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60)화 (160/385)
  • 160화. 머리 잘 쓰는 사람

    경소소와 시선을 교환한 경관걸이 조용히 경소소를 향해 잘했다는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이기기 위해선 절대 회영왕이 경기에 끼면 안 됐던 것이다.

    그렇게 다른 몇 사람들은 마구 시합에 뛸 선수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경관걸은 당연히 시합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국공부의 좋은 선수 몇도 함께하게 되었다. 회영왕의 마구부에서도 몇 명을 골랐지만, 문제는 남은 자리를 채울 이들을 고르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염 그놈 뒤에는 평왕세손이 있어. 한 번의 시합으로 승패를 결정하기로 했으니, 분명 제 사람들을 함께 내보내겠지. 평왕부의 마구부는 도성에서 가장 뛰어난 마구부거든.”

    경관걸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잘 뛰는 선수들 몇이 더 필요해. 이대로라면 질 거야.”

    지온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유민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저, 저희 큰오라버니께서 마구를 무척 잘하세요.”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의 큰오라버니가 누구인지 떠올린 경관걸이 되물었다.

    “유 추승을 말하는 거요?”

    “네.”

    유민이 대답했다.

    “저희 큰오라버니께서 복시를 보던 해에 무진사(*武進士: 무과 전시에 합격한 사람) 하나가 오라버니의 신경을 건드린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마구 시합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었는데, 그때 오라버니가 있던 마구부가 이겼어요.”

    워낙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었던 지라, 경관걸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 추승이 우릴 도와주려 하시겠소? 더구나 관아로 출근을 하셔야 할 텐데, 시간이 되실는지…….”

    “내일이 마침 오라버니가 쉬는 날이에요.”

    유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오라버니께 도와 달라는 서신을 보낼게요.”

    지온이 그 말을 받았다.

    “대공자께서 마구를 그리 잘하신다면, 오실 때 다른 친우 두 명과 함께 와달라고 하세요.”

    경관걸이 손뼉을 쳤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구성하면 되겠어.”

    서로 상의를 마치고 유민은 바로 서신을 썼고, 경관걸은 시위 하나를 불러 빠르게 서신을 가져다주라며 보냈다.

    지온은 잠시 방에서 나와 대나무 피리를 서아에게 건넸다.

    * * *

    어찌나 빨리 왔는지, 날이 저물기도 전에 유신지는 이미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유신지를 맞으러 나간 경관걸은 곧 돌아왔는데, 유신지뿐만이 아니라 루안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함께 있던 이들이 모두 놀랐고, 회영왕은 심지어 경관걸에게 조용히 묻기까지 했다.

    “루안이 아닌가? 저자가 여긴 왜 온 것인가?”

    사실 루안이야말로 회영왕이나 경관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훈귀 가문의 후인이자, 세족의 자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지, 무애해각을 다녀온 후부터, 루안은 문인들과 함께 어울려 다녔던 것이다.

    그런 루안이 모습을 보이자 회영왕은 오늘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닌가, 확인이라도 할 기세였다.

    경관걸이 말했다.

    “유 추승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니, 돕기 위해서 왔을 겁니다.”

    유신지가 들었으면 억울함에 가슴을 쳤을 말이었다.

    퇴근하고 나오던 유신지는 대리시 밖에서 루안을 만났다가, 곧 유민의 서신을 받게 되어 여기까지 함께 오게 된 참이었다.

    따지고 보면 뭔가 우연치고는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뭔가 매우 조작된 듯한, 계획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어찌 되었건, 마구 경기에 대한 전후 사정을 들은 유신지가 입을 열었다.

    “도와드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함께 뛰는 마구부는 반드시 제 지휘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경관걸이 물었다.

    “유 추승,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건 훈련을 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지온을 슬쩍 바라보았던 루안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경기가 바로 내일이니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해가 넘어가기 전에 먼저 훈련부터 하는 게 좋습니다.”

    유신지는 루안의 말이라면 무조건 싫다고 땡깡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속으로 의심했다.

    ‘루안, 이 자식 이거, 먼저 사정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대리시로 날 찾아왔던 건가?’

    한등이 마구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꺼내는 것을 본 유신지는, 의심할 것도 없이 자신의 추측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신지가 슬쩍 한쪽에 앉아 있는 지온을 보니,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굴면서도 은근슬쩍 루안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유신지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내가 왜 전엔 이걸 눈치를 못 챘지? 다 같이 있는데 서로 은근슬쩍 추파나 던지고, 너무하잖아!’

    이제 막 실연의 상처를 가슴에 안은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신 생각은 전혀 해주지 않다니!

    ‘이게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뭐냐?’

    “오라버니?”

    유민은 어딘지 모르게 제 큰오라버니가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심히 유신지를 불렀다.

    유신지가 다시 표정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마.”

    * * *

    모두를 이끌고 마구장으로 향한 유신지는 이런저런 시험을 거쳐 직접 선수들을 선발했다.

    정국공부에서 네 사람이 뽑혔고, 회영왕 쪽에서 셋을 뽑았다. 유신지 자신과 루안 그리고 한등까지 포함하여 모두 열 명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매일 아침에 나가서 한 바퀴 돌면서 서로 합을 맞춰보면 되겠습니다.”

    이때, 지온이 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소염이 좋아하는 전술이에요.”

    유신지가 후루룩 읽어보곤 크게 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도 있는데 이기지 못하는 게 이상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정한 후, 유신지는 규수들을 모두 돌려보내려는 듯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세 분은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계속 있다간 서정후부에서 걱정하겠지요. 다른 이의 집에 머물 땐 예를 잘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대답하는 경소소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가. 내일 오라버니가 사람을 보내 데려오마.”

    경관걸의 말에 그제야 웃음을 짓는 경소소였다.

    * * *

    소녀 셋은 평왕부의 장원을 나왔다.

    “어쩐지 오라버니가 우릴 자꾸 내쫓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유민의 말에 경소소가 대답했다.

    “너희 가문이 워낙 엄하잖아. 그러니 대공자께서도 네가 거기에 남아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겠지.”

    유민은 어쩐지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았지만, 영 생각이 정리되질 않아서 도리질만 했다.

    ‘모르겠다,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큰일도 아니고.’

    한편, 유신지는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루안을 향해 콧방귀를 뀌더니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흥, 잔꾀 많은 사람 같으니.”

    * * *

    서정후부의 별장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장기에게 내일 옆에 있는 평왕부 마구장에 마구 경기를 구경하러 간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소저들이 어찌나 관심을 보이는지, 계속 찾아와 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댔다.

    장기는 제가 초대한 손님들 모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곤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다 같이 갈까요? 둘째 오라버니께 말을 전하면, 평왕부에서도 그 정도 편의는 봐줄 수 있을 텐데…….”

    장기의 의견을 소녀들은 재빨리 수락했고, 이에 장기는 서둘러 마구 관람 준비를 하러 떠났다.

    완 소저의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이번 모임은 다소 불만족스러웠는데, 초대한 규수 모두를 데리고 마구를 보여줄 수 있다면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후부의 별장에 있던 규수들은 모두 마구장으로 향했다.

    청춘을 맞이한 아름다운 열댓 명의 규수들이 마구장 한쪽을 차지하자, 마구장의 열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시합에 참여한 공자들은 꼭 약이라도 먹은 듯, 전의에 불탔는데 이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규수 앞에서 지면, 그냥 창피한 게 아니라 나가 죽어야 한다!’

    “저쪽에서 설마하니 유 추승을 데려올 줄이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소염이 입을 열었다.

    “귀찮아지겠는데요?”

    요심이 무심한 표정으로 소염을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왜, 벌써 자신이 없나?”

    소염 역시 자신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의 입술을 비집고 그의 솔직한 심정이 쏟아져 나왔다.

    “유 추승은 무시할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닙니다. 삼 년 전, 새로 합격한 진사들을 이끌고 무진사(*武進士: 무과 전시에 합격한 사람)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자입니다.”

    “그건 무진사, 그것들이 잘난 척 방심했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소염과 달리 요심은 여전히 느긋했다.

    “평소 실력이면 서생 나부랭이들은 쉽게 깔아뭉갤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마구는 전술이야. 저들이 상대를 경시한 게 잘못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지!”

    더 말을 해보려던 소염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세손의 평소 성격을 모르는 그가 아니지 않은가? 

    평왕세손은 유 추승이 별것 아닌 실력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의견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간 분명 화를 낼 게 뻔했다.

    자신은 절대 요심에게 밉보여선 안 되지 않던가!

    “필요한 선수가 있으면 말해. 다 내어줄 터이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기지 못한다면…….”

    요심의 입꼬리 한쪽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요심이 웃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기괴한 표정으로 흘깃 소염을 바라보자,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 소염이 얼른 대답했다.

    “어제도 이겼으니, 오늘도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잠시 말이 없던 요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오추마(*烏騅馬: 항우가 탔다는 준마)를 좋아한다 했었나? 이번 시합에서 이기면 내가 선물로 주지.”

    그 말에 소염의 입이 순식간에 귀에 걸렸다.

    “감사합니다, 세손!”

    요심이 마구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궁리 잘해서, 루 통정 저놈도 같이 손보도록 해.”

    소염이 물었다.

    “루 통정이 세손께 불손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냥 눈에 거슬려.”

    요심은 루안이 눈엣가시 같은지 콧방귀를 날리며 대답했고, 소염도 달리 더 묻지 않았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변덕스러운 요심에게 이미 익숙해진 탓이었다.

    * * *

    대화를 마친 소염은 말들의 상태를 점검하러 떠났다.

    시원한 차양 아래에 남은 요심은 루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그에게 루안은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집안의 영감탱이는 입만 열면 저놈 칭찬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북양왕가에서 버림받아 혈혈단신 몸뚱이조차 의탁할 곳 하나 없는 저런 놈이, 대체 뭐 그리 칭찬할 게 있단 말인가?

    그때, 마구 시합으로 들뜨고 긴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마구 시합이 시작되었다.

    진행자가 시합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경관걸의 말이 먼저 빠르게 치고 나갔다.

    마구를 먼저 선점한 경관걸이 상대의 공문을 향해 질주했다.

    소염이 제 동료들과 마구를 뺏기 위해 경관걸에게 달려들자, 유신지와 루안이 그들의 뒤를 덮치듯 쫓기 시작했다.

    치고받고, 물고 물리며 선수들은 점점 더 경기에 몰입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하고 멋진 순간들이 수차례 마구장을 수놓았고, 그때마다 관중들은 끝도 없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잔뜩 긴장한 유민이 손뼉을 치다 말고 지온에게 물었다.

    “지온 언니,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서정후부에 초대된 이후로 두 사람은 매우 친해져서 말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지온은 경기의 흐름을 보기 위해 마구장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길 수 있어.”

    소염이 어제 구사했던 그 치사한 전술을 다시 펼친다 해도, 이번에 그들이 뽑은 이들은 모두 마구의 고수(高手)들이었기 때문에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할 터였다.

    그때였다.

    깡!

    마구 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터졌다.

    상대 진영을 홀로 뚫고 들어간 루안이 단번에 쏘아 보낸 마구를 유신지가 이어받았고, 여세를 몰아붙인 경완걸이 득점까지 연결한 것이다.

    “꺄아아!”

    기쁨으로 자리에서 튀어 오른 경소소는 소리를 지르며 보이는 사람마다 껴안아 댔다. 득점의 기쁨이 주변에 퍼졌는지, 다른 소녀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고 그중 몇 명은 대범하게도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0