으니, 혹시라도 소염이 폐하를 찾아가 고자질이라도 한다면…….’

    이게 다 경소소 자신이 일으킨 사달이 아닌가?

    “걱정하지 마.”

    지온이 경소소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너한테 가서 때리라고 한 거잖아. 내가 너 잘못되는 일을 하라고 했겠어?”

    경소소가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언니, 그런 뜻이 아니라…….”

    “소소야 내 말 들어 봐.”

    지온이 그녀에게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오늘 너희 오라버니가 다쳤던 일은, 어떤 식으로 풀렸든 우리가 억울할 수밖에 없어. 평왕세손이 소염 편만 든 것도 맞지만, 마구 경기 중에는 원래 다치는 일이 많고, 다른 사람들은 겨우 이 정도 일로 우릴 위해 나서서 평왕부의 미움을 사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오늘 이 사건을 크게 키우지 않으면, 괜히 너희 오라버니만 억울하게 되었을 거란 소리야.”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어떻게 사건을 크게 키울 수 있을까? 만약 진짜 너희 오라버니를 말이 밟고 지나갔다면, 너희 오라버니는 중상을 입었을 거고 일도 정말 커졌겠지만 그건 제외해야지. 우리에겐 너희 오라버니의 안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니까. 소염에게 교훈을 준답시고 사람이 다친다면, 그거야말로 득보다 실이 더 큰 일이야.”

    멈칫한 경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말이 맞아.”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사건을 크게 키워야 하는데, 우리가 고발하는 건 좀 어렵잖아? 그럼 소씨 가문에서 고발하게끔 판을 짜면 되잖아?”

    지온이 경소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내가 소염한테 한 방 먹여주려고 했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소소, 너만큼 명분이 확실하지가 않더라고.”

    지온이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자 경소소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그럼 내가 사고를 친 게 아니라, 오라버니의 억울함을 풀어준 건가?”

    “맞아, 바로 그거야.”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회영왕 전하께선 벌써 입궁하셨으니까, 넌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곧장 백부님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네가 경중을 모르고 소씨 가문의 공자를 상처 입혔다고 말이야. 나중에 쌍방 대질하는 순간이 오면, 분명히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상대편의 잘못을 고발하는 상황이 펼쳐질 거야! 소씨 가문 놈들이 이 일의 책임을 몽땅 지게 만들어야지!”

    지온의 말에 경소소의 낯빛이 밝아졌다.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어, 지온 언니! 언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언니가 아니었다면 우린 진짜 억울하게 당했을 거야. 아, 맞다, 오라버니도 언니가 살렸잖아! 그런데 언니, 어떻게 활을 그리 잘 쏴? 난 내가 그래도 꽤 활을 잘 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중앙에 맞출 수도 없었을 거야.”

    다시 재잘거리는 경소소를 보고서야 지온은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돌아가던 중, 두 사람은 각자의 마차를 타고 갈라졌다.

    경소소는 자택인 정국공부로 돌아갔고, 지온은 조방궁으로 향했다.

    조방궁에 도착하자마자 제 거처도 들리지 않고 곧장 난택산방부터 찾은 지온은, 이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대장공주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전해 들은 대장공주가 바로 말했다.

    “정국공부로 가자!”

    * * *

    두 사람이 정국공부에 도착했을 때, 마침 노부인이 다친 경관걸의 곁을 지키며 화를 내고 있었다. 대장공주가 온 것을 본 노부인이 말했다.

    “봉아! 어찌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 별일 없을 것이야. 정국공 내외가 소씨 가문에 들렀다가 바로 입궁할 것이야…….”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당사자에게 먼저 사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정국공은 일부러 시간을 계산해, 소염의 부친인 금군통령 소달이 집을 나서서 없는 틈에 소씨 가문을 찾았다.

    소달을 정국공 자신이 만나지 못해야 황궁으로 달려갈 명분이 생기지 않겠는가?

    정국공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계산에 넣은 것을 알게 된 대장공주는, 정국공이 이미 뭔가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공주가 웃음을 지었다.

    “걱정이 되니 그렇지요. 관걸이는 어떻습니까? 괜찮겠지요?”

    “괜찮네. 별일 없을 것이야. 낙마하면서 접질린 게 문제인데 그것도 며칠 요양하면 괜찮아질 게야.”

    누워있던 경관걸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숙모님. 이 정도 상처쯤 별 것 아닙니다.”

    이에 노부인이 획, 고개를 돌리더니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스물이 훌쩍 넘은 것이 이리도 덜 영글면 어쩌자는 것이야! 소가의 그 벌거숭이 녀석이 어떤 화상인지 알면서 그리 가서 어울리다니! 그러니 이리 몸이나 다쳐 돌아오는 게지! 그만 집안에서 빈둥거리고, 당장 짐 챙겨 군영으로 썩 돌아가거라!”

    경관걸이 볼멘소리를 냈다.

    “할머니. 소손더러 집에 좀 더 남아 있으라고 하신 건, 할머니십니다.”

    “남아 있다가 이리 큰 사고를 칠 줄 알았어야지? 그나마 네 여동생들의 대처가 빨랐으니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네 그 머리통도 말발굽에 벌써 박살이 나고 없었어!”

    말을 마친 노부인이 지온을 향해 온화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착한 것. 관걸이가 무사한 건 모두 네 덕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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