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61)화 (161/385)
  • 161화. 나는 할 수 있지!

    한편, 경기가 이어질수록 소염의 가슴에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난다 긴다 하는 대장부들로 데려다 놓은 자신의 마구부가, 목이 터져라,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상대편의 기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모든 전술이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소염은 어제의 전술을 다시 한번 활용할 생각이었기에, 수하들과 함께 유신지를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신지는 회영왕이 아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유신지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내빼버렸다.

    이후로 소염은 몇 번이나 이러한 전술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도리어 그때를 노린 경관걸에게 연달아 점수를 내주고야 말았다.

    마침내 이런 식으로 경기를 지속하다간 지게 될 거란 생각이 소염의 뇌리를 스쳤다.

    끝내 마음을 굳힌 소염이 시위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곧 포위하듯 소(蕭)씨 가문의 시위들이 모여들었다.

    또다시 상대의 손에서 마구를 빼앗은 루안이 몸을 틀려던 그때, 그는 돌연 허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상대가 치러 온 것은 마구가 아니었다.

    ‘사람을 치러 왔군.’

    루안은 바로 몸을 숙여 상대의 구장(球杖)을 피하는 동시에 아직 제 손에 있던 마구를 밖으로 쏘아 보냈다.

    이제 더는 위험한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긴 순간, 예상치 못한 바람 소리가 루안의 귓가에 들려왔다.

    “조심해!”

    유신지가 고함을 치는 그때, 루안이 말고삐를 잡아채 강하게 잡아당기자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 덕에 루안은 다시 한번 흉계를 피할 수 있었다.

    미간을 좁힌 루안의 시선이 소염에게로 향했다.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린 소염은 루안을 향해 눈을 음침하게 희번덕거리다 경관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루안 역시 바로 그의 뒤를 쫓았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공문에 마구를 넣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경관걸의 등은 무방비상태였다. 맹렬한 기세로 말을 달리던 경관걸을 향해 난데없이 구장이 날아왔다. 뒤에서 날아온 구장에 맞아 순간 중심을 잃은 경관걸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마구는 위험한 경기 중 하나였기에 늘 부상자가 나왔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에서 떨어지면 선수들은 곧바로 경기를 멈추곤 했다.

    그러나 소염은, 경관걸이 말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도 말은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밟으려는 듯 더 세게 말을 몰고 나갔다.

    말발굽에 제대로 밟히면, 불구가 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 광경에 눈알이 떨어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질만 하던 경소소는, 어찌나 놀랐는지 숨이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눈앞의 상황이 매우 급하게 흘러가자 루안이 구장을 던졌다.

    그렇게 날아간 구장은 소염을 정확하게 맞췄고, 그의 신형은 휘청하며 흔들리더니 급기야 말에서 굴러떨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경관걸은 시시각각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고삐를 쥔 이가 없는 말이 그에게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경관걸은 어떻게든 달려오는 말을 피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등을 맞아서 엄청난 통증으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오라버니……!”

    끝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경소소의 음성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어떡해! 미친 말은 사람도 아랑곳 안 하는데!’

    그때였다.

    쐐액-!

    공기를 찢는 우전(*羽箭: 새의 깃털을 단 화살) 소리가 경소소의 귓가를 스치더니, 소염의 말이 돌연 고통에 울부짖으며 발을 버둥거리는 것이 아닌가!

    멈칫한 경소소의 시야로 말 머리에 우전이 박힌 것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회영왕 옆에 서 있는 지온의 손엔 여전히 옥조궁이 들려있었다.

    어제는 지온이 촉을 제거한 화살을 쏘았지만, 이번엔 그리하지 않은 것이다!

    비틀비틀, 몇 발자국을 채 떼지 못하고 끝내 소염의 말이 쿵 땅으로 쓰러졌다.

    경기 중에 일어난 변고에 보고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을 만큼 놀랐으나 단 한 사람, 차양막 안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요심만큼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짧은 조소를 흘렸다.

    마구 경기는 중단되었다.

    우르르, 마구장으로 올라온 경관걸의 시위들이 경관걸을 부축했고, 소염의 시위들은 소염을 에워쌌다.

    말에서 내려 그가 있는 곳을 향하는 유신지의 얼굴은 서리라도 낀 듯 차가웠다.

    “소염 공자, 경기를 이렇게 하는 건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입꼬리를 비튼 소염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뭘 했다고? 유 추승, 생사람 잡지 말게.”

    유신지가 멀리 숨어버린 심판을 흘금, 쳐다보고는 차갑게 웃었다.

    “어제도 이런 식으로 회영왕 전하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고 들었네만?”

    소염이 발뺌했다.

    “그런 일 없었으니. 헛소리하지 말게.”

    “아. 했는데 인정은 못 하시겠다?”

    유신지의 추궁에 소염은 건들건들한 태도로 건방지게 대꾸했다.

    “아, 글쎄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소염, 이……!”

    소염이 보이는 삼류 잡배 같은 태도는 유신지의 부아를 돋울 만큼 불량스러웠다.

    그때 루안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만하지. 사람의 도리 같은 걸 설명해봐야 저자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걸세. 후안무치한 저런 종자를 자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소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루 통정, 그렇게 비꼬면 자네 속이 편한가? 어쨌든 난 안 아무 짓도 안 했네. 폐하 앞에 가서도 똑같이 말할 것인데,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그리 말하며 소염은 속으로 생각했다. 

    ‘심판도 내 편이고, 평왕세손도 내게 유리하게 말할 거다. 너희 앞에서 내가 경관걸을 좀 위험하게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라고?’

    “어쩔 거냐고? 별 것 안 할 거다.”

    루안이 대답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정 사람의 도리를 신경 쓰지 않겠다면야, 다른 이들도 사람의 도리를 따지며 널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소염이 경계하며 물었다.

    “너! 내게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 말에 유신지 역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군. 소 공자, 자네만 사람을 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나?”

    “너, 너희도 사람을 때리려고?!”

    분개한 소염은 당장 일장 연설을 쏟았다.

    “너희의 신분을 잊지 마라! 넌 대리시의 추승! 넌 통정사의 통정! 둘 다 조정 관직 높은 자리에 앉은 문관 나리들이지! 우리처럼 노는 것 좋아하는 공자 나부랭이들과는 상황이 다르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루안과 유신지의 미간이 좁아졌다.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본 소염은 자신감에 차서 의기양양해졌다.

    “쳐봐! 어디 쳐보라니까? 때릴 수 있겠어?”

    “두 분은 못 하셔도, 나는 할 수 있지!”

    이때, 난데없이 여인의 음성이 날아들며 소염의 정수리로 구장이 살벌하게 떨어졌다.

    소염은 머리가 터지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그의 이마로 진득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소염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때린 거야? 유 추승? 아니면 루 통정? 아니지, 둘 다 손도 안 썼는데…… 목소리도 여자였어!’

    화들짝, 정신을 차린 소염의 시위들이 황급히 소염에게 몰려들었다. 이마에 난 상처를 누르며 시위들이 소염을 보호하려는 듯 그의 앞을 막아섰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머리를 흔들어 턴 소염은,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앞을 막은 시위들을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비켜!”

    시위들이 비키자 소염은 자신을 때린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소염을 때린 사람은 진짜 여자였다! 그것도 경관걸의 여동생!

    ‘허허, 예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모르는 소저일세? 사내의 일에 여인이 어디라고 끼어들어?!’

    그러나 그는 경소소를 마주할 수조차 없었다.

    루안과 유신지가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뭐야, 두 사람? 왜? 감히 때리진 못해도, 앞을 막을 용기는 있으세요?”

    소염이 비릿하게 웃었다.

    “하긴, 여자가 대신 나서줘야 하는 두 사람 수준도 알만해!”

    그러나 소염은, 유신지의 분노가 경소소가 때린 한 방으로 풀릴 만큼 작지 않단 것은 알지 못했다.

    웃음을 지은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들인 우리가 사람을 때릴 순 없지. 그리고 말이야, 작고 약한 여인을 괴롭히는 것을 그냥 놔두는 것도 당연히 안 되겠지!”

    그 말을 들은 소염은 목덜미에 순간 열이 확 뻗쳤다.

    “작고 약해?”

    믿을 수가 없단 듯, 피칠갑을 한 제 얼굴을 가리키며 소염이 입을 열었다.

    “본공자가 이 꼴이 되도록 남의 머리를 깬 사람을, 요즘엔 작고 약한 사람이라고 하나?”

    그러나 유신지는 여전히 유들유들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경 소저가 키도, 몸도 얼마나 작은데! 당연히 작고 약한 여인이지! 방금 소 공자 자네를 때린 거야…… 그래! 궁지에 몰리면 작고 약한 토끼도 가끔 개망나니 손을 앙 하고 문다지 않던가? 자넨 못 들어 봤나? 그런 상황이었어.”

    “허허, 허허허허허…….”

    결국, 유신지에 말로 인해 폭발한 소염이 시위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들 죽었느냐! 가만히 뭣들 하는 게야! 공자가 맞는 걸 못 봤느냐? 이건 정당방위다! 쳐라!”

    명을 받은 소염의 시위들이 경관걸의 시위들과 루안, 유신지에게 달려들었다.

    평왕부 사람들은 슬쩍 제 주인인 평왕세손 요심과 눈짓을 주고받은 후에 그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곤 입으론 말리는 척, 연신 싸우지 말라면서도 은근슬쩍 경관걸 측의 사람들을 붙들고 늘어지며 소염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평왕부 사람들만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유신지의 은근한 신호를 받은 회영왕부 사람들이 바람처럼 달려와 이 난투극에 끼어들었다.

    이렇게 마구장 위에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지고야 말았다.

    손에 구장을 든 채로 시위들 한복판에서 보호를 받게 된 경소소는, 너무 어지러운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살짝 두려움에 떨었다.

    * * *

    반 다각 전.

    소염의 말이 우전에 맞아 죽자, 소씨 가문과 경씨 가문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유신지와 루안이 소염에게 시시비비를 따졌다. 오라버니인 경관걸의 목숨을 위협했던 소염이 뻔뻔하게 발뺌하자, 이를 본 경소소는 불처럼 분노하고 말았다.

    “저 비열하고 더러운 쓰레기! 저런 놈은 그냥 깔끔하게 때려 죽여야 내가 발 뻗고 잔다!”

    “그럼 가서 때려.”

    분노하던 경소소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그녀의 손에 구장이 쥐어졌다.

    경소소가 돌아보니 지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바로 가. 가서 조준 제대로 하고 바로 한 방 먹이는 거야.”

    멈칫한 경소소는 머뭇거렸다.

    “그, 그래도 될까?”

    지온이 활짝 웃자 이가 드러났다.

    “왜, 무서워? 소염 그 작자가 네 오라버니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려고 했잖아. 그럼 당연히 혼내줘야 하는 거 아냐?”

    조금 전의 위험천만했던 광경이 떠오르자 경소소의 가슴이 다시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맞아, 제대로 혼내줘야 해!’

    만약 지온이 제때 활로 말을 쏘아 죽이지 못했다면, 지금쯤 관걸 오라버니는 불구가 되는 게 다행일 정도로 중태에 빠졌을 것이다. 정국공부는 몇 대째 군사들을 통솔해온 장군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의 세자가 불구라니, 그럼 앞으로 어찌한단 말인가?

    ‘이건 우리 정국공부 전체를 망하게 하려던 것과 같아!’

    그리 생각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간 경소소는 구장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두 분은 못 하셔도, 나는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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